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후반에 접어든 안무가 매슈 본이 ‘온 가족을 위한 쇼’에 역량을 집중한 안무작이 한국 무대에 처음 오른다. 그의 진심은 한국에서도 통할 것인가?
가족 단위 관객은 극장 감독이나 흥행업자들에게 매력적인 마케팅 타깃이다. 한 공연에 기본으로 서 너 명이 함께 움직인다. 재미만 있다면 반복 관람하기 쉬운 장르다. 그러나 어른과 어린이가 동시에 감동하는 코드를 만드는 안무가의 존재는 매우 드물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영연방에서 가족물로 호평받은 안무가는 2007~2012년 서호주 발레단 감독으로 활동한 볼차노 태생 이반 카발라리(Ivan Cavallari)와 밀라노 출신 라우라 스코치(Laura Scozzi)가 대표 주자다. 이반 카발라리의 화제작 ‘호두까기 인형’(2008)은 그가 새로 감독에 부임한 알자스 랭 오페라 발레에서도 지난 4월까지 매진을 거듭했다. 로열 오페라가 포용한 라우라 스코치는 도니제티 ‘연대의 딸’, 마스네 ‘신데렐라’에서 기존 안무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던 위트 넘치는 연출로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오페라와 발레를 넘나들며 무용과 가창을 혼합하는 연출력, 우화에 동시대의 사회상을 덧대는 풍자가 일품이다. 마르셀 마르소에게 마임을 사사하고, 사회학을 전공한 이력이 스코치의 작품에 자연스레 묻어난다. 최근작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에선 힙합이 가미되어 세대를 초월한 인기에 도전하고 있다.
코벤트가든 로열 오페라 밖에서 영국의 가족 관객을 꾸준하게 흡인한 공연물을 살펴보면 뮤지컬에선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이었다. ‘빌리 엘리어트’는 2005년 초연부터 공연을 이어온 빅토리아 팰리스 극장의 보수로 인해 지난 4월 9일 마지막 런던 공연을 갖고 영국 지방과 아일랜드 투어에 들어갔다. 해외에서 1100만, 런던에서만 540만 관객이 ‘빌리 엘리어트’를 관람했다. ‘빌리 엘리어트’를 본거지에서 볼 수 없는 지금, 런던 시장을 지배하는 독보적 가족물은 안무가 매슈 본이 자신의 컴퍼니 뉴어드벤처스에서 내놓는 연작들이다.
‘고전의 재해석’보다 ‘전 세대를 위한 작품’으로
영국 무용 공연의 중심, 새들러스 웰스에서 뉴어드벤처스는 2015년 12월 1일부터 2016년 1월 24일까지 본의 2012년 작 ‘잠자는 숲 속의 미녀(Sleeping Beauty)’를 상주 단체 자격으로 올렸다. 새들러스 웰스의 운영 감독, 알리스테어 스팰딩은 “고전의 플롯을 전 세대가 공감하는 코미디로 세련되게 풀어내는 것이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최고 매력”이라고 공연 추천사에 적었다. 2012년과 마찬가지로 이번 새들러스 웰스 시리즈도 전회 매진이었다. 매슈 본은 2016년 1월 첫날 영국 왕실에서 기사 작위를 받아, 이제 공식적인 언론 기사엔 이름 앞에 ‘경’(Sir)의 칭호가 붙는다. 지금껏 로열 발레에 단 한 작품도 올리지 않았지만 1990년대 이후 몸담은 ‘어드벤처스 인 모션 픽처스’와 뉴어드벤처스에서 거둔 대중적 성과들은 탁월했다. 영화와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영국을 풍미한 고전을 돌아보게 했고, 여러 차례 토니상과 이브닝 스탠더드 상을 수상하며 영국 대중 무용을 대표하는 안무가로 자리를 굳혔다.
2000년 LG아트센터가 개관하면서 본의 최신작들은 큰 시차 없이 한국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가위 손’의 연이은 내한으로 그는 현존 영국 안무가 가운데 가장 한국 관객에게 친숙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첫 내한작 ‘백조의 호수’가 서울에서 처음 공연된 2003년 5월에는 가히 ‘현상’으로 부를 진풍경이 공연장 로비에서 연출됐다. 서울 공연 전에 열린 6주간의 일본 공연이 모두 매진되면서 미처 못 보거나 재관람하려는 일본 관객들이 강남을 찾았고 대량의 티켓이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 무용평론가 이종호는 “어느 정도 예술성과 흥행성을 두루 갖췄다는 점에서 이렇다 할 문화상품이 없는 한국 춤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의 작품들을 평가했다.
매슈 본의 전작이 가족용 공연에 적합하진 않다. 동성애 이슈의 ‘백조의 호수’나 성행위가 연출되는 ‘카맨(The Car Man)’의 관객 확장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증가세가 멈췄다. 2010년대 들어 본은 신작보다는 신선함을 잃어가는 기존 작품에 새 숨을 넣는 작업에 매진했다. 2012년엔 ‘호두까기 인형’ 20주년 공연을, 2014년엔 초연 10년이 다 된 ‘가위손’을 리바이벌하는 식이다.
2016년 들어 매슈 본과 그의 컴퍼니 뉴어드벤처스의 활동은 역동적이다. 지난 4월 5일엔 1948년 영화로 제작된 ‘분홍신(Red Shoes)’이 올해 11월 플리머스 왕립 극장을 시작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새들러스 웰스에 오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스타 마케팅에 한동안 소홀하던 뉴어드벤처스의 홍보 방식도 ‘분홍신’의 주역을 맡을 호주 출신 애슐리 쇼(Ashley Shaw)를 전면에 내세우며 제작 초기부터 이슈 몰이에 나섰다.
50대 후반에 접어든 매슈 본은 이제 ‘고전의 재해석’보다 ‘온 가족을 위한 쇼’에 역량을 집중하는 모습이다. 또 아동과 어른이 함께 열광하는 ‘호두까기 인형’ 같은 작품을 정련하는 데 힘을 모으고 있다. 본이 ‘호두까기 인형’을 안무한 것은 1992년 영국 노스 오페라의 요청에 의해서다. 그리고 2002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런던 새들러스 웰스에서 같은 작품이 다시 빛을 보기까지 본은 그 사이 여러 방면에서 소양을 늘려왔다. 평소 춤을 즐기지 않던 사람이 거부감 없이 즐길 작품을 위해 안무가는 제작자의 마인드를 갖춰야 함을 명찰했고, 자신의 작품을 즐기던 꼬마들이 뉴어드벤처스에 입단하는 것에 무한한 자긍심을 갖게 됐다.
그런 경험 끝에 현재 진력하는 작품이 ‘잠자는 숲 속의 미녀’다. 관객들이 자신의 연령대에 맞춰, 보이는 대로, 즐기는 작품을 만드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본이 그 난관에 도전한 계기는 2011년 봄, 모스크바를 방문하면서다. 차이콥스키가 머물던 자취들을 방문하면서 발레단 25주년작으로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외형적으로는 차이콥스키 발레 3부작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진 것이다. 매슈 본은 입수 가능한 모든 버전의 발레와 고전을 읽는 것으로 신작에 착수했다. 1697년 샤를 페로 버전부터 1959년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까지 대중과 호흡하는 각종 고전의 장점을 취합했다. 그 결과, 그림 형제의 1812년 버전 줄거리가 발레화에 가장 적합한 스토리 라인임을 확인했다. 다음 단계에선 차이콥스키와 프티파가 공조한 음악과 무용 언어 사이의 상관성을 살펴나갔다. 본이 내린 결론은 “줄거리만으로는 대중이 춤을 찾지 않으며 음악성에 충실한 무브먼트를 만들자”였다. 음악성 보강을 위해 2012년 오케스트라의 단원 인선에 많은 노력이 가해졌고, ‘댄스 캡틴제’를 도입해 피아 드라이버(Pia Driver)와 도미닉 노스(Dominic North)가 약속된 동작의 디테일을 책임졌다. 뉴어드벤처스의 단원들은 신인 시절 발레 면에서 뛰어난 인재들로 꼽히진 않았지만, 경력을 더해갈수록 연기의 깊이가 더해 지금은 발레단의 브랜드가 됐다.
시공간의 변화가 주는 흥미로운 볼거리
매슈 본의 오랜 연구 끝에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총 4부로 구성됐다. 1부는 1890년 오로라의 탄생, 2부는 1911년 오로라의 생일 파티, 3부는 2011년 오로라가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 4부는 오로라의 결혼으로 짜여졌다. 중간 휴식은 한 번뿐이고 각 장면들은 속도감 있게 전개됐다. 장과 막이 바뀔 때마다 작품의 내러티브는 ‘아주 오래전에 이야기(Once Upon a Time)’로 시작되면서 아동 관객의 자연스러운 이해를 도모했다. 본은 작품의 전개에 따라 성인 관객들이 주역 사이의 애정 관계에선 앤 라이스(Anne Rice)의 선정소설을, 급작스런 장면의 변화에선 앤절라 카터(Angela Carter)의 공상 소설을 읽는 느낌을 공유하길 바랐다.
무엇보다 시대 배경이 바뀔 때마다 작품 의상이 바뀌는 재미가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와 조지 5세 시기를 거쳐 현대로 시공간이 변화하면서 본과 제작진이 기울인 고증의 성과가 여실히 드러났다. 특히 의상디자이너 레즈 브라더스턴(Lez Brotherston)은 영국 복식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의상들이 시대 고증에 충실하면서 무용에 불편하지 않도록 기능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의상 제작에 투입된 인원이 시대극을 다룬 무용과 뮤지컬의 그것에 비해 두 배가 넘었다.
차이콥스키의 발레와 비교해 성 역할을 바꾼 설정 역시 흥미로웠다. 발레에서 여성 댄서가 맡는 라일락 요정을 이 작품에선 ‘요정들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남자 무용수들이 맡았다. 악의 정점인 마녀 카라보스 역과 모친의 유지를 이어 오로라의 행복을 방해하는 카라도크 역은 남성 댄서에 의한 1인 2역으로 처리됐다. 발레에선 데지레 왕자가 키스로 오로라의 잠을 깨우지만 이 작품에선 레오라는 이름의 궁중 문지기가 역할을 대신한다. 레오 역의 퍼스트 캐스트인 도미니크 노스는 젊은 시절의 아담 쿠퍼를 연상케 하는 마스크와 핏으로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1부에선 아기를 본뜬 인형이 춤을 추는 장면부터 나이를 불문하고 관객 모두의 몰입이 대단했다. 오랫동안 자식을 갖지 못한 국왕과 왕비가 침실의 아이를 정말 자신들의 소생으로 생각하는지, 평민의 딸을 양녀로 맞은 게 아닌지, 성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의문을 가지도록 설계한 연기의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2부에선 하얀 의상의 남녀 군무에 이어 정원의 댄스파티 장면이 영국 궁정 문화에 대한 신비감을 증폭시켰다. 1910년대 영국 남녀가 입던 원피스 모습을 요즘에는 윔블던 테니스 선수들에게서나 볼 수 있다고 가족 관객끼리 중간 휴식 시간에 담소 나누는 모습이 본이 노린 지점이다. 전체적으로 의상 콘셉트는 마크 모리스의 느낌이 물씬 났고, 엑소시스트처럼 연기하는 악령의 연기는 우스꽝스럽지만 연기가 심각해서 관객들의 헛웃음이 연이어 나왔다.
2000년대 초·중반 질적으로 우수한, 고전의 개작 버전을 볼 수 없던 한국의 무용 현실에서 매슈 본의 작품들은 그 틈새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영국에선 ‘댄스 뮤지컬’이라는 네이밍이 아니더라도 본의 가족물은 여전히 질적으로 충분한 흥행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매슈 본의 진심은 한국에서도 통할 것인가? 뉴어드벤처스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밀라노를 거쳐 아시아 투어에 나서 한국에선 6월 22일부터 7월 3일까지 LG아트센터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