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장에 갇혀 지내기보다는 늘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갈구하던 주커만의 음악 이상. 그리고 지휘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 비올리스트인 그의 끊임없는 새로움,
지휘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 비올리스트인 주커만의 끊임없는 새로움
“음악을 만들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1971년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떠난 첫 독일 순회 공연에서 핀커스 주커만(Pinchas Zukerman)은 연주를 시작도 하기 전, 한 청중으로부터 집어치우라는 격한 항의를 받았다. 그러자 주커만은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왔다며 위기를 모면한다. 클래식 공연에선 상상할 수조차 없는 험악한 분위기였다. 음악계에서 오죽하면 ‘유대계 마피아’(유대계 음악가들이 마피아라고 불리던 당시의 속어)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그 대명사였던 아이작 스턴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독일 땅에서는 결코 연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턴과는 달리 과감히 독일을 방문했던 유대인 주커만. 특히 주커만의 아버지 예후다와 어머니 미리암 리베르만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영화 같은 인생 역정을 겪었던 부부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주커만의 당찬 모습은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장면은 음악 다큐멘터리 분야의 명 프로듀서 크리스토퍼 누펜이 1974년 제작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Here to Make Music)’에도 생생히 나와 있다.
핀커스 주커만은 1962년 스턴과 파블로 카살스에 의해 발탁돼 텔아비브에서 뉴욕으로 왔다. 줄리아드 음악학교 입학 면접에서 “어느 협주곡을 연주하기 원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느 협주곡을 듣기 원합니까?”라고 되물은 일화는 유명하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이러한 심성은 헨델-할보르센 편곡의 ‘파사칼리아’ 음반을 들어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이츠하크 펄먼의 완벽한 테크닉의 바이올린은 주커만의 한없이 자유로운 비올라 덕에 더 높이 비상한다.
바이올린·비올라·지휘까지, 끊임없는 새로움
새장에 갇혀 지내기보다는 늘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갈구하던 주커만의 음악 이상은, 그가 남긴 100여 장이 넘는 음반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1983년 필립스 레이블로 발매되었던 주커만 지휘의 세인트 폴 체임버 오케스트라 음반을 들어보길 바란다. 퍼셀의 ‘샤콘’은 마치 바흐의 ‘샤콘’처럼 불꽃으로 연소한다. 여기에 따뜻한 인간미가 덧입히면서 엄격한 대위법 속 비할 바 없는 자유가 꿈틀댄다. 미도리와 함께한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도 그렇다. 오이스트라흐 부자(父子), 아르투르 그뤼미오·헤르만 크레버스에 버금가는 영적인 울림이 감지된다.
“실제로 많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비올라도 연주합니다. 다비트 오이스트라흐는 훌륭한 비올리스트였고, 나는 그의 비올라 연주를 자주 들었습니다. 카네기홀에서 아들 이고르와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를 연주하는 것을 본 적도 있지요. 예후디 메뉴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커만의 호기심과 탐구는 늘 새로운 것을 찾게 만들었다. 8살에 바이올린을 먼저 시작했지만 그는 15살에 여름 음악 캠프에서 만난 요세프 긴골트(Josef Gingold)의 권유로 비올라에 빠져들었다. 이는 그의 음악 세계를 넓혀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지휘자로서 지평을 여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48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태어난 주커만은 스턴의 도움으로 14세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5년 만에 레벤트리트 콩쿠르에 우승하며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린다. 곧바로 스폴레토 페스티벌을 비롯한 음악제에 초청돼 직업 연주자로 자리를 잡아가던 주커만은 1969년 스턴의 대타로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하며 일약 스타로 부상했다. 그리고 그해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필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데뷔 앨범을 발매하고, 곧바로 언털 도라티의 런던 심포니와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녹음했다.
비올라를 바이올린만큼 잘했던 주커만이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난 것은 필연이었다.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그는 1971년 아예 같은 악단을 지휘하기에 이르고 그들과 함께한 유럽 투어는 대성공을 거뒀다. 1980년부터 7년 동안 주커만은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 자리한 세인트폴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미국 유일의 전업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7장의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댈러스 심포니와 볼티모어 심포니의 여름축제를 지휘했고, 캐나다 오타와의 국립 예술센터 오케스트라는 음악감독으로 무려 17시즌을 지휘했다. 2009년부터 로열 필하모닉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 중이고, 올해부터는 아델라이데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업을 진행하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과시하고 있다.
실내악 활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1969년 런던 사우스뱅크 사랑의 페스티벌에서 펄먼, 재클린 뒤 프레, 바렌보임, 주빈 메타와 함께 슈베르트의 ‘송어’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는 영상은 지금까지 애호가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독주자, 실내악 연주, 지휘까지 팔방미인이 된 주커만은 이후 전 세계를 다니며 음악전도사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기에 맨해튼 음대에서 시작한 음악 교육의 길은 젊은 음악도를 위한 체계적인 프로그램으로 이어져 현재까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주커만은 자신보다 4년 연상의 여인이었던 플루티스트 유제아니아를 1968년 스폴레토 페스티벌에서 만나 그해 결혼했다. 둘 사이에 태어난 첫딸 아리안나는 소프라노로, 둘째딸 나탈리아는 블루스와 포크 음악을 잘 부르는 가수로 성장했다. 1985년 리치와 이혼한 주커만은 배우 튜즈데이 웰드와 재혼했지만 1998년에 또다시 헤어졌다. 그리고 1966년생으로 오타와 국립 예술센터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 어맨다 포사이스와 세 번째로 결혼했다.
지난해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주커만이 올해는 더 오래 더 다양하게 한국 팬을 만난다. 경기실내악축제의 하이라이트를 이끄는 주커만은 4월 27일 고양아람누리에서 부인 포사이스와 함께 다채로운 이중주를 선보이고, 4월 29일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와는 지휘와 협연을 함께 한다. 5월 1일 예술의전당과 5월 2일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는 자신은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포사이스는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을, 그리고 후반부는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지휘하며 축제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야말로 주커만의 모든 면을 볼 수 있는 음악의 성찬이 기다리고 있다.
사진 경기도문화의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