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은초의 리코더 특강

나무의 숨결이 빚어낸 청아함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6월 1일 12:00 오전

현대의 오케스트라에 쓰이는 목관악기는 주로 플루트·클라리넷·오보에·바순이다. 그런데 바로크 오케스트라만 해도 바이올린과 함께 선율을 이끌었던 또 다른 목관악기가 있었다. 23번째 악기 시리즈의 주인공, 리코더다.

바로크 시대를 꽃피운 자연의 악기

현대의 오케스트라에 쓰이는 목관악기는 주로 플루트·클라리넷·오보에·바순이다. 그런데 바로크 오케스트라만 해도 바이올린과 함께 선율을 이끌었던 또 다른 목관악기가 있었다. 23번째 악기 시리즈의 주인공, 리코더다.

바로크 시대, 리코더는 청아한 음색과 화려한 기교로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던 악기다. 특유의 맑은 음향은 오케스트라의 색깔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리코더가 오케스트라를 이끌다니, 지금으로서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을 법도 하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리코더는 대부분 학창 시절의 ‘플라스틱 리코더’이기 때문이다.

사실 리코더는 플라스틱 몸체 하나로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역사를 품고 있다. 악기의 기원이 고대의 뼈피리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니 말이다. 크기와 종류 역시 천차만별. 리코더리스트 염은초의 캐리어에는 23개의 리코더가 들어 있었다. 각양각색의 악기를 보고 그 ‘다양함’에 한 번, 예쁜 것만 “골라서 가져왔다”는 말에 두 번 놀랐다.

“리코더리스트들은 보통 악기를 40~50대 소유하고 있어요. 연주할 때는 소프라니노·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 성부 별로 하나씩 5대에 예비용으로 1대씩 더, 총 10대 정도를 가지고 다니죠.”

14세에 야마나시 고음악 콩쿠르 3위 및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며 고음악계의 샛별로 떠오른 염은초는 16세에 최연소로 스위스 취리히 음대에 입학해 리코더 거장 케이스 부케(Kees Boeke)를 사사했다. 2012년에는 니더작센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뒀으며, 바젤 스콜라 칸토룸에서 석사 과정을, 영국 길드홀음악연극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지난해에는 한국 최초의 텔레만 리코더 환상곡 전곡 음반 ‘판타지 인 런던’을 발매하기도 했다.

염은초에게 리코더의 매력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무로부터 만들어지는 ‘자연스럽고 불안정한’ 음색이 리코더만의 매력이에요. 또, 다양한 목소리를 지녔죠. 새가 지저귀는 듯하면서도 우아하고, 때로는 중후하기도 하고요. 이 모든 음색을 보존하기 위해 현재까지도 개량이 더딘 편이에요.”

자, 지금부터 염은초와 함께 리코더의 매력 속으로 빠져보자.

중세 시대

리코더와 같은 세로 피리 형태는 고대부터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7개의 지공(앞)과 1개의 엄지 지공(뒤), 총 8개의 지공을 가진 악기만을 리코더로 분류한다. 이같은 모습이 처음 등장한 것이 중세 시대다. 일체형의 중세 리코더는 후대의 악기보다 크고 낮은 음역을 지니며, 공명에 유리하다.

르네상스 시대

16세기, 기악의 발달로 리코더는 궁정뿐 아니라 민가로 널리 퍼지며 큰 인기를 끌었다. 르네상스 리코더는 서로 분리되는 2관형으로, 이 시기에는 크기가 다른 리코더족이 앙상블을 이루는 ‘리코더 콘소트’가 유행이었다. 이로써 다양한 크기의 리코더가 탄생할 수 있었다.

바로크 시대

17세기 들어 독주 악기로서 역할이 커지며 리코더가 개량되기 시작했다. 정확한 음정을 위해 원통이 3개의 관으로 분리됐고, 아래관의 지름이 좁아져 현재의 리코더 같은 형태를 띠게 됐다. 음역이 확장되고 세밀한 반음계 표현이 가능해지며 악기로서 가능성이 커졌다. 비발디·바흐·텔레만을 비롯한 많은 작곡가가 리코더를 위한 곡을 작곡하며 리코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점점 입지가 축소된 리코더

“바로크 시대 이후 플루트·오보에 등 다른 목관악기들이 개량을 거쳐 키를 달고 음량이 커진 데 비해, 악기 장인들이 리코더만은 그대로 뒀어요. 워낙에 작은 소리가 매력이라 그런 것 같아요. 오케스트라가 대형화하며 소리가 작은 리코더는 자연스레 악기 구성에서 사라졌죠.”

플루트=리코더?

고전시대 이전까지 ‘플루트’는 리코더를 나타내는 단어였다. 현재의 플루트는 당시 ‘트라베소(Traverso, 가로) 플루트’라 불렸다. “한국에서 관악기를 아울러 ‘피리’라고 말하듯, 유럽은 ‘플루트’라 불렀어요. 원래 가로 플루트, 세로 플루트로 구분하다가, 고전 시대에 세로 플루트(리코더)가 사라지니 자연스레 가로 플루트가 ‘플루트’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거죠.”

다시 깨어난 리코더

20세기 초 리코더는 악기 제작가 아널드 돌메치에 의해 영국에서 부활한다. “세로 플루트가 등장하니 다시 ‘플루트’라는 이름에 혼동이 왔어요. 그래서 아예 돌메치가 악기에 ‘리코더’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플루트’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죠.”

돌메치는 바로크 시대 양식대로 리코더 원형을 복원했으며, 이후 소프라노·테너·베이스 등 다양한 종류의 리코더를 재현함으로써 현대 리코더 연주자들이 탄생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a href="#" data-lightbox="image-1" title="리코더의 종류
① 클라이네 소프라니노(C조) ② 소프라니노(F조) ③ 소프라노(C조)
④ 알토(F조) ⑤ 보이스 플루트(D조) ⑥ 테너(C조) ⑦ 베이스(F조)”>
▲ 리코더의 종류
① 클라이네 소프라니노(C조) ② 소프라니노(F조) ③ 소프라노(C조)
④ 알토(F조) ⑤ 보이스 플루트(D조) ⑥ 테너(C조) ⑦ 베이스(F조)

골고루 쓰이는 악기

“다른 목관악기들이 크기별로 골고루 쓰이지 않는 데 비해, 리코더는 소프라니노부터 베이스 리코더까지 고르게 사용됐어요. 주로 사교 모임의 합주 악기로 사용돼 항상 세트로 움직였죠. 최소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 리코더 네 종류부터 사람들이 더 많이 오면 소프라니노 리코더, 콘트라베이스 리코더… 식으로 확장되곤 했어요. 악기 브랜드들도 대부분 세트로 판매해요.”

보이스 플루트

“‘사람의 목소리와 닮았다’ 하여 보이스 플루트로 불려요. 알토 리코더(F조)와 테너 리코더(C조) 사이의 D조 악기죠. 은근하고 우아한 음색이 특징인데, 특히 프랑스인들이 선호해요.”

작을수록 어려워!

“악기가 작을수록 호흡 조절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까다롭죠. 가볍기 때문에 손에서 놓칠 위험도 있고요. 실제로 오스트리아에서 앙상블 공연을 하다가 리더가 갑자기 소프라니노 리코더를 놓쳐 객석으로 날아가버린 적이 있어요.”(웃음)

바로크(영국)식 리코더 vs 독일식 리코더

우리가 초등학교 때 불어본 소프라노 리코더는 독일식이다. 바로크식 리코더에서 F음을 더 편하게 낼 수 있도록 개조했다.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바로크식 리코더보다 음정의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다.

구관이 명관

리코더는 현악기와 마찬가지로 오래될수록 좋은 소리가 난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고악기 박물관 ‘베이트 컬렉션’에 초대돼 16~18세기 리코더를 불어봤어요. 워낙 오래돼 좋고 나쁨을 따질 수 없었죠. 현재 그 악기 중 브레산 모델의 복제품을 사용하는데, 연주하면 할수록 ‘고악기가 제대로 보존됐다면 정말 좋은 소리가 났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관리가 잘된 고악기는 대가들이 몇 대 소장하고 있어요. 복제품과는 차원이 다른 소리가 나죠.”

염은초의 악기

악기 중 상당수가 L.D.P를 겹친 로고가 찍혀 있다. “제 악기를 만든 이탈리아의 장인 루카 데 파올리스(Luca De Paolis)의 이니셜이에요. ‘베이트 컬렉션’은 원래 악기를 만지는 것조차 금하는 곳인데, 이분은 악기를 너무 잘 만들어 복제까지 허락했다고 해요.”

좋은 악기의 기준?

“7년 정도를 기점으로 봐요. 이때 계속 더 좋아지는 악기가 있는 반면, ‘죽는’ 악기도 생기죠. 점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더니 5분도 채 불지 못하는…. 7년 후에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니, 재밌는 악기죠?”

악기의 재료

“노란빛을 띠는 호주산 회양목이 좋아요. 저는 올리브나무와 상아로 만든 악기를 사용해요.” 현재 상아 사용은 금지된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녀의 상아 리코더는 “100년 전 제작된 악기”라 답했다.

연주자들이 선호하는 브랜드는?

“브랜드보다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느냐’가 중요해요. 독일 제품이 일률적인 음색을 지니는 데 비해 이탈리아 악기는 각각의 개성이 담긴 수제 제품이 많죠.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들었다”는 말이 리코더에도 적용되는 셈이에요. 그래서 이탈리아 악기는 모험심 강한 연주자가 많이 사용하죠. 남성적이고 안정적인 소리를 즐기는 연주자들은 주로 독일 악기를 쓰고요. 여성 연주자 중에서 가냘프거나 호흡이 약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우아한 음색의 프랑스 악기를 선호해요. 저는 이탈리아 악기를 좋아해요.”


▲ 리코더의 구조

블록

취구에 끼운 나무 블록. “리코더 음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에요. 숨이 블록을 통과하면서 소리 자체가 걸러진다 할까요. 제일 좋은 목재로 공들여 깎죠. 호흡 시 발생하는 수분을 흡수하는 곳이기도 해요.”

윈드웨이

말 그대로 바람길. 숨을 불어넣는 입구다. 곡선형 윈드웨이와 직선형 윈드웨이로 나뉜다. “편안한 소리를 추구하느냐, 직선적인 소리를 원하느냐에 따라 곡선 유무를 결정하면 원하는 대로 장인이 깎아주죠. 저는 중간 정도의 윈드웨이를 사용해요.”

계절 타는 리코더를 위한 ‘실’ 

어릴 적 플라스틱 리코더를 떠올리며 분해한 나무 리코더. 실이 감겨 있는 조인트의 모습에 놀랐다.

“계절에 따라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나무의 특성상 접합부가 항상 들어맞을 수 없어요. 그래서 나무가 팽창하는 여름에는 실을 풀고, 수축하는 겨울에는 실을 더 감아 일정한 굵기를 유지하죠.”

라비움

블록을 통과한 숨 일부는 라비움을 따라 빠져나간다. “호흡이 빠져나감으로써 악기 자체의 압력이 줄어들어 부는 힘이 덜 들어요. 많은 호흡량으로도 악기를 편안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이유죠. 소리가 깔끔하게 나갈 수 있도록 대각선 형태를 띱니다. 리코더 중에서 제일 얇은 부분이라 조심히 다뤄야 해요.”

개량 리코더

“다른 악기에 비해 개량의 가능성이 많죠. 전자 리코더가 나온 지도 얼마 안 됐고, 키를 달아 음량을 키운 것도 이제야 시작됐고….”

염은초는 소프라노 리코더에 2개의 키를 추가한 개량 리코더를 가지고 있다. “일반 소프라노 리코더보다 2cm 더 길어요. 더 큰 음량을 위해 크기를 키웠지만, 악기가 길어지며 상대적으로 음이 낮아졌고, 음정을 맞추기 위한 키를 달았죠. 소리만 커졌다 뿐 추가된 음은 없어요. 음역 확장을 위한 악기는 현재 개발 중입니다.”

이를 닦듯, 항상 청결하게!

리코더는 나무에 직접 입이 닿고, 숨이 통하기에 청결한 관리는 필수. “공연 전이나, 소리가 막혔을 때 세척제(①)를 라비움에 한 방울 떨어뜨려요. 라비움은 사람의 입과 같아요. 항상 양치를 해야 하죠.”

한 달에 한 번, 오일 마사지

얼굴에 팩을 하듯, 건조한 나무도 한 달에 한 번 오일링으로 부드럽게 풀어준다.

“두 가지 솔로 리코더 구석구석 오일(②)을 바르고, 24시간이 지난 뒤 닦아내요. 참! 비행기 타기 이틀 전 오일링은 필수에요. 건조한 기내 공기 때문에 악기가 깨질 위험이 있거든요.”

실크 청소봉
“유학 시절 친구가 선물해준 실크 스카프로 리코더를 청소해요. 좋은 소재를 쓰면 악기도 알아주지 않을까요?”

추억이 깃든 음반

염은초는 14년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 입학하며 구입한 음반을 촬영장에 가져왔다. 포장 비닐의 해설 스티커까지 직접 붙여 보관했단다.

“콘라트 슈타인만의 비발디 협주곡 전집입니다. 처음과 마지막 트랙에서 리코더가 새소리 같은 자연적인 음향을 내요. 마지막에는 새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모든 곡이 끝납니다. 바로크의 음색을 가장 잘 담아낸 음반이라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엔 연주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산 앨범이었는데, 10년 후 콘라트 슈타인만을 지도교수로 만나게 됐어요. 놀라운 인연이죠.”

사진 강태욱(Workroom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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