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회 BBC 프롬스

전통을 빛낸 위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0월 1일 12:00 오전


▲ 타일라/버밍엄 심포니

세계 최대 클래식 음악 축제 BBC 프롬스가 지난 9월 10일, 9주간의 일정을 마쳤다. 로열 앨버트홀에서 75회에 걸친 관현악과 팝·재즈·가스펠·댄스·아동 공연이 열렸고, 카도간홀에서 여덟 차례 실내악이 개최됐다. 여느 해처럼 작곡가 생몰과 시대의 격변을 축제의 토픽으로 삼기는 어려웠다.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기 이슈는 여러 단체가 선점했고, 10곡의 첼로 협주곡을 배치한 시도는 지난해 피아노 협주곡 시리즈처럼 단순 나열이었다. 반면 피에르 불레즈와 데이비드 보위를 추모하는 심야 공연은 수준급이었고, 신임 운영감독 데이비드 픽카드의 순발력이 돋보였다.

데이비드 픽카드의 과제는 관객 점유율 90%대를 회복하는 것이다. 예술적으로는 글라인드본 페스티벌 감독 기간(2001~2015)에 축적한 오페라 페스티벌의 운영 기술을 BBC 프롬스에 접목하는 리더십이 기대된다. 로열 오페라와 글라인드본의 기존 프로덕션을 세미 스테이지로 들여오는 방식 외에, 감독 부임 결정 이후 픽카드가 2년 가깝게 준비한 카드는 내년 4월에 발표된다. 2013년 바렌보임과 함께 BBC 프롬스에 왔던 바그너 ‘링’ 사이클의 성악진과 직접적인 비교가 될 것이다.

BBC 프롬스에서만 가능했던 장면들

올해는 음악 외적 요소들이 화제를 모았다. 페스티벌 직전 발생한 프랑스 니스 테러로 개막공연엔 프랑스 국가가 연주되고 무대 배경에는 프랑스 국기가 투사됐다. 폐막 공연에 브렉시트(Brexit) 반대 시위가 예상된다는 소문으로 인해 축제 후반부 소지품 검색이 이뤄졌고, ‘더 라스트 나이트 오브 더 프롬스(The Last Night Of The Proms)’에 만국기를 흔드는 전통과 국가주의 담론이 주요 매체에 실렸다.

마지막 날, 무대에 오른 페루 출신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가 로시니 ‘연대의 딸’ 중 ‘친구들이여, 오늘은 기쁜 날(Ah! Mes amis)’을 부른 것은 이번 축제의 백미였다. 빈과 파리의 초일류 극장에서나 보던 당대 최고 명장면이었다. 파바로티가 없는 세상에서 ‘최고의 하이C 테너’임에 분명한 플로레스는 이제 마흔셋,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잉카 부족장 차림으로 등장해 오라모의 머리를 만지는 위트 역시 BBC 프롬스에서만 가능한 장면이다.

드넓은 로열 앨버트홀의 음장감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건 관현악 편성의 성악곡이다. 안토니오 파파노는 로열 오페라 버전의 ‘보리스 고두노프’를 가져왔고, 최근 런던 심포니(이하 LSO)와 최고 성과를 보이는 지휘자 잔안드레아 노세다는 자신의 친정, 맨체스터 BBC 필하모닉과 베토벤 ‘장엄미사’를 함께 했다. 로열 오페라에 올겨울 데뷔하는 노세다는 LSO 단원과 유대관계가 깊은 파파노와 함께 브렉시트 이후 런던 클래식 음악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데 더욱 많은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2010년대 들어 BBC 프롬스에서 눈부신 활약을 거듭하는 메조소프라노 알리스 쿠트와 소프라노 캐럴린 샘슨의 저력은 올해도 말러 성악곡에서 계속됐다. 소프라노 바버라 허니건은 또 다른 스타, 버밍엄 심포니의 신임 예술감독 미르가 그라치니테 타일라와 함께 한스 아브라함센의 ‘말해줄게(Let Me Tell You)’를 런던 초연했다. 일찌감치 버밍엄 심포니 단원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타일라를 런던 관객이 볼 기회는 프롬스를 통해 더 늘어날 것이다. 피셔/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콜레기움 보칼레 켄트와 모차르트 ‘레퀴엠’을 공연하면서 소프라노 루시 크로의 심각한 컨디션 난조로 고전했다.


▲ 마린 앨솝/계몽시대 오케스트라의 베르디 ‘레퀴엠’

성악 공연의 클라이맥스는 마린 앨솝/계몽시대 오케스트라의 베르디 ‘레퀴엠’이었다. 앨솝은 시대악기 기반의 악단의 미덕을 낭만주의 성악곡과 맞추는 데 집중하기보다, 가수와 합창단의 소리가 공연장에 정확하고 쩌렁쩌렁 울릴 수 있도록 성악진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넉넉한 풍채에서 비롯되는 소프라노 타마라 윌슨의 부글부글 끓는 흉성은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에서 열연한 베르디 ‘운명의 힘’ 레오노라의 연장선이었다.

품격을 더해준 독일 악단들

1941년 독일군은 BBC 프롬스 주공연장 퀸스홀을 폭격했지만, 2016년 프로그래밍에 품격을 더해준 것도 독일 악단들이다. LSO 수석지휘자에서 물러난 게르기예프는 새로운 파트너 뮌헨 필하모닉과 러시아의 무명곡으로 돌아왔다. 바렌보임은 아르헤리치,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와 몸을 푼 후,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와 브루크너 4·6번을 지휘했다. 올해 1월, 일본 데뷔 50주년 기념으로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전일 투어를 했던 조합이었고, 명연은 계속됐다.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라이 스나이더를 대동한 텔레만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이하 SKD)가 공연의 질 측면에선 BBC 프롬스 최고 공연이었다. 결혼 발표 이후 거친 외양으로 변한 트리포노프는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터치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소화했고, 스나이더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은 지휘를 겸한 이후 놀랍게도 음색이 더욱 깊어졌다. 제임스 에네스를 제외하면 지난 시즌 집단 슬럼프에 빠진 듯한 남성 중견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자극제로 삼기 좋은 연주였다.


▲ 틸레만/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필 감독이 좌절됐지만 틸레만이 청중과 SKD를 대하는 자세는 유연하고 부드러워졌다.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하느라 주변을 대하는 까다로움이 공연까지 이어지던 틸레만은 없었다. 첫날 브루크너 교향곡 3번에서, 악장 중간의 박수에 동요하지 말라고 단원들에게 복화술과 함께 미소 짓는 틸레만의 표정은 인자했다. 이튿날 레거의 모차르트 주제에 의한 변주와 푸가에서는 가벼운 비팅으로 단원 개개인의 기량을 천천히 펼치는 메신저 역할에 충실했다. 자아만큼 악단을 중시하는 틸레만의 넓어진 보폭은 어느 악단까지 이어질 것인가.

2017년 가을 LSO 감독으로 오는 사이먼 래틀을 향한 영국민의 애정은 BBC 프롬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린 필의 말러 7번과 브람스 2번은 그들의 실력과 거리가 멀었지만 래틀에 대한 환호는 조건이 없었다. 언젠가 래틀이 ‘더 라스트 나이트 오브 더 프롬스’ 무대에 올라 지휘한다 해도 어색할 게 없다. 경(Sir)의 칭호에,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미스터 빈’과 함께한 유쾌함이라면, 모든 자질이 충분하다. 런던이 예술의 도시로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유럽 클래식 음악 시장의 리더십을 쉽게 내주지 않기 위해, 래틀은 LSO 감독 임무 이상의 존재감을 요구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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