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9일 오스트리아 린츠 브루크너 페스티벌, 20일 이탈리아 메라노 페스티벌 무대에 김대진/수원시향이 올랐다. ‘강행군’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정 속에서 그들도 모르던 ‘힘’을 발견했고, 현지인들도 그 ‘힘’에 매료됐다.
린츠 브루크너 페스티벌의 한국 주간
지난 9월 18일 인천공항을 떠나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 또다시 버스로 이동하여 린츠에 도착했을 때는 현지시각 19일 새벽 2시 30분이었다. 리허설을 11시간 남겨놓은 상태, 일정은 시차나 단원들의 생체리듬보다는 공연 중심이었다.
2008년 김대진이 예술감독 및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후 수원시향의 행보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2010년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를 시작으로 차이콥스키(2013)와 시벨리우스(2015) 전곡 공연과 음반은 ‘한 우물 파기’에 속한다. 또 다른 행보는 ‘대항로 개척’이다. 2009년 뉴욕 카네기홀을 시작으로 2014년 2월 삼성전자가 후원한 빈·부다페스트·프라하·뮌헨으로 이어진 유럽 투어와 이탈리아 메라노 페스티벌의 폐막 공연, 올해 6월 독일 헤렌킴제 페스티벌 참가 등 해외 투어가 여기에 속한다. 그간 수원시향은 깊이를 파고드는 치열함과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천리안을 탑재해가고 있다.
린츠는 오스트리아의 유서 깊은 공업도시이자, 1824년에 태어난 브루크너가 44세에 빈으로 가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1974년 브루크너하우스가 지어진 뒤, 린츠에선 브루크너가 태어난 9월 4일부터 사망한 10월 11일 사이에 매년 브루크너 페스티벌을 개최해왔는데, 올해는 9월 18일부터 10월 29일까지 진행되었다.
1540석의 대극장과 392석의 소극장을 갖춘 브루크너하우스는 도나우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그 옆 렌토스 현대미술관(Lentos Kunstmuseum Linz)의 도회적인 외관과 강 건너 세계적 미디어아트 센터인 예술전자공학센터(Ars Electronica Center)가 이 도시가 ‘기술’과 ‘공업’의 요충지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했다.
브루크너 페스티벌은 2014년부터 특정 국가를 선정해 음악가들을 집중 소개하는 주빈국 프로그램을 신설했는데, 올해는 한국을 선정해 우리나라 6개 단체 및 음악가들이 초청됐다. 9월 18일 페스티벌 개막식이자 주빈국 행사의 첫 막을 요엘 레비/KBS교향악단(협연 손열음)이 열었고, 19일 김대진/수원시향(협연 김화라)이 그 열기를 이어나갔다. 수원시향이 그들의 ‘선택권’에 놓이기까지, 해외 방문 때마다 김대진의 적극적인 홍보와 그간 전곡 연주로 빚은 음반들이 보증수표 노릇을 단단히 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현지 시각으로 9월 19일 오후 3시, 린츠는 비를 머금은 채 빗방울이 도나우 강의 수면에 가벼운 스타카토를 찍고 있었다. 리허설이 시작됐다. 보면대에 최성환의 ‘아리랑’과 김화라(파비올라 김)가 협연할 바버의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악보가 놓여 있었다.
린츠의 밤을 적신, 따스함과 뜨거움
“정 선생님! 소리 어때요?”
“스트링이 조금 큽니다.”
“자! 여러분. 방금 전 그 부분 살짝 줄여서 다시 한 번 가볼게요.”
리허설 중 포디엄의 김대진은 객석에 앉은 정주영 부지휘자와 소통하며 수원시향만의 소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운동선수가 원정 경기를 위해 전지훈련을 떠난다면, 클래식 음악가의 전지훈련은 전날 혹은 당일의 리허설뿐이다. 그래서 이 시간만큼은 치열하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김대진은 음향의 무늬와 결이 살아 있는 브루크너하우스 대공연장의 환경을 십분 이용해 저녁 공연의 청사진을 그려나갔다. 현지에 도착해 잠깐의 휴식 후 리허설에 돌입해야 한다는 단원들의 부담이 긍정적인 긴장으로 작용했는지, 소리의 조각들은 빠른 속도로 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도나우 강의 유람선이 화려한 불빛으로 수변을 채색했다. 대극장 로비에는 주빈국 행사에 참가한 통영국제음악제 측이 작곡가 윤이상과 화백 전혁림, 시인 김춘수를 소개하는 전시회를 열고 있었고, 한쪽에는 영어·독일어로 적힌 수원시향의 홍보책자와 음반이 놓여 있었다.
오후 7시 30분, ‘아리랑’ 선율이 막을 열었다. 북한 작곡가 최성환의 곡이다. 초반에 플루트 주자가 리코더로 조선의 아침을 여는 듯한 신비로운 안개를 몰아 왔고, 반복과 변주를 통해 절정에 오른 아리랑 선율을 연주하는 현악군의 결은 비단 한복을 입은 듯했다. 앞에 자리한 두 여성 관객은 음악의 흐름이 바뀔 때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선율의 아름다움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지난해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선보이며 ‘핏줄’만큼이나 진한 ‘오선줄’을 보여준 김대진·김화라 부녀는 이번 무대에서 바버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선보였다. 부드러운 진행의 1악장과 2악장에서 화음의 물을 대는 수원시향의 온도는 따뜻했고, 김화라는 여유로운 연주를 들려주었다. 3악장은 돌변 그 자체였다. 물이 끓어올랐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김화라는 표적을 향해 직사하는 연발 소총처럼 놀라운 속도의 보잉으로 달려 나갔다. 김대진은 1·2악장의 따스함과 3악장의 뜨거움을 대비시켜 협연자가 양날의 검을 갖췄음을 증명했다. 옆에 앉은 깐깐한 인상의, 어쩌면 브루크너를 빼다 박은 듯한 노인과 중간 휴식 시간에 눈이 마주쳤다. 그의 손에는 김화라가 표지를 장식한 책이 들려 있었다. 브루크너하우스가 발행하는 격월간지였다.
“파비올라 김도 한국인입니까?”
“그렇습니다. 지휘자와 부녀 사이입니다.”
김대진(Daejin Kim)의 이름을 느릿느릿하게 읽어나가던 노인이 말했다.
“훌륭한 딸을 두었군요!”
인터미션 후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이 시작됐다. 김대진의 붓은 푸근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회화를 그려낸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목관의 독주를 끄집어낼 때는 세금을 걷는 혹리수(酷吏手)의 손길처럼 엄밀하고 깐깐했다. 무엇보다 단원들의 협력이 빛을 발했다. 2악장(‘무도회’)과 3악장(‘들 풍경’)의 제1바이올린 주선율에서 악장 김동현·한경진이 이끄는 제1바이올린은 한 대의 악기처럼 소리를 모았고, 3악장 클라리넷(수석 최성심)과 타악 주자(김진우·박라영·김성훈)들의 집중력이 돋보였다. 특히 바버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의 도입부를 오보에로,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3악장의 초입을 잉글리시 호른으로 장식한 부수석 강다해는 ‘우아한 담대함’의 소유자였다. 1992년부터 수원시향 단원으로서 역사를 목격해온 악장 김동현은 “유명한 솔리스트만이 설 수 있는 해외 콘서트홀에서 악단이 연주하며 쌓은 값진 경험이 단원 한 명 한 명에게 큰 힘이 된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린츠의 관객들이 보낸 박수에는 이 도시만의 여유와 멋이 묻어 있었다. 여기에 화답하듯 수원시향은 앙코르로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춤곡’과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피치카토 폴카’를 선보이며 린츠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다시 찾은 메라노, 수원시향의 저력
이튿날인 9월 20일 오전 9시. 이탈리아 메라노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린츠에서 메라노까지 이동하는 약 5시간 동안, 단원들은 린츠 공연 이후의 여독을 풀고, 당일 저녁에 있을 공연을 위해 체력까지 가다듬어야 했다.
쉴 새 없이 달리던 버스가 국경에 달한 때는 오후 2시 30분. 맑은 하늘과 초록 산천이 이탈리아에 왔음을 알려주는 듯했다. 이윽고 옆 좌석의 김동현 악장이 말을 건넨다.
“메라노 가보셨나요? 작은 휴양도시예요. 작년에 단원들이 다시 한 번 와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데, 올해 희망이 이뤄진 거죠. 앞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기억될 것 같아요.”
두 발을 딛고 살핀 메라노는 과연 자연만이 선사할 수 있는 드넓은 아름다움을 품고 여유가 흐르는, 문화적 기운이 맴도는 도시였다. 1986년부터 음악 페스티벌을 열고 있는 메라노와의 인연에도 김대진의 적극적인 노력이 묻어 있었다. 해외 일정 때마다 수원시향 음반을 현지 관계자들에게 전했고, 그 결과 공식 초청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김대진은 “CD 한 장으로 이뤄낸 성과”라고 했지만, 수장의 적극성이 악단의 발전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어느 페스티벌이나 참가하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축제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인 법. 8월 23일부터 9월 22일까지 열린 이번 페스티벌에 리카르도 샤이/라 스칼라 필하모닉, 이르지 벨로흘라베크/체코 필, 잔안드레아 노세다/런던 심포니, 크리스티안 예르비/라이프치히 방송교향악단 등이 참가했다. 이 대열에 합류한 김대진/수원시향은 린츠 공연과 동일한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20일 오후 4시 30분, 리허설이 시작됐다. 지난 2014년에 이어 다시 포디엄에 오른 김대진, 홀의 울림을 기억하는 단원들은 변죽이 잘 맞았다. 하지만 메라노 페스티벌의 공연장은 콘서트 전용홀이 아닌 다른 행사를 겸하는 다목적홀인지라 울림이 적었다. 하지만 “수원시향의 연습실은 울림이 거의 없습니다. 풍성한 소리를 내기 위해 활을 길게 쓰는 연습을 부단히 합니다”라는 악장 한경진의 말대로 그간 축적된 노하우를 십분 활용해 악단 자체에서 풍성한 사운드를 길어 올리고 있었다.
오후 8시 30분, 막이 올랐다. 눈을 감고 들어도 악기들의 위치가 하나하나 파악될 정도로 솔직한 소리를 전달하는 메라노 페스티벌의 무대는, 부드러움을 안고 흐르던 브루크너하우스와는 달랐다. 이곳에서 바버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20세기 음악 특유의 불협화음의 성격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전날의 공연에 이어 탄력을 받은 김화라는 거침없었다.
“같은 레퍼토리를 같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할 수 있는 건 연주자로서 행운입니다. 수원시향과는 아홉 살 때 협연 이후 처음 만났어요. 홀마다 음향 조건이 달라지면 템포도 음색도 달라지는데, 그런 면에서 수원시향은 홀은 물론 협연자에 대한 배려와 적응력이 좋은, 참으로 ‘센스’ 있는 오케스트라입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도 어제와 전혀 다른 옷을 입었다. 솔직한 음향을 드러내는 홀에서 김대진은 장식음 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다. 공연 후 로비에서 마주친 백발의 노인은 독일에서 왔는데, 이탈리아에서 한국의 오케스트라를 만났다는 사실과 예상을 뒤엎는 연주력에 감탄하며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2악장의 경쾌한 부분을 들을 때 홀 천장에 그려진 천사들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지난 며칠 간 국경을 넘나든 여정을 마친 김대진은 “2년 전 유럽 투어에 비하면 수원시향은 연주력, 체력, 적응력 등 모든 면에서 지휘자도 놀랄 만큼 달라졌다”면서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 오케스트라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 오케스트라는 수원시향뿐 아니라, 이른바 ‘K리그’에 준하는 한국 오케스트라 전체를 의미했다.
오케스트라의 해외 투어는 기존에 세워진 집을 분해하고 포장해,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다시 조립해 펼쳐 보이는 여정과도 같다. 매번 이동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은 과거의 첫 행로를 떠올려보고, 낡았거나 마모된 부분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지휘자의 적극성과 추진력, 단원들의 체력과 인내, 협동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정도로 힘겨운 일정 속에서 수원시향은 새로운 연료를 채우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0월 13일, 김대진/수원시향은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을 시작으로 ‘그레이트 말러시리즈’를 시작한다. 교향곡 1번은 조용한 A음(라)으로 시작하지 않던가. ‘A’는 알파벳 첫 글자이자 근원·기원·뿌리·대지를 상징한다. 한국으로 향하는 그들의 마음은 이미 말러 교향곡 1번의 리허설 중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