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마린스키 극동 페스티벌

음악이 있는 항구는 뜨거웠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9월 1일 12:00 오전

러시아와 한국·중국·일본을 잇는 예술의 시작점에 블라디보스토크가 있었다. 이번 축제는 이를 위한 신호탄과 같았다

러시아와 한국·중국·일본을 잇는 예술의 시작점에 블라디보스토크가 있었다. 이번 축제는 이를 위한 신호탄과 같았다


▲ 극장 광장에서 바라본 루스키 다리 전경

8월 4일. 피서객으로 붐비는 인천공항을 뒤로하고 도착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만큼 더웠다. 비행기로 2시간 30분 만에 눈앞에는 ‘한국과 가장 가깝다는 유럽’의 풍경이 펼쳐졌다.

7월 30일부터 8월 10일까지 제1회 마린스키 극동(Far East) 페스티벌이 열리는 마린스키극장 연해주 무대. 홍보 담당자는 현대식으로 지은 극장 구석구석으로 안내했다. 투명한 통유리로 인해 채광 그대로를 끌어안아 반짝이는 로비. 곳곳에는 이번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피아니스트 조성진, 소프라노 임선혜 등의 사진을 담은 배너가 설치돼 있었다. 벽에는 올해 탄생 125주년을 맞은 프로코피예프의 사진과 그의 오페라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예술감독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모습이 담긴 안내장을 집어 드니 홍보 담당자가 한국어로 된 안내장을 내민다. 타국에서 한글과 마주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 옆에는 일본어·중국어·영어로 된 안내장도 보였다.


▲ 탄생 125주년을 맞은 프로코피예프와 작품 사진들이 전시된 극장


▲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스타들’ 공연 중 ‘카르멘 모음곡’

마린스키 발레와 마주하다

4일 저녁에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스타들’ 공연이 있었다. 25개 공연의 출연진과 장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안내장에서 ‘김기민’의 이름이 보였다. 그는 작년에 마린스키 발레의 수석무용수로 승격했다. 8일 발레 갈라 공연과 9일 ‘백조의 호수’에서도 그의 이름이 보였지만, 홍보 담당자는 부상으로 인해 불참한다고 했다.

2013년에 개관한 극장 내의 대극장은 오페라·발레·콘서트를 소화하는 종합극장이었다. 국내 고양아람누리와 실내 분위기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알베르토 알론소가 안무하여 1967년 초연한 ‘카르멘 모음곡’은 붉은색 조명과 마린스키 발레의 수석무용수 예카테리나 콘다우로바의 연기가 돋보인 시간이었다. 모던발레로 2인무의 ‘노인과 나’는 싱어송라이터 제이제이 케일과 스트라빈스키·모차르트의 음악을 바탕으로 만남·사랑·이별의 스토리를 갖춘 작품. 수석무용수 다이애나 비시네바는 마린스키 발레의 간판스타다웠다. 긴 원피스로 전신을 가렸지만,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몸짓과 움직임의 표정은 섬세했다. 발란신이 1947년 발표한 ‘교향곡 C장조’는 비제가 작곡한 교향곡 1번의 흥겨운 곡조를 바탕으로, 중허리에 접어든 페스티벌을 자축하듯 흥겨운 군무진의 향연을 펼쳤다.

약 30분의 인터미션 동안 관객들은 로비를 물들이는 황혼을 배경을 스마트폰에 담았다. 스낵 부스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연어 샌드위치는 이 도시가 해산물로 유명한 곳임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5일 낮에는 ‘노인과 나’에 출연한 다이애나 비시네바의 토크 콘서트가 소극장에서 있었다. 그녀에 관한 짧은 다큐멘터리가 상영됐고, 발레를 공부하는 듯한 어린이들의 질문부터 그녀가 가장 좋아한다는 ‘볼레로’에 이르기까지, 관객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정민이 지휘한 ‘나비부인’

동양의 판타지를 녹인 ‘나비 부인’

“무대는 환상적이었고, 음악은 파워풀했다.” 5일 밤 11시, 숙소가 있는 루스키 섬의 극동 대학교로 향하는 차 안. 동승한 이리나 카첸코 감독은 방금 전 막을 내린 푸치니 ‘나비부인’의 감동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와 루스키 섬을 잇는 루스키 다리에서 내다본 바다 야경도 그 감격을 유지해주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나비부인’은 붉은, 아니 새빨간 오페라였다. 그것은 제 스스로 운명을 칼로 찌른 초초상의 피를 암시했다. 마린스키 극장 프로덕션의 ‘나비부인’은 연해주 무대에서 초연으로 먼저 선보였다. 연출은 폴란드 출신의 마리우슈 트렐린스키. 손맛과 색감이 살아 있는 무대였다. 일본의 기모노, 전통인형, 목조건축, 불상 등의 전통적인 시그너처들이 대거 등장했고, 20여 명의 합창단은 마치 일본 목각인형처럼 움직였다. 현대식 복장을 한 핑커톤만 아니었다면 이 프로덕션은 일본의 중세를 배경으로 한 듯했다.

트렐린스키가 내세우고 싶어 하는 주제는 명확했다. ‘이국 남자의 사랑 앞에··· 초초상, 이건 운명(命)이며, 거역하면 죽음(死)이다!’라는 것. 무대에는 신상(神像)이 자주 등장하여 초초상을 종교심 깊은 여인으로 그렸다. 초초상이 핑커톤을 처음 만나는 1막에는 ‘命’이, 자살을 택하는 3막에는 ‘死’가 무대에 드리워져 그녀의 운명을 예견했다.

소프라노 아나 마리아 마르티네스는 노래는 물론 연출가가 제시한 초초상 역을 완벽히 수행했다. 3막을 관통하는 정민의 지휘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만남, 이별, 배신, 슬픔으로 인해 초초상의 감정이 바뀔 때마다 웅장한 규모의 세트가 등장했는데, 그때마다 피트 속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용솟음치며 스펙터클에 힘을 실었다. 정민의 지휘는 마치 ‘음량도 메시지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포르테와 피아노의 극적 대비를 선명히 가져갔다. 막이 내려오고, 화려한 드레스의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지젤’과 ‘스페이드의 여왕’의 두 남자

6일 공연된 발레 ‘지젤’은 파리 오페라 발레의 해나 오닐의 데뷔 무대였다. 알브레히트 역은 마린스키 발레의 제1솔리스트 잰더 패리시가 맡았다. 패리시는 도약과 착지, 회전과 바트리(공중에서 빠르게 다리 부딪히기) 기교가 탁월했다. 2막에서 정령들이 와이어 줄에 매달려 공중을 날아다니는 등 과감한 연출로 환상적인 무대를 만들었다. 여유롭고도 부드러운 군무의 리듬감, 탁월한 균형과 도약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두 주역, 자로 잰 듯 어여쁜 군무가 ‘오리지널’ 감상의 기쁨을 충분히 제공했다.

알브레히트의 운명이 다시 떠오른 것은 7일 대극장에 오른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을 보면서였다. 한 남자(알브레히트)는 죽은 여인의 정령에 홀려 춤추다 죽고, 한 남자(헤르만)는 도박으로 파멸의 길을 걷는다.

영어·러시아어 자막이 있던 ‘나비부인’과 달리 ‘스페이드의 여왕’에는 자막이 없었다. 푸시킨의 언어보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모국어로 만들어도 자막을 띄우는 한국 창작 오페라의 현실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쨌든 이 작품은 2007년 고양아람누리에 오른 이후, 국내에서 실연으로 좀처럼 만날 수 없었기에 예습을 했는데, 이마저 준비하지 않았다면 큰일 났을 것이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청년 헤르만이 일확천금의 꿈에 휘둘려 카드 도박의 구렁에 빠지며 몰락하는 비극이다.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총제작을 맡은 이 프로덕션은 ‘왜 이 대목은 이렇게 연출하고 해석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고전적이고 원작에 충실한 무대였다.

헤르만 역의 테너 미하일 베쿠아는 마린스키 전속 가수로 작은 체구였지만, 엄청난 성량의 테너임을 매 장마다 입증했다. 극장을 쩌렁쩌렁 울리면서도 오케스트라의 조용한 흐름에도 입을 맞출 줄 아는 지능적 테너였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동안에도 그가 등장할 적마다 관객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과는 좀 다른 관람 분위기였다.

그의 작은 체구는 눈에 거슬렸다. 그런데 헤르만에게 ‘막장’이자, 작품에서도 마지막 장인 도박장(3막)에 그가 서자 오히려 그의 체구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오네긴’에서 창백하고 허약한 시인 오네긴이 총을 든 결투를 신청하는 객기를 부리며 제 스스로 비극을 맞는 것처럼, 미하일의 작은 체구는 작품 속 헤르만이 살아오면서 겪은 무시와 아픔을 도박으로나마 대리 보상받으려는 심리와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 평창대관령음악제 예술감독 정명화와 마린스키 극동 페스티벌 예술감독 게르기예프가 함께 한 MOU 체결식

한국의 국가대표 음악가들

12일 동안 이어진 페스티벌의 폐막 공연이 있던 10일, 평창대관령음악제와 마린스키 극동 페스티벌의 MOU 체결식이 있었다. 평창대관령음악제의 예술감독 정명화는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세계적 수준에 이른 평창대관령음악제와 러시아 음악의 대명사인 마린스키 극장이 협력하여 클래식 음악과 다양한 장르의 협조와 교류를 이어나가는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 이를 계기로 평창대관령음악제는 오페라·발레 등의 레퍼토리를 확장하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극동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로 성장시키겠다는 계획인데, 이러한 노력은 한국과 러시아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문화교류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한국의 음악 문화와 음악가가 세계로 한발 더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이번 페스티벌에 참가한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피아니스트 김다솔·김태형·손열음·조성진, 첼리스트 강승민, 지휘자 정민, 소프라노 임선혜, 발레 무용수 이수빈이 한국의 국가대표처럼 느껴졌다.

8일 밤, 소극장에는 피아니스트 김태형과 김다솔의 리사이틀이 있었다. 두 사람은 이국땅에서 자신의 음악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흐와 리스트를 선보인 김태형은 음악적 ‘넓이’를, 쇼팽 프렐류드 전곡을 선보인 김다솔은 ‘깊이’를 보여주었다. 김태형이 허공을 응시하며 리스트의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04번의 서정적인 선율을 노래할 때, 러시아의 밤은 더욱더 깊어져 갔다. 팔에 문신을 하고 연두색 티셔츠를 입은, 클래식 음악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젊은 남성 관객은 눈을 지그시 감고 아롱진 선율을 하나하나 음미하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 그리고 김태형이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간 사이 어느 여성은 관객석에서 걸어 나와 무대에 조용히 꽃다발을 올려놓고 들어갔다. 김다솔은 편안하고 여유 있는 템포와 밝게 설정한 음색으로 쇼팽 프렐류드 전곡을 노래했다. 베이스 라인의 음영을 깊이 있게 조절한, 편안한 연주였다.


▲ 몽골 출신의 바리톤 아리운바타르 간바타르


▲ 소프라노 임선혜와 반주를 맡은 김태형

2015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로, 몽골 출신 바리톤 아리운바타르 간바타르와 러시아 출신 메조소프라노 율리야 마토치키나, 그리고 소프라노 임선혜가 함께한 ‘세계 오페라의 젊은 스타들’ 공연은 한마디로 콩쿠르 현장을 방불케 했다. 9일 밤의 소극장. 간바타르는 진중한 무게로, 마토치키나는 호소력 있는 소리로 관객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임선혜는 말러의 레퍼토리에 중심을 두었다. 그런데 임선혜 특유의 밝은 컬러와 탄력적인 리듬감이 두 성악가 사이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임선혜가 구아스타비노의 ‘장미와 버드나무’를 노래하고 마지막 구절을 휘파람으로 불자 객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여름밤을 수놓은 그녀의 노래 한 자락이 가을의 시간을 끌어온 듯했다. 그녀가 마지막에 부른 ‘아리랑’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프로코피예프를 협연한 손열음

10일의 폐막 공연에서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프로코피예프 2번을 협연한 손열음은 프로코피예프 탄생 125주년을 기리는 러시아 청중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난곡 중 난곡으로 꼽히는 이 곡을 통해 그녀는 개성을 과감히 드러내고, 한편으로 질서 정연한 호흡으로 마에스트로의 음악 철학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힘, 화음을 위한 타협의 힘, 스릴을 뿜어내는 힘, 이 모든 것에서 완벽을 보여준 그녀는 한마디로 건반의 젊은 여신이었다.

올해 마린스키 극동 페스티벌은 내년에도 개최될 제2회 페스티벌을 기대하게 했다. 4일 처음 도착했을 때 극성을 부리던 더위도 8일 즈음이 되자 수그러들어 러시아 특유의 ‘서늘한 여름’ 속에서 음악을 맛볼 수 있었다. 음악과 음악가, 해안과 해풍이 건네주는 낭만은 충분했다. 다만 아쉬웠던 것 중 하나는 오후 7시 공연을 보다가 도중에 나와 오후 9시에 시작하는 공연장으로 몸을 옮겨야 했던 것이다. 취재 기간 동안 페스티벌 사무국의 다양한 직원이 부지런하고도 꼼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내년에는 이러한 디테일한 부분이 개선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Mariinsky Theatre The Primorsky Stage·송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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