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산맥의 레만 호를 끼고 있는 몽트뢰·브베와 이곳에서부터 해발 1000미터가량 위쪽에 자리한 그슈타트는 각각 스위스를 대표하는 클래식 음악 페스티벌을 오랫동안 개최해왔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지휘자 에르네스트 앙세르메가 나치를 피해 스위스에 모인 음악인들과 함께 시작한 몽트뢰브베 페스티벌과, 평화로운 그슈타트 전원에 반한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이 60년 전 발족한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이 그 주인공이다. ‘가족’이란 테마로 각별한 생일잔치를 치른 두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샤를 뒤투아의 관록이 빛난
몽트뢰브베 페스티벌
8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 열흘간 펼쳐진 몽트뢰브베 페스티벌(Festival de Musique Classique Montreux-Vevey). 70주년을 기념해 페스티벌의 역사를 돌아보는 전시를 가졌다. 지휘자 샤를 뮌슈, 피아니스트 로베르 카자드쥐·빌헬름 켐프 등 이곳을 스쳐간 전설적 음악가들의 사진과 포스터는 감동을 자아냈다. 흑발의 젊은 마르타 아르헤리치도 눈에 띄었다.
8월 26일, 백발이 된 아르헤리치는 샤를 뒤투아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무대에 섰다. 기교는 예년보다 덜했지만, 옥타브 패시지나 포르테 표현은 여전히 대단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슈만의 느낌이 놀라웠는데, 그녀의 무기는 그간의 경력과 무르익은 음악성으로 무장한 즉흥적인 해석이었다. 여기에 대해 그녀는 “새로운 느낌으로 한번 쳐봤다”며 소박하게 말했다. 청중의 환호 아래 흥에 취한 뒤투아는 아르헤리치의 뺨에 키스하려 했으나, 그녀가 거절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바람에 결국 뒤투아가 머릿결 너머로만 감사를 표하는 재미난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혼한 두 사람이지만 서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느껴졌다. 9월 4일 열린 아르헤리치 헌정 연주회에서는 두 사람의 딸인 아니 뒤투아가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의 내레이터로 등장해 한층 더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8월 27일 레오니다스 카바코스가 연주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는 압권이었다. 특히 브람스 협주곡 1악장 카덴차에서의 긴장감이 대단했는데, 마치 줄 위의 곡예사처럼 아찔한 ‘밀당’을 이어나갔다. 카바코스는 노래하는 듯한 긴 레가토로 마지막 상승 스케일을 한 음씩 밀어붙였다. 그 어떤 음정 불안도 없는 완벽한 패시지였다. 이에 현지 언론과 청중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진 ‘페투루슈카’에서는 동적인 리듬이 가득한 가운데 색채감을 지닌 목관 선율이 마술처럼 관객석으로 넘쳐흘렀다. 마치 오케스트라 가운데 앉아 있는 듯한 체험이었다. 스트라빈스키만의 동화적 분위기를 완성한 이 생생한 음향은 비단 연주홀의 어쿠스틱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를 진두지휘한 뒤투아의 관록이었다. 이번 페스티벌에서 그는 전날의 ‘불새’에 이어 28일 ‘봄의 제전’으로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3부작을 완주했다.
해피 버스데이, 예후디 메뉴인!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
예후디 메뉴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음악과 가족’이란 주제로 펼쳐진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Gstaad Menuhin Festival). 7월 14일부터 9월 3일까지 약 한 달 반의 장정 가운데 8월 24~28일 연주에 다녀왔다.
8월 24일 자넨 교회에서의 연주는 ‘제레미 메뉴인과 친구들’이란 타이틀로, 예후디 메뉴인의 아들인 피아니스트 제레미 메뉴인·무키 리 메뉴인 부부와 클라리네티스트 찰스 니디치, 바이올리니스트 헤닝 크라예루드, 첼리스트 요하네스 모저가 참여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3중주는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제레미 메뉴인의 피아니즘은 산들바람 같은 피아니시시모에서 우레와 같은 포르테까지 뛰어난 원근법으로 서정적인 낭만을 빚었다.
하이라이트는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중 2악장과 루토스와프스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브람스 현악 6중주 중 2악장을 연주한 메뉴인 부부의 듀오였다. 세 곡 모두 제레미 메뉴인이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한 작품이다. 그는 이를 두고 ‘편곡(arrangement)’ 대신 ‘변형(transformation)’이란 표현을 썼다. 새롭게 작곡한 푸가를 삽입한 브람스 현악 6중주는 신선하면서도 본연의 분위기를 잘 살렸다(참고로 원곡은 예후디 메뉴인의 음반(EMI Classics)을 명연으로 꼽는다). 루토스와프스키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무조적으로 다듬어 조금 생소했지만, 뛰어난 기교와 다이내믹 넘치는 그들의 듀오에 청중은 엄청난 박수를 보냈다. 이튿날 저녁 자넨 교회. 카운터테너 필리프 자루스키가 17세기 후반의 베네치아 오페라 아리아를 열연한 ‘이탈리아 바로크 갈라’는 또 하나의 묘미였다. 반주는 바로크 앙상블 아르타세르세가 맡았다. 각 아리아 사이에 당대의 기악 음악들을 삽입한 기획 덕에 자루스키와 앙상블은 1시간 반가량의 레퍼토리를 번갈아 소화하며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를 만들어냈다. 또한 자루스키는 기악 연주 중엔 목을 쉴 수도, 곡을 마치고는 청중의 박수 때문에 분위기가 깨지는 사례를 피할 수도 있었다. 영리한 발상이었다.
그는 유려한 고음 테크닉과 환상적인 엘레지로 프레이즈를 이어나갔다. 카발리의 오페라 ‘오르민도’ 중 ‘도시, 도시’는 연극성과 경쾌한 바로크적 위트가 어우러진 클라이맥스였다. “도시뿐이다. 의상뿐이다. 사람들뿐이다!”란 가사에 이르러선 코믹한 마임을 해가며 흥취를 돋웠다. 하나의 스타일을 한정하기 어려운, 변화무쌍한 자루스키의 매력으로 가득한 저녁이었다.
8월 26일은 랑랑의 날이었다. 그는 오후엔 마스터클래스로, 저녁엔 독주회로 종횡무진했다. 마스터클래스에서 랑랑은 스타 의식보다는 친절한 교육자로서 면모를 드러냈다. 장황한 이론 설명이 아닌,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요점을 지적하거나 직접 연주해 보이는 등 효과적으로 마스터클래스를 이끌었다. 특히 그는 쇼팽의 스케르초 1번을 연주한 12세 신동 니콜라스 잘로움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8월 28일, 페스티벌 측은 기자회견을 통해 차기 뉴욕 필 상임지휘자로 임명된 야프 판 즈베던이 네메 예르비에 이어 그슈타트 지휘 아카데미를 맡는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그는 지휘 아카데미를 근간으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도 몇 작품을 지휘할 것으로 밝혔다.
같은 날 저녁엔 페스티벌 텐트에서 오페라 갈라 콘서트가 있었다. 베이스바리톤 브린 테펠과 함께 갈라를 이끌 예정이던 소프라노 아냐 하르테로스가 돌연 펑크를 냈다. 논란은 짧았다. 대신 안젤라 게오르규가 출연했기 때문이다. 게오르규는 특유의 강렬한 비브라토를 데스데모나(베르디 ‘오텔로’)의 고통, 토스카(푸치니 ‘토스카’)의 복수심으로 승화시켰다. 드라마틱한 연기력과 전율로 가득한 목소리가 돋보인 무대였다.
페스티벌 감독 제레미 메뉴인과의 인터뷰
예후디 메뉴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아들 내외인 피아니스트 제레미 메뉴인·무키 리 메뉴인(이하 제레미·무키)과의 인터뷰를 통해 메뉴인 가족의 삶을 돌아본다. 무키(본명 이은주)는 한국인 피아니스트이며, 두 사람은 그녀의 스승인 존 담가르드를 통해 만나게 됐다. 2007년 결혼한 그들은 슬하에 일곱 살 난 딸을 두고 있다.
음악 부부로서 삶은 하나의 ‘플러스’다. 부부 이전에 음악인으로서 의견을 주고받는 문화는 최근 작곡에 심취한 제레미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8월 24일 선보인 그의 변형 작품 역시 무키의 격려로 완성할 수 있었다. 그는 아내와의 문화적 차이는 단지 부수적일 뿐이라 말한다. 대대로 ‘세계 시민’을 표방해온 가풍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할아버지는 유대인이지만 어머니는 영국인이고, 아버지 가문은 미국 문화에 동화되고자 했습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저를 포함한 삼형제 모두 홈스쿨링을 하며 엄격하게 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를 배웠죠. 그것도 캘리포니아에서 말입니다! 덕분에 문화권에 종속된 사고가 아닌 ‘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죠.”
메뉴인 가문은 러시아계 유대인이지만, 돼지고기를 금하는 것과 같은 민족적 전통을 꼭 실천하려고 하진 않는다. 무키는 이렇듯 다양성을 존중하는 분위기 덕분에 한국의 문화를 더욱 중요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레미가 음악인이 된 것은 단순히 가족적 전통 때문은 아니다. 당대의 거장 예후디 메뉴인의 아들이었던 그에게도 음악을 하기 위한 남모를 고충이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 이턴 칼리지에 다녔는데, 그곳은 음악이 아닌 정치·경제를 중요하게 다루는 곳이었다.
“사실 메뉴인 가문은 아버지 이전까지 단 한 명의 음악가도 배출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세대에도 저 혼자뿐이고요. 당시 피아노를 치고 싶어 했던 저를 이턴 칼리지에 보냈으니, 당연히 취향에 맞지 않았죠.(웃음) 결국 음악을 하기 위해 투쟁해야 했습니다.”
반대로 무키의 집에는 항상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줄리아드 음악원 출신이 두 명이나 있었고, 어린 시절 한국을 떠난 그녀는 영국의 로열 노던 칼리지와 덴마크 왕립음악원에서 공부했다. 이후 한국에는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한 번씩 방문하곤 한다.
제레미·무키 부부는 올해 예후디 메뉴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슈타트와 런던 등지에서 그에게 헌정된 연주회에 참석했다. 제레미에게 예후디 메뉴인은 어떤 존재인지 물었다.
“아버지는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예후디 메뉴인 음악학교 설립을 비롯해 1977년 시작한 라이브 뮤직 나우(학업을 마친 연주자들이 병원 등 음악을 접하기 어려운 장소에서 연주하는 자선 활동), 이곳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과 아카데미 등이 그 예입니다. 아버지는 훌륭한 음악적 선배였어요. 그를 통해 일련의 작품들을 배울 수 있었고, 그러면서 말이 아닌 음악으로 부자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이어나갔죠. 위대한 음악인으로서 아버지와 소통하던 기억이 제겐 가장 소중한 자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