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개성의 지휘봉, 작품과 악단 재구성하다
마리오 펜차고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일찍이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을 통해 개성 있는 해석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직접 접해본 그는 독특하고 모방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지휘자였다. 펜차고는 손닿는 것마다 금으로 만드는 미다스였다. 이 스위스 출신 지휘자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낯설고 새로웠다. 성실하고 헌신적인 비팅이 길어 올리는 확고한 설득력이 거기 있었다.
5월 1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향의 정기공연 무대였다. 첫 곡인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부터 달랐다. 뇌리에 떠오르는 묵직하고 장엄한 장면과 사뭇 차이가 있었다. 펜차고의 해석은 산뜻하고 입체적이었다. 지휘대의 펜차고는 느린 패시지에서도 뛰다시피 분주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템포에 자주 변화를 주어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흐름에 인간적인 색채를 부여했다. 음의 덩어리가 뭉치는 일 없이 풀어진 채 전달됐다.
공연 전체를 놓고 보면 스테판 피 재키브가 협연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은 이질적이었다. 재키브의 좌표는 평온하고 조화로운 모차르트의 세계와 평범하고 따분한 미완의 세계의 경계에 있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미스터치는 없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음 하나하나에 필요한 에너지에는 못 미치는 연주였다. 과연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작품에는 숨을 곳이 없었다. 확실하게 형상화되지 않은 음들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불발탄처럼 홀 안을 떠다녔다. 파가니니나 차이콥스키 협주곡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 협주곡에서 서울시향의 반주는 근래 보기 드물게 완성도 높았다. 재키브가 좀 더 여유 있게 풀 톤을 내줬으면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날의 백미는 메인 프로그램인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이었다. 그야말로 초 개성의 명연이었다. 물론 교향곡 7번은 드보르자크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교향곡 8·9번과 음반에 함께 수록되곤 하는 명곡이다. 그러나 펜차고와 서울시향은 이 곡에서 미처 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망치로 부순 뒤 접착제로 붙인 도자기 같았다. 해체와 재구성의 실험과 도전이 주는 긴장감이 팽팽했다. 보헤미아의 흙냄새와 노스탤지어에서 떼지 못한 시선으로는 미처 볼 수 없었던 관현악의 구조적 미학이 엿보였다. 지었다 허물기를 거듭하는 건축물에서 파생되는 존재감과 양감이 관과 현에 실렸다. 유명한 3악장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격정적이면서 투명하게 파헤친 4악장은 잊지 못할 것이다. 서울시향의 현악군은 이날 완전히 새로 태어난 듯했다. 고음역의 유니즌은 유럽 명문 악단의 음반을 들을 때와 구별하기 어려웠다. 팀파니의 연타는 적재적소에 서사시적 드라마를 부여했다. 금관과 목관의 활약도 서울시향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했다. 소극적인 호른은 여전히 미해결된 고질적인 문제였다.
모방이 아닌 독자적인 ‘해석’을 오랜만에 접했다. 보수적인 표준과 클리셰를 뒤집는 순간들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펜차고의 지휘봉은 서울시향의 근본부터 흔들어놓았다. 쌓인 채 퇴적되어가던 것들이 다시 흩어졌다. 다음에는 펜차고의 브루크너 교향곡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 서울시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