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마 빛난 음악 선물
소프라노 한예진 독창회
4월 6일
LG아트센터
누구나 꿈꾸는 무대가 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한 공간에서 한 사람에게 오로지 집중할 수 있는 무대. 하지만 그런 무대를 만들기란 쉽지 않다. 그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른 생각과 마음을 가졌기에 특히 클래식 음악 장르로 그들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건 애당초 말이 되지 않는 목표다.
소프라노 한예진의 노래는 사람을 한곳으로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매력도 그렇지만, 그녀가 선곡하는 레퍼토리들이 하나의 완성된 종합 예술을 보는 느낌이었다.
2016년 새봄에 오페라 가수로서의 인생을 새롭게 세팅하고 싶은 마음에 마련했다는 이날 독창회는 그동안 주로 부르던 화려한 베리스모 오페라와는 또 다른 소프라노로서 최고 테크닉이 필요한 벨칸토 곡들이선곡되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삼손’ 중에서 ‘세라핌을 빛나게’와 오페라 ‘줄리오 체사레’ 중 ‘내 운명을 슬퍼하리라’, 말러의 뤼케르트 가곡집 중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면’에서 들려준 그녀의 섬세하고 맑은 음성은 내면의 깊이를 표현하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비제의 ‘네 마음을 열어라’를 비롯해 풀랑크의 작품 역시 내면의 기품이 잘 드러난 무대였다.
진지한 해석으로 빛을 발한 전반부무대와는 다르게 후반부는 그녀만의 밝고 화려한 카리스마가 빛난 무대였다.
쿠르트 바일의 뮤지컬 곡 중 소품과 거슈인의 작품은 청중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아름다운 선율이 주를 이뤘다. 그녀는 노래뿐 아니라 제스처와 연기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다.
마지막 곡 레하르의 오페레타 ‘주디타’ 중 ‘내 입술, 그 입맞춤은 뜨겁고’가 끝날 때까지 객석은 누구도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날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은 두 시간 넘는 무대 안에서 그녀가 보여줬던 집중력 있는 구성이었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갖춘 무대는 감성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듯 이어졌고 귀에 익은 작품만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편견도 깰 수 있었다. 청중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청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전할 수 있을지 이제 연주자들의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때인 것 같다. 국지연
봄의 다양한 얼굴을 마주하다
임가진 바이올린 리사이틀
4월 8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봄이다. 환경의 변화는 일상을 새삼스럽게 한다. 같은 하루인데 불평이 는다. 하긴, 설렘은 자연스럽다. 겨울과 봄은 다이내믹한 변화를 보여준다. 새하얗게 뿌연 온기를 만들던 계절은 선명하게 맑은 기운을 전한다.
봄노래가 듣고 싶었다. 4년째 봄만 되면 들려오는 한 대중가수의 벚꽃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담았다. 금세 지루해졌다. 이에 대항하여 봄이 왜 좋으냐고 따지는 다른 가수의 신곡도 들어봤다. 좀 유치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직설적 표현의 감흥은 잠시뿐이다. 어느 해의 봄은 두근거리지만 어느 해의 봄은 권태롭다. 고전은 익숙하지만 다르게 느낄 수 있어 좋다.
바이올리니스트 임가진이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을 메인 레퍼토리로 리사이틀을 열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은 4번과 같은 때에 작곡되었다. 두 곡이 탄생한 1801년은 청각 장애의 악화로 작곡가가 고통을 느끼던 시기다. 4번은 A단조로, 5번은 F장조로 시작해 상반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힘든 시기를 보내던 작곡가가 괴로움과 희망을 각각 나누어 담은 듯하다. 5번은 아름답고 부드러운 선율이 따스한 봄의 이미지를 닮아 나중에 다른 이로부터 ‘봄’이라는 부제가 붙었지만, 어딘가 쓸쓸함도 느껴진다.
이날 연주는 바흐 ‘샤콘’으로 시작해 베토벤 ‘봄’으로 이어졌다. 엘가의 ‘변덕스러운 여자’, 멘델스존 ‘무언가’, 폴디니 ‘춤추는 인형’, 차이콥스키 ‘무언가(편곡 F. 크라이슬러)’, 드보르자크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편곡 F. 크라이슬러)’, 테데스코 ‘‘세비야의 이발사’ 중 ‘나는야 만능일꾼’의 패러프레이즈’가 연주되었다. 전체 프로그램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또는 화려하고 기교적인 작품들로 구성되어 봄의 다양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연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임가진의 바이올린은 여성스럽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이날 프로그램에 잘 어울리는 음색이었지만, 때때로 음정이 부정확했다. 엘가, 폴디니 곡에서의 아기자기한 움직임은 사랑스러웠지만, 활의 뒷심이 부족해 프레이즈마다 멜로디를 단단하게 전달하지 못했다. 마지막 순서인 테데스코의 작품에서는 손에서 활이 살짝 미끄러지는 실수도 있었다. 덕분에 앙코르로 연주한 프로코피예프 ‘3개의 오렌지의 사랑’ 중 행진곡도 실수투성이 연주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연주 내내 너무나 과격한 피아노 반주가 바이올린의 섬세함을 뭉개버린 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서울시향 제2바이올린 수석 임가진은 서울시향의 매 연주마다 지휘자의 앞자리를 지키며 악단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늘 사려 깊은 매너와 온화한 미소를 보여 많은 클래식 음악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그녀가 “가장 좋은 음악은 ‘내가’ ‘그 시절 그 상황’에 들었던, 잊히지 않는 곡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올 봄, 그녀가 건넨 봄 선물이 기대만큼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부지런히 새로운 계절을 준비할 그녀를 기대해본다. 김호경
신과 인간, 그리고 젊은 순례자
김태형 피아노 독주회
4월 14일
금호아트홀
바흐-부소니 오르간을 위한 10개의 코랄 전주곡,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2번, 바흐-리스트 오르간을 위한 전주곡과 푸가, 리스트 ‘순례의 해’ 제2년 중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04번·‘단테를 읽고’.
그의 레퍼토리를 보고 떠올린 단어는 ‘신과 인간’이었다. 코랄과 피아노 소나타, 코랄과 소네트·단테… 이보다 더 극명하게 주제를 드러낼 수는 없다. 아득한 신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내밀한 생각을 녹여내려 한 것일까? 생각이 깊어질 무렵, 조명이 켜지고 김태형이 걸어 나왔다.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른 그는 바흐-부소니의 오르간을 위한 10개의 코랄 전주곡 중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를 시작했다. 약간은 느리게, 건반을 더듬어 촉감으로 멜로디를 이어나가가는 모습에서 긴장이 느껴졌다. 아니면 그의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손가락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미묘한 시차의 루바토가 마치 신을 향한 인간의 머뭇거림과 같아 보였으니 말이다. 이어진 2곡 역시 어루만지는 터치와 율동하는 아티큘레이션으로 부유하는 듯한 음상을 만들어냈다. ‘바흐는 묵직해야 한다’는 생각을 깨어준 색다른 해석이었다.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은 분위기를 180도 전환했다. 쉴 틈 없이 굴러가는 그의 손가락은 ‘신’이나 ‘인간’ 따위를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특히 4악장의 분산 옥타브는 반짝반짝 빛났다. 그럼에도 결국 그의 터치와 어울리는 2악장이 기억에 남았다. 왼손의 먹먹한 화음 사이에 드러난 내성은 적절한 페달링과 만나 몽환적인 분위기를 완성했다.
2부의 문을 연 리스트-바흐의 오르간을 위한 전주곡과 푸가는 힘차면서도 조곤조곤했고, 리스트 ‘순례의 해’ 제2년 중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04번은 한없이 경쾌하다가 급격히 우울해지는 감정의 변화를 잘 표현했으나 전반적으로 차분했다. 이윽고 많은 이가 기대한 ‘단테를 읽고’가 시작됐다. 단테의 ‘신곡’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은 지옥을 묘사한다. 밑바닥에부터 폭발하는 인간의 고통과 추악함, 그리고 신으로의 열망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증4도의 상징적인 옥타브 연타와 그의 테크닉에 지옥을 살짝 맛볼 ‘뻔’했으나, 그의 단테 역시 전체적으로는 아름다울 뿐이었다. 들고 간 수첩에 ‘좀 더 대범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써내려가다 이내 그 자연스러움과 섬세함이 김태형의 스타일이라는 생각에 펜을 멈추고 말았다. 결국, 수첩에는 ‘아름답다’는 문장만이 남았다.
이날 연주에는 신도, 인간도 없었다. 흑백처럼 대비된 레퍼토리 가운데 그저 젊은 순례자의 모습으로 피아노를 쓰다듬는 김태형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초연히 자신의 스타일로 부유하고 있었다. 아름답게. 전윤혜
토요일은 어린이날?!
국립국악원 토요국악동화
3월 5일~6월 25일 매주 토 오후 2시,
풍류사랑방(4개 작품 교차 공연)
지난 4월 16일 국립국악원이 새롭게 시작한 토요상설공연 ‘토요국악동화’ 관람을 위해 풍류사랑방을 찾았다. ‘토요국악동화’의 입장 연령은 만 12개월부터. 공연장을 찾으면서 ‘어린이 국악 상설공연’ ‘최연소 관객’이라는 두 가지 조합에 한 번 놀랐고, 공연장에서 1000원에 판매 중인 ‘유료 프로그램북’에 두 번 놀랐다. 동화책 크기, 전면 올 컬러로 코팅한 프로그램북은 토요국악동화에 올라가는 4개 공연-‘파란토끼 룰루’(극단 로.기.나래), ‘별주부전’(극단 영), ‘말하는 원숭이’(국악뮤지컬집단 타루), ‘호랑이와 곶감’(국악실내악단 수작골)-의 소개 및 줄거리가 삽화와 함께 실려 있다. 맨 뒷면에 스티커까지 들어 있다. 지금껏 무료 배포하던 프로그램북을 떠올려보면, 국립국악원이 어린이 관객에게 얼마나 공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풍류사랑방에서 처음 마주친 어린이 관객들은 그야말로 신난 모습이었다. 맨발로 활발하게 뛰어다니던 한 남성 관객은 무엇보다 신발을 벗는 공연장이 마음에 든 것 같았고, 한 여성 관객은 프로그램북에 스티커를 붙이는 데 심취해 있었다. 좌식 의자에는 뒤통수가 겨우 보일까 말까 한 관객이 과반수,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관객도 종종 눈에 들어왔다. 공연 중간 칭얼대는 어린이 관객을 안고 좌석 맨 뒤편에서 관람하는 아빠 관객까지, 다른 기획공연에선 볼 수 없는 흥미로운 풍경이 다반사로 펼쳐졌다.
‘토요국악동화’의 작품들은 인형, 그림자극, 국악실내악에 각기 다른 초점을 두고 있다. 이날 공연된 국악뮤지컬집단 타루의 ‘말하는 원숭이’는 부자 형과 가난한 동생 앞에 나타난 말하는 원숭이에 얽힌 이야기를 판소리로 풀어낸 작품. 러닝타임은 약 45분이지만, 이마저 힘겨워 할 어린이를 감안해 관객 참여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한 것에서 타루의 노련미가 돋보였다. 다만 두 명의 소리꾼이 공연의 매듭을 짓고 퇴장하면서 연주자들만 무대에 남겨진 시간에, 관객들이 언제 박수를 쳐야 할지 머뭇대는 풍경은 다소 아쉽게 느껴졌다.
‘5월은 어린이를 위한 달’이다. 때문에 어린이를 위한 공연은 유독 5월에 잔뜩 몰려 있다. 어린이가 5월에만 어린이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일 년 중 어린이가 언제든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은 모두가 필요하다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선뜻 시작한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차세대 관객 개발을 위해 멀지만 큰 한걸음을 내디딘 국립국악원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이러한 장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길 바란다. 김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