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5·27일
롯데콘서트홀
숫자를 위한 음악, 음악이 아닌 소리
“모차르트는 나의 머리에도, 그리고 가슴에도 있었어. 그게 음악이 주는 아름다움이지.”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는 동료가 일주일이 일 년 같은 독방에서 어떻게 음악을 들었는지 묻자 이렇게 답한다. 음악을 스마트폰으로 듣는 것이 일반화된 요즘, 비싼 돈을 지불하고 콘서트홀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MP3 같은 낮은 수준의 음질을 벗어나 음악으로 머리를, 한 단계 더 나아가 가슴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 대상이 모차르트·베토벤·말러라면 더욱 그렇다.
지난 8월 25일, 1000여 명의 연주자가 무대에 서는 말러의 교향곡 8번 연주를 앞둔 롯데콘서트홀은 인산인해였다. 그동안 예술의전당에서 왜곡된 스피커로 들어야 했던 파이프오르간의 울림을 제대로 접할 수 있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4958개의 파이프를 장착한 리거 오르간의 화려한 자태는 이제 국내에서도 제대로 된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게 되었다는 자부심마저 들게 했다. 여기에 어린이 포함 850명의 합창단과 141명의 오케스트라, 8명의 독창자 등 눈앞에 펼쳐진 ‘천인(千人) 교향곡’을 위한 ‘천인 연주자’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우리 음악계에서 처음으로 말러 전곡 사이클을 완성한 임헌정이 지휘하는 코리안심포니가 이번 공연을 위해 쏟아 부은 시간과 노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익숙지 않는 새 콘서트홀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1부 찬가 ‘오소서, 창조주의 성령이여’의 압도적인 총주가 홀을 휘감아왔다. 이렇듯 거대한 음량을 국내 콘서트홀에서 체험하기는 처음이었을 터, 청중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음의 폭풍은 25분여의 1부 내내 지속되었다. 그런데 말러가 전하고자 한 노림수는 장엄한 음악으로 인간의 영혼을 감동시키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1부에서 받은 느낌은 ‘음악이 아닌 소리’ 같았다. 홀은 1000명이 뿜어내는 소리가 과포화 상태에 도달해 인간의 귀가 감내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설 때도 있었다.
연주와 음악에 대한 평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였다. 괴테 ‘파우스트’의 엄정한 가사는 들려오지 않고 오케스트라와 함께 휩쓸렸다. 독창자들 개개인의 실력은 뛰어났으되 반주에 묻혔다. 악기 간 밸런스와 정위감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모노 음반을 최대한 볼륨을 높여 듣는 것처럼 뭉쳐서 터져 나왔다. 파이프오르간의 페달 저음조차 안타깝게도 도드라지지 않았다. ‘천 명’이라는 숫자에 집착해 정작 말러의 ‘음악’을 잃게 만든 것은 아닐까.
말러 교향곡 8번과 함께 교향곡 2번도 엄청난 작품이다. 지난 5월 5일 빈 무지크페라인에서 주빈 메타가 지휘한 빈 필하모닉은 고작 200명의 합창단으로도 교향곡 2번 5악장 피날레에서 롯데콘서트홀과 같은 리거 파이프오르간이 합세해 웅혼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10년 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홀에서 경험했던 말러도 마찬가지였다.
주최 측은 개관을 앞두고 무언가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국내 어느 공연장에서도 하지못한 시도는 높이 평가할 만 하지만 진정한 음악 애호가들은 규모와 음량이 아니라 말러의 음악에 더 집중한다. 롯데콘서트홀에서 1000명이 연주한 말러를 ‘보았다’가 아니라 음악을 ‘들었다’가 더 중요한 덕목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세계적인 콘서트홀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담금질해야 한다. 빈야드 형태의 홀이라고 반드시 음향이 보장되지 않는다. 약음에서도 잘 들리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 미세함이 얼마나 윤택하고 고급스럽게 나는가는 더욱 중요하다. 지속적인 튜닝과 보완을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진정한 클래식 음악 콘서트 전용홀로 거듭나야 한다. 단지 청중의 귀와 머리를 넘어 가슴을 감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