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금호아트홀
몇 년에 한 번씩만 그 짜릿함을 맛보는 스포츠 경기는 우리나라가 높은 성적으로 해피엔딩을 장식하는 양궁과 사격이다. 이른바 ‘국위선양’이라는 다소 예스런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이 경기들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더욱 집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리우 올림픽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음 졸이는 경기가 진행될 때마다, 나는 선수들이 이렇게 작은 과녁에 자신의 ‘감각’을 정확히 맞춰내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루라도 자신의 감각을 관리하는 일에 소홀하면 과녁의 실체와 내 느낌이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정확한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청중이 있는 연주회장에서 음악을 만들어 듣는 이들에게 전달하는 연주자의 감각도 이와 같이 늘 관리와 훈련 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연주의 첫 번째 목표가 청중이 원하는 대로 음악을 만드는 것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의도가 왜곡되지 않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 연주자는 이미 궤도에 들어선 인물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예술적 동기와 그 아이디어의 전달 능력, 피아니스트 안종도의 국내 첫 독주 무대는 그런 측면에서 매우 높은 적중률을 자랑했다. 오리지낼러티가 강한 그의 과녁은 원형이 아닌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범상치 않은 프로그램, 누구의 영향도 배제된 독자적 접근 방식은 그의 음악을 처음 듣는 이들에게 인상적인 순간들을 제공했다.
1724년 출판된 장 필리프 라모의 모음곡 D장조는 ‘기술적 손가락 훈련을 위한’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작품집에 속한 곡으로, 시대적 순서를 배려했다 하더라도 첫 곡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선택이라고 하겠다. 전체적인 기조는 묵직한 화려함을 통해 오케스트라 음향처럼 다양한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톤으로 설정했는데, 거기에 극단적인 스타카토와 논 레가토, 왼손의 분방한 움직임 등이 짤막한 열두 곡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스카를라티풍 유희성은 다소 진지하게 바뀌었으며, 동시에 매우 현대적인 서정성을 연출하여 세련미를 첨가했는데 예상치 못한 아고긱에서 놀라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스케일의 거친 흐름과 불규칙한 도약 등을 비르투오소적 효과보다는 작품 자체가 지닌 굴곡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전달력도 훌륭했다.
피에르 불레즈의 초기작 ‘노타시옹’(1945) 역시 안종도는 작품이 지닌 생경한 음악어법, 즉 타악기적 효과와 전음렬주의에서 등장하는 도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요소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해석을 들려주었다. 연주자는 건반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말마적 비명, 클러스터와 극단적 도약으로 나타나는 다이내믹의 대비 등을 명확한 선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평소 늘 다루는 음악어법을 풀어내듯 연주에서 능숙하고 친밀한 감정이 배어 나오는 모습에 호감이 갔다.
후반부에 연주한 슈만의 ‘다비드 동맹 무곡집’(1837)은 청년의 연정이 가장 솔직히 나타난 초기의 대표작이다. 안종도의 해석은 ‘담백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작곡가의 분열된 자아인 오이제비우스와 플로레스탄의 솔직한 감성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다만 그 두 가지 특성만을 지나치게 나타내어 작품이 지닌 점층적 구조와 진행될수록 깊어지는 정감의 표출이 다소 산만하게 느껴진 점은 아쉽다. 연주자의 개성이나 기교를 강조하지 않으려는 의도는 악곡 간의 대비는 물론이고 파우제(쉼) 사이의 교묘한 연출에서도 나타났는데, 작품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12·13곡(플로레스탄)과 14곡(오이제비우스) 사이의 연결 고리에서 독자적으로 파악한 슈만의 기질이 느껴졌다. 학구적인 면모를 강조하지 않고도 작품의 이해도와 애정, 젊은 연주자의 의욕이 느껴지게 만든 독특한 무대였다.
사진 금호아트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