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내한, 길 샤함식 바로크의 미래를 가늠하는 시간이 온다
세밀하고 풍윤한 음색으로 정상에 서온 바이올리니스트
1971년생 길 샤함은 2000년대 후반부터 도이치그라모폰(DG) 재킷에서 친숙하던 모습에서 조금씩 멀어져갔다. 1990년대, 손에 잡힐 만한 크기의 볼집과 간간이 안경을 쓴 채로 사진 촬영에 임하던 그는,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의 학생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2006년 한국에 왔을 때에 비해 3년이 흐른 2009년 세종솔로이스츠 협연으로 서울을 찾았을 때 놀라웠던 건, 그의 수척해진 몸집이었다. 2010년 마리스 얀손스/로열 콘세르트헤바우(RCO)와 내한 때 그의 몸은 한층 더 얇아졌고, 지난해 오스모 벤스케/런던 심포니(LSO)와 브리튼 협주곡을 연주하러 런던 바비컨센터에 오를 땐, 전혀 다른 외양의 길 샤함이 서 있었다. 머리엔 눈이 내렸고, 얼굴은 근육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날 만큼 메말랐다.
하지만 달라진 외모와 상관없이 길 샤함을 정상의 자리에 머무르게 하는 힘은 세밀하고 풍윤한 음색이다. 1997년 샤함이 DG에서 발매한 소품집 ‘로망스’의 한국판에는 홍난파의 ‘사랑’이 수록됐다. 당시엔 세계적인 명성의 연주가들이 한국 관객을 위해 보너스 트랙 개념으로 한국 관련 소품을 싣는 게 유행이었다. 마이스키가 남긴 ‘청산에 살리라’(작곡 김연준)나 스톨츠먼이 녹음한 ‘사랑하기 때문에’(작곡 유재하)처럼 샤함의 ‘사랑’도 우리 정서를 절묘한 뉘앙스로 살린 연주자의 다감함이 각별했다. 당시 동아일보 유윤종 기자의 지적처럼 “아름다운 음색에 대한 샤함의 천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앨범이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길 샤함의 음색은 매력적이다. 무대에 입장할 때부터 관객 인사를 마치고 지휘자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은 물론 연주를 마치고 좌중을 맞이할 때까지, 시종일관 느긋함이 이어진다. 길 샤함의 최근 공연을 직접 본 적이 없다면, 2015년 정명훈/라디오 프랑스 필과 함께한 브루흐 협주곡 영상을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된다. 공연 내내 감미롭던 음색이 연주를 전후해 그의 미소와 함께 은은히 퍼진다. 길 샤함이 작위적인 표정이나 설정으로 부담을 준 적이 있던가? 지난해 요엘 레비/KBS 교향악단과의 멘델스존 협주곡 협연이 끝나고 음악 칼럼니스트 최은규는 “쓸데없는 템포 루바토나 감상적 제스처를 모두 생략한 채, 오직 선율의 단순한 아름다움을 담백하면서 견고한 소리로 표현”했다고 리뷰했다.
길 샤함의 지난 열 차례의 내한공연은 대체로 이런 분위기였다. 1990년대부터 그의 독주회를 거의 전담으로 맡던 에구치 아키라가 1996·1998·2007년 리사이틀을 함께했다. 스승 강효가 감독으로 있는 세종솔로이스츠와 2000·2003·2009년 협연했고, 2006년엔 길 샤함·브론프만·뫼르크 트리오로, 2010년엔 RCO 협연으로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2012년엔 김대진/수원시향과 브람스 협주곡을, 2015년엔 KBS교향악단과 같이 했다. 김대진과는 2003년 부인 아델 앤서니와 함께한 리사이틀(한전 아츠풀센터)에서 건반 반주자로 먼저 만난 인연이 있다.
그동안 꾸준하게 한국을 찾았지만 마이스키나 크레머, 벤게로프의 내한과 비교해 샤함의 한국 방문은 소리 소문 없이 끝나곤 했다. 2016년 그의 열한 번째, 열두 번째 내한이 예정되어 있다. 6월 27일 대구에 이어, 7월 2일 예술의전당에서 세종솔로이스츠와 비발디 ‘사계’를 협연하고, 12월 4일엔 얀손스/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 ‘사계’는 1993년 오르페우스 체임버와 녹음했고, 세종솔로이스츠와는 하르트만·하이든 협주곡(카나리 클래식스)을 녹음한 바 있다. 2000년 내한에서 세종솔로이스츠와 ‘사계’를 연주하기도 했다.
LSO 데뷔 후, 달라진 연주 인생
길 샤함의 가정은 전형적인 유대계 집안이다. 미국 일리노이에서 천체물리학을 전공한 부친과 유전학을 공부한 모친 사이에 태어난 그는 1973년 부모와 함께 이스라엘로 건너갔고, 예루살렘의 루빈 아카데미에서 새뮤얼 번스타인 문하에서 바이올린을 시작했으며, 학교를 찾은 스턴과 셰링이 신동의 재능을 주위에 알렸다. 1980년 콜로라도 아스펜 음악제에서 줄리아드 음악원의 딜레이 교수가 샤함을 발견했다. 딜레이는 나중에 특별 장학생을 제안했고, 1982년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근거를 두고 있다.
1981년 예루살렘 심포니와의 협연으로 데뷔한 샤함이 콘서트 연주자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82년 주빈 메타/이스라엘 필 정기연주회부터다. 메타는 샤함과 가장 오랫동안 인연을 맺고 있는 지휘자로 2011년 BBC 프롬스 도중 팔레스타인 독립 시위대가 공연을 방해할 때도 둘은 함께 브루흐 협주곡 1번을 공연했다. 1988년 열일곱 살 나이에 베를린 필(BPO)에 데뷔한 이래, 2015년 오랜만에 BPO에 돌아올 때도 코른골트 협주곡을 지휘한 건 메타였다.
길 샤함은 미국 최고의 신인에게 주어지는 에이버리 피셔상을 1990년 수상했고, 이듬해 다시 줄리아드 음악원으로 돌아가 옌스 엘레르만과 도로시 딜레이의 가르침을 받았다 1986년부터 줄리어드 정교수가 된 강효에게도 배웠고, 배필도 이곳에서 만났다. 강효는 레슨에 예정된 곡 이외에 여러 작품을 이미 완성된 수준으로 준비해오는 샤함의 열성을 높이 평가했다. 스승과 관련된 공연들은 소속 매니지먼트사의 의사에 앞서 샤함이 주도적으로 스케줄을 결정하고 조절한다.
1987년 그는 LSO와 함께한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2번으로 영국에 데뷔했는데, 1989년 컬럼비아 대학 시험을 준비하던 도중 급성 중이염을 앓은 이차크 펄만의 LSO 연주 대타로 의뢰받았다. 아주 잠시 고민한 끝에 ‘캔터베리 이야기’ 수업을 빼먹는 대신 런던행 콩코드기에 올랐고, 마이클 틸슨 토머스와 로열 페스티홀에서 만나 시벨리우스, 브루흐 협주곡을 두 차례 함께 했다. 이후 길 샤함의 연주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동안 연중 4~5회가량 잡히던 공연이 LSO 협연 이후 60회로 늘어난 것이다.
깜짝 연주로 비평가들을 사로잡은 샤함은 지금도 위그모어홀과 LSO를 중심에 두고 영국 활동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2010년 필하모니아 정기연주회와 BBC 프롬스에서 함께한 ‘1930년대 바이올린 협주곡 시리즈’는 성공한 기획과 완벽한 연주의 전형이다. 인명사전 후즈후(Who’s Who)의 색인처럼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쓰인 바이올린 협주곡 대부분(스트라빈스키·버르토크·프로코피예프·쇤베르크·베르크·브리튼·월튼·바버·시마노프스키·힌데미트·미요·블로흐·하르트만·코른골트)이 앨범과 공연으로 망라됐다. 힐러리 한을 제외하면 20세기 음악에 이 정도 관심을 본격화한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는 없다.
‘명확함’으로 더욱 확장될 음악 세계
길 샤함은 데뷔 초부터 한국 팬들과 음반으로 친숙했다. 1993년 기타리스트 외란 쇨셔와 함께한 ‘파가니니 포 투’가 드라마 ‘모래시계’에 쓰이면서 그의 앨범은 국내에서 단골 베스트셀러가 됐다. 바버와 코른골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집(DG, 1994)이 작곡가와 곡목의 인지도가 낮음에도 그 혜택을 입었고, 1996년 6월 첫 내한 공연도 성사됐다.
라이벌 막심 벤게로프보다 한 달 앞서 한국 팬과 만난 길 샤함의 국내 첫 무대에서 연주가 시작되고 음반으로만 듣던 샤함의 음색을 그의 미소와 함께 즐기던 순간, 바이올린 현 하나가 툭 끊겼다. 내한 독주 도중 악기 줄이 나가는 해프닝은 그보다 두 해 전, 아르헤리치-크레머 듀오 공연에서 피아노 줄이 끊기면서 생긴 적이 있다. 아르헤리치가 싸늘하게 무대 밖으로 나간 것과는 달리 샤함은 멋쩍은 미소와 함께 무대에 돌아와 그가 입은 비즈니스 룩처럼 성실하고 유능한 연주로 팬들을 매료시켰다.
2000년대 초반까지 클라우디오 아바도, 앙드레 프레빈과 공연 및 음반 프로젝트를 함께하면서 길 샤함은 표면적으로 순항하는 듯했다. 레퍼토리 결정에서 상업성을 강조하는 음악계 분위기에 갑갑함을 느낀 것도 그 즈음이다. 지금은 보편화됐지만 2004년 1인 레이블, 카나리 클래식스(Canary Classics)를 만든 건 업계에서 선구적인 일이었다. “포레 소나타와 실내악을 만들고 싶다”는 의사를 DG가 거절하면서 샤함은 카나리를 음반 활동의 구심점에 놓았다. 카나리 앨범들은 수익에서도 흑자를 기록했고, 메이저에서 마이너나 1인 레이블로 옮기는 것이 더 이상 음악적 퇴행이 아님을 샤함은 몸소 보여줬다.
길 샤함은 한때 연간 100여 회를 웃돌던 연주 횟수도 가정을 위해 최근에는 50여 회로 줄였다. 베를린 필 협연을 취소하고, 셋째아이의 출산을 보려고 맨해튼으로 향한 건 유명한 일화다. 샤함의 독주회 반주자는 에구치와 자신의 여동생 오를리가 주로 맡았는데, 내년 상반기까지 한동안 예정된 독주회는 없다. 에구치는 솔로 활동의 확대를 꾀하고 오를리는 남편인 지휘자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감독으로 부임한 시드니에 머무는 일수가 늘었다. 어린 시절 샤함은 오를리와 의도적으로 협주를 피했는데 마치 “팝듀오 도니와 마리 오스몬드(Donny and Marie Osmond) 남매가 연상된다”는 게 이유였다. 성공한 바이올리니스트가 학창 시절이 지난 시기에 새 반주자를 찾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샤함은 바흐와 파가니니 무반주곡에 한동안 침잠했지만, 건반주자에서 새로운 지음을 찾아야 중년 이후 음악 여정도 수월해질 것으로 보인다.
2010년대 중반부터 샤함은 10년 넘게 준비한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연구를 본격화했다. 먼저 뉴욕에서 잘 알아온 악기 수선업체에서 활과 털을 정련했다. 거트현에 바로크 브리지를 채우고 바로크 활로 시작한 프로젝트지만 예전에 그랬듯, 비브라토의 과감한 사용이 돋보인다. 투르트(tourte) 활이 현과 만날 때 느껴지는 자연스런 마찰감이나 자동적인 아티큘레이션과는 달리, 가벼운 활과 거트현의 미끄러지는 마찰을 도구로 샤함은 자신이 익숙해하던 스트로크를 이뤄냈다. 소릿결은 달라졌지만 전체적인 톤은 길 샤함의 스타일 그대로였다. 유대계 바이올린의 적자가 또 다른 바로크의 절충주의를 선보인 것이다. 바흐를 대할 때도 업 템포에 비르투오시티를 극대화하는 건, 10대 시절 임대받아 30년 가까이 함께한 1699년산 폴리냐크 공작(Countess Polignac)의 특성을 십분 고려한 선택이다. 악기의 특성을 고려하면 앞으로 비발디와 바로크 레퍼토리에서 그의 보폭은 ‘명확성’을 코드로 더욱 넓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번 ‘사계’는 길 샤함식 바로크의 미래를 가늠하는 리트머스가 될 것이다.
사진 세종솔로이스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