사임을 앞둔 벵자멩 밀피에 예술감독이 뉴욕 시티 발레에서 가져온 모던·컨템퍼러리 작품 4개가 파리 오페라 발레에 올랐다
사임을 앞둔 벵자멩 밀피에 예술감독이 뉴욕 시티 발레에서 가져온 모던·컨템퍼러리 작품 4개가 파리 오페라 발레에 올랐다
지난 2월, 뱅자맹 밀피에 예술감독이 급작스런 사임을 발표한 이후, 파리 오페라 발레는 외형적으로 큰 충격 없이 주어진 잔여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3월 11일부터 4월 1일까지 가르니에 극장에선 시디 라르비 세르카위·에두아르 로크·아튀르 피타가 공동안무한 ‘호두까기 인형’에 파리 오페라 발레의 신진 주역들이 올랐다. 비슷한 시기, 바스티유 오페라에선 3월 19일부터 4월 10일까지 누레예프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현재 파리 오페라를 대표하는 에투알(수석무용수)들이 무대를 수놓았다. 그리고 또 같은 시기, 3월 24일부터 4월 5일까지 가르니에 극장 극장에선 ‘호두까기 인형’과 ‘로미오와 줄리엣’에 각각 참여했던 에이스들과 그동안 상대적으로 클래식 발레에서 주목받지 못한 신인들이 중용된 옴니버스 형태의 ‘쿼드러플 빌’(Quadruple Bill)이 상연됐다.
공연은 12분에서 33분 분량의 중편 작품 4개가 커플링됐다. 알렉세이 라트만스키 ‘일곱 개의 소나타(Seven Sonatas)’, 조지 발란신 ‘2중주 협주곡(Duo Concertant)’, 제롬 로빈스 ‘그 밖의 춤들(Other Dances)’, 저스틴 펙 ‘주름 속에서(In Creases)’의 구성이었다. 예술감독 밀피에가 뉴욕 시티 발레(이하 NYCB)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가깝게 지낸 안무가나 익숙했던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파리 오페라 관객들과 만나는 기회였다. 이채롭게도 모두 피아노의 라이브 반주에 맞춘 신 고전 스타일로 구색이 맞춰졌다. 라트만스키와 펙의 작품은 이번에 파리 오페라 레퍼토리에 편입됐고 ‘2중주 협주곡’은 1972년 뉴욕 초연 이후, 44년 만에 파리 오페라 발레 아카이브에 들어왔다. 로빈스의 ‘그 밖의 춤들’은 1999년에 이미 파리 오페라에 오른 작품이다.
지난 3월 18일 가르니에 극장에선 ‘쿼드러플 빌’의 초연을 앞두고 언론사와 발레단 관계자를 위한 프리뷰 공연인 아방 프리미에르(avant-première)가 열렸다. 리허설 기간에 알렉세이 라트만스키와 저스틴 펙의 작품을 수련한 한국인 단원 박세은이 객석에서 동료들의 활약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스틴 펙은 파리 오페라 발레 연습 기간 동안, 자신이 캐스팅한 박세은의 서열이 솔리스트급이 아닌 것에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컨템퍼러리에 대한 탄력적인 기량을 극찬했다. 박세은은 2016/2017 시즌 저스틴 펙의 ‘주름 속에서’ 재공연 때 다시 한 번 주목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현 예술감독 뱅자맹 밀피에는 1층 중앙에 마련된 콘솔 앞에 앉아 자신의 크리에이티브 팀과 분주하게 영어와 프랑스어를 섞어가며 의사를 교환하고 있었다. 아방 프리미에르가 시작되기 직전, 새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오렐리 뒤퐁이 객석을 찾아 밀피에와 눈인사를 마치고 곧바로 무대로 눈을 돌렸다.
알렉세이 라트만스키 ‘일곱 개의 소나타’
첫 작품인 ‘일곱 개의 소나타’는 스카를라티의 피아노곡에 맞춰 라트만스키가 2009년에 제작한 6인무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서 초연될 땐 베로니카 파르트를 비롯해 클래식 발레에서 탄탄한 기초를 갖춘 세 쌍의 커플이 이루는 환상적인 콤비네이션으로 호평받은 작품이다. 음악은 느긋한 템포로 시작해 점증적으로 속도가 빨라졌다. 무용수들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춤은 다양한 색상을 머금었다. 솔로와 파드되, 3~6인조의 부분 조합이 33분 동안 지루함 없이 일사분란하게 조절되었다. 여성이 남성을 필사적으로 따라가면 그 탄력을 그대로 이어받아 여성을 리프트해서 무대 밖으로 사라지는 스펙터클은 라트만스키의 지평이 볼거리 위주의 클래식 발레에 기반함을 예증하고 있었다. 남성이 부드럽게 손을 써서 파트너의 신체 굴곡을 애무하는 패시지는 농염함이 증발하고 건조하게 마무리됐다. 안무가는 남녀 사이에 이뤄지는 감정 교환보다는 관객들이 발레 테크닉에 집중하도록 파트너링의 기술적 디테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6인의 캐스팅 가운데 돋보인 무용수는 마르크 모로(Marc Moreau)와 알리스 르나방(Alice Renavand)이었다. 둘은 2014년 6월 이미 라트만스키 버전 ‘프시케(Psyche)’에서 레티시야 푸욜과 함께 각각 에로스와 비너스 역을 맡으면서 라트만스키식 언어에 이미 출중한 기량을 보였다. 모로는 2006년 마뉘엘 르그리가 제작한 NHK ‘슈퍼 레슨’에서 샤를린 지젠단네(Charline Giezendanner)와 함께 출연해 이미 일본의 발레 애호가들에겐 익숙한 존재다. 한동안 허리 부상으로 심각하게 은퇴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밀피에 감독의 신임이 두텁고, 그녀의 은퇴 직전 부드러움과 인내심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듀오로 신임 감독 뒤퐁에게도 호평받았다. 이날 공연에서도 발레단의 베테랑 오렐리아 벨레(Aurélia Bellet)의 신체적 장점을 극대화하는 감각적인 포지셔닝으로 동료들의 박수를 독차지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르나방은 르페브르 감독 시절부터 파리 오페라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캐릭터다. 단단한 허벅지와 단정하게 올린 헤어스타일이 평소 프렐조카주나 맥그레거의 컨템퍼러리 작품에서 르나방을 도드라지게 했다. 어려서부터 테니스와 체조로 단련한 길고 선명한 근육의 결들이 라트만스키식 스트레칭과 플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제롬 로빈스의 ‘그 밖의 춤들’
두 번째 작품인 제롬 로빈스의 ‘그 밖의 춤들’은 1976년작으로 쇼팽의 마주르카와 왈츠에 춤을 붙였다. 로빈스는 자신의 작품에 쇼팽의 음악을 즐겨 썼는데, ‘인 더 나이트’에서도 쇼팽의 녹턴을 주음원으로 썼다. ‘그 밖의 춤들’은 나탈리아 마카로바(Natalia Makarova)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Mikhail Baryshnikov) 듀오를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왕과 나’ ‘지붕 위의 바이올린’ 등 수많은 명작 뮤지컬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로빈스는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 활동 이외에도 NYCB를 거쳐, 1974부터 1996년까지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안무를 맡았다. 로빈스의 약 14개 작품이 현재 파리 오페라 발레 레퍼토리에 포함되어 있다. 파리 오페라 발레는 로빈스 사후 10주기를 맞아 2008/2009 시즌 오프닝을 로빈스 헌정 공연으로 채운 적도 있다.
파리 오페라 단원들은 NYCB의 댄서들과 분명히 다른 신체적 조건을 갖고 있지만, 날카롭고 직선적인 신고전주의 움직임에서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로빈스의 안무관을 구현하는 세련미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날 무대에 오른 루드밀라 팔리에로(Ludmila Pagliero)와 마티아스 에만(Mathias Heymann)은 쇼팽의 피아노곡에 맞춰 음악에 대한 자신들의 조예가 얼마나 깊은지를 움직임으로 구현했다. 에만은 투우사가 에너지를 응축했다가 소에 칼을 꽂을 때 온 힘을 다하듯, 체내에 숨겨놓은 에너지를 한순간, 극한으로 분출하는 모습으로 장관을 이뤘다. 2015년 도쿄 세계발레페스티벌에서 같은 작품을 춘 마티외 가니오(Mathieu Ganio)가 청초한 자태로 순수한 남성상을 지향했다면, 에만은 정반대의 지점에서 자신만의 해석을 일궈냈다. 팔리에로는 로빈스 작품에서 흔히 나오는 대각선 방향으로 퍼지는 방사형 실루엣을 날렵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무용수들이 자의적인 템포로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낼 때, 피아노 반주자는 루바토로 그 흐름을 따라가는 모습에서 발레와 클래식 음악 협업의 성공 사례도 목격할 수 있었다.
조지 발란신의 ‘2중주 협주곡’
세 번째 작품은 조지 발란신의 ‘2중주 협주곡’이었다. 동명의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맞춰 17분간 펼치지는 2인무로 신고전주의 음악에 대한 발란신의 끝없는 애정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발란신과 파리 오페라 발레의 인연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제가 18세에 작곡한 교향곡 C장조의 네 개 악장에 맞춰 ‘크리스털 궁전(Le Palais de crystal)’을 제작했고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다이아몬드 각각의 색채를 나타내는 튀튀가 쓰이면서 발란신과 파리 오페라의 이미지는 동반 상승했다. 각 장면의 이야기 배경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화려한 원색을 사용하는 점에서 ‘크리스털 궁전’과 밀피에 버전의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일맥상통한다.
발란신의 ‘2중주 협주곡’은 무대에서 서정적 멜로디를 연주하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옆에 두 남녀가 연주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작품이 시작된다. 1악장이 끝나고 두 무용수가 춤을 시작하는 시퀀스에 대해 발란신은 ’디저트‘라고 칭했다. 라우라 헤켓(Laura Hecquet)과 위고 마샹(Hugo Marchand)은 초연 당시 오리지널 캐스트 권위에 주눅 드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헤켓은 발란신 기법의 특징인 긴 팔을 무기로 깨끗한 음악성을 돋보이게 하는 테크닉으로 관객을 매료시켰다. 마샹은 가벼움과 균형을 유지하면서 힘껏 차오르는 도약감이 인상적이었다.
저스틴 펙 ‘주름 속에서’
마지막 작품은 1987년 워싱턴 태생 신예 안무가, 저스틴 펙의 8인무 ‘주름 속에서’였다. 필립 글래스의 2008년작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네 개의 악장’ 가운데 1·3악장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으로, 2012년 뉴욕 시티 발레에서 초연됐다. 초연 당시 저스틴 펙은 NYCB의 군무로 활동했는데 ‘주름 속에서’는 ‘토끼띠(Year of the Rabbit)’와 함께 NYCB가 그에게 안무 기회를 준 초기 작품이다. 2006년 NYCB 단장 피터 마틴스의 눈에 들어 발레단 견습단원이 된 펙은 2013년 솔리스트로 승급했고 이듬해 NYCB의 상임안무가로 자리를 옮겼다. 무용수 시절 NYCB에선 발란신과 로빈스, 마틴스 작품에 중용됐고 밀피에와 라트만스키, 휠든의 신작에도 메인 캐스트로 자주 등장했다. 안무가의 비중이 커진 요즘 샌프란시스코 발레와 퍼시픽 노스웨스트 발레, LA 댄스 프로젝트에서 신작을 양산한 그가 미국 밖에서는 드디어 파리 오페라 발레에 입성했다.
그동안 미국의 주류 언론들이 평가한 대로 필립 글래스의 현대음악에서 신고전 발레의 정수를 뽑아내는 펙의 박자 감각은 눈부셨다. 코믹하면서 선정적인 안무 감각은 다양한 비주얼 아티스트들과 패션 디자이너와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저급한 기운을 쏙 제거한 것이 그만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무용수간의 밀고 당김이 전체적으로는 기하학적 도형으로 보이도록 개인의 신체를 레고 블록처럼 해체, 조립하는 과정은 자연스레 청년 시절 발란신을 연상케 했다. 명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무용수를 선별하다 보니 발레단 최하 등위인 카드리유 무용수들도 펙의 눈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발레단 운영에 건강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다만, 중편을 넘어 1시간이 넘는 장편 발레를 소화할 자신만의 풍부한 안무 언어를 세공할지가 펙의 추후 과제로 남았다.
사진 Opéra national de Pa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