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
평소 다양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접하게 된 것이 여러 가지로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프로 연주자냐 학생의 연주냐를 떠나 내 흥미를 자극하는 포인트는 언제나 이 피아니스트의 스타일이 이 방향으로 지속성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더 많은 변화를 겪을 것인지를 점치게 되는 부분이다. 물론 이런 변화, 혹은 변신에 대한 내용에 주목하는 것은 나뿐 아니라 그 연주자의 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어쩌면 음악적 방향에 대해 가장 먼저 고민하고 앞서 가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피아니스트 자신이다.
타고난 음악적·기교적 능력과 거기에 수반된 지적 능력 등 한 사람의 음악가가 지닌 ‘힘’을 하나의 ‘자산’으로 보았을 때 연주자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선다. 즉, 유지·보수에 노력할 것인지, 아니면 그 근원적인 성질을 바꾸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에 대한 고심이다. 나름대로 논리를 늘어놓았지만, 이번 마르틴 슈타트펠트 독주회는 이 피아니스트의 ‘자산’이 근본적으로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그것과 또렷이 구분되는 성향을 띤다는 것을 보여준 획기적인 자리였다. 그가 두드린 건반 위의 소리들은 무척 특별했으나 그간 걸어온 행보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며, 애초부터 출발이 달랐기에 지금 같은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면 이날의 연주를 결코 파격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다양한 카논과 푸가, 이를 구성하는 수식과 흥미로운 돌림노래, 독립된 트리오 소나타 등이 등장하는 바흐의 ‘음악의 헌정’은 본디 연주하는 악기가 지정돼 있지 않으며 하프시코드 독주와 관·현악기의 실내악 편성으로 연주되는 것이 통례이기에 간혹 시도되는 피아노 독주가 기대됐다. 이날 슈타트펠트는 첫 번째 악장인 3성 푸가(리체르카레)의 주제(프리드리히 대왕에 의한)에 의한 다채로운 즉흥곡풍 편곡을 약 30분에 걸쳐 들려주었다. 원곡은 사라졌으며 대신 현대의 피아노가 보일 수 있는 기능성과 소리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자유로운 환상곡이 홀을 가득 메웠다. 기본 조성인 C단조가 머금은 어둡고 장중한 분위기가 생생한 가운데 반음계적 요소와 비르투오소적 처리, 투명한 피아니시모에 이어지는 파우제 등이 인상적인 호연이었다. 의아해하는 내게 연주자는 “알다시피 피아니스트 혼자 악보 그대로를 연주하기엔 무리이니까…”라며 비교적 가볍게 언급했는데, 이날의 연주가 아니라 ‘바흐-슈타트펠트’라 부를 수 있는 버전이 존재한다고 하니 그의 ‘음악의 헌정’이 음반 등의 결과물로 등장하기를 기다려본다.
걸작에 대한 경외,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때로는 악보에서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 잘생긴 ‘소신남’ 슈타트펠트의 연주는 후반부 쇼팽 연습곡에서도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즉흥적으로 이어지는 코랄풍 화성 진행이 곡 사이사이를 메웠던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지만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기교적 패시지들에서 손목과 손가락을 쉬게 해주는 슬기로운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연주는 고전과 낭만을 주 레퍼토리로 하는 피아니스트들의 터치와 해석에서 벗어난 신선함이 두드러졌다. 건반을 강하게 누르지 않은 채 유려함을 강조한 경우도 있었으며, 때로는 박자에 어긋날 정도로 심하게 몰아붙여 작품이 지닌 충동적 힘을 여과 없이 나타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화성적 전개에 음악적 원동력이 있는 작품들에서 훌륭했는데, 아르페지오 연습곡인 Op.10-11, ‘에올리언하프’로 불리는 Op.25-1, 일명 ‘겨울바람’과 ‘대양’인 Op.25-11·12 등에서 슈타트펠트는 세심한 페달링과 탁월한 구성 감각, 곡 전체를 아우르는 혜안으로 익숙한 명곡들의 또 다른 음향을 만들어냈다.
시공간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강한 음악적 공감대에 놓여 있는 바흐와 쇼팽, 이 두 사람을 통해 한없이 자유로운 세계를 구현해낸 슈타트펠트의 의도는 어쩌면 건반음악의 명인들을 영감으로 이어주는 자유로운 환상곡풍 즉흥연주가 아니었을까도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