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의 웅장한 하모니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 역사적인 첫 내한 공연을 갖는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 마이클 틸슨 토머스와 구레츠키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로 우리의 마음을 적실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데이비드 진먼, 그리고 자유로운 음악성과 화려한 앙상블이 돋보이는 파리 오케스트라의 대니얼 하딩의 서로 다른 음악세계가 가을 밤, 음악계를 뜨겁게 달굴 것이다.
마이클 틸슨 토머스/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이러한 음악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지휘자 마이클 틸슨 토머스는 말러가 작곡한 45개의 가곡과 10개의 교향곡 악보를 쌓아놓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카메라는 말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체코 이흘라바를 비춘다. “이흘라바는 말러가 살았던 당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군대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 주둔지였습니다. 창문을 열면 온갖 군악대 소리가 들렸고, 아버지가 운영하던 선술집에서는 악단의 가락이 스며들어왔을 겁니다.” 틸슨 토머스는 직접 말러의 집을 찾아가 안내한다. 이흘라바의 자연, 지평선과 골짜기, 종소리, 새소리 그리고 나아가 정적이야말로 말러 음악의 본질임을 강변한다. 그리고 ‘나투를라우트(naturlaut)’, 즉 자연을 대변하는 ‘A내추럴음’으로 시작하는 교향곡 1번을 들려준다.
2007년 미국 PBS 방송국에서 첫 삽을 뜬 ‘키핑 스코어(Keeping Score)’ 시리즈. 틸슨 토머스가 직접 음악 유적지와 현장을 발로 뛰며 취재하여 해설한 이 다큐멘터리는 영상물로도 발매돼 애호가들로부터 번스타인의 음악 교육 프로그램에 필적한다는 반응을 얻었다. 총 8개 실황과 9개 다큐로 구성된 TV 프로그램은 클래식 음악 초보자에게도 아카데믹하고 현장감 있는 자료를 제공하며 인기를 얻었다.
‘키핑 스코어’에서 말러 교향곡 1번을 집중 탐구했던 학구파 지휘자 틸슨 토머스가 같은 레퍼토리를 들고 내한한다. 해설뿐 아니라 연주 또한 최고 수준을 보여주었던 터라 애호가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말러를 접하게 해줄 전망이다. 또한 자신의 수족 같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SFO)가 함께한다. 1995년 SFO의 11대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이래 무려 21년 동안이나 한 호흡을 일구어온 밀월관계가 이제 정점에 이른 느낌이다. SFO는 1906년에 창단돼 올해 110주년을 맞이한 미국 대표 악단 가운데 하나다. 틸슨 토머스는 1974년 말러의 교향곡 9번을 지휘하며 SFO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래저래 SFO와 틸슨 토머스는 말러로 굳게 맺어진 셈이다.
1944년 LA에서 태어난 틸슨 토머스의 아버지는 브로드웨이의 무대감독이었고 어머니는 역사 교사였다. 3대째 예술과 공연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던 집안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그에게도 이어졌고,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천재로 알려졌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피아노와 함께 잉골프 달에게 지휘를 배우고, 바그너의 손녀 프리델린트 바그너를 사사하기도 했다. 바그너가(家)와의 인연으로 젊은 나이에 틸슨 토머스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부지휘자로 활약하며 경력을 쌓았다. 1969년 쿠세비츠키 상을 수상한 뒤 보스턴 심포니 지휘를 시작으로 버팔로 심포니, 뉴욕 필하모닉, LA 필하모닉 등 미국 악단을 차례로 섭렵한 뒤 1988년부터 런던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LA 필하모닉과 말러 공연 시 ‘헬리콥터 소음’ 사건은 아직도 음악계에 오르내리는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그만큼 틸슨 토머스의 말러 사랑은 각별했다.
1987년 플로리다에서 창단한 뉴 월드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틸슨 토머스의 음악 교육 프로그램의 신호탄이었다. 재능 있는 학생들에게 프로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기막힌 프로젝트는 2011년 마이애미비치에 전용 콘서트홀 ‘뉴 월드 센터’를 개관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그는 현재까지도 아카데미의 예술감독으로 봉사하고 있다. 이에 더해 2009년에는 유튜브를 통해 30개국에서 3000명의 지원자가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유튜브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2011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공연은 3300만 명이 유튜브 생중계로 연주를 감상하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런던 심포니 사임 이후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SFO의 수장이 된 틸슨 토머스는 악단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며 LA 필하모닉과 쌍두마차 체제를 확고히 했다. 세계 초연 작품의 수를 늘렸고 ‘키핑 스코어’를 진행하며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특히 말러 전집은 SACD로 발매돼 수많은 말러 명반 대열에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실력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음향 좋기로 소문난 데이비스 심포니홀은 이들의 음악성을 배가하는데 일조했다. 이로 인해 SFO는 무려 15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틸슨 토머스와 SFO를 가늠하는 첫 단추는 역시 말러요, 그중에서도 교향곡 1번이다. 거장의 나이는 이제 72세다. 11월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삶의 연륜이 배인 최상의 연주가 SFO를 통해 펼쳐질 것이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진먼/NHK 심포니 오케스트라
11월 13일에는 또 한 명의 미국 지휘자 데이비드 진먼이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롯데콘서트홀을 찾는다. 진먼 하면 떠오르는 것은 2014년 7월 21일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와의 고별 공연이다. 진먼과 악단이 5000석을 가득 채운 청중 앞에서 펼친 마지막 연주는 그 자체가 드라마다.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이 끝나고 플로리안 발저가 편곡한 민요 ‘만세 부르는 사람들(Evvia i soci)’에서 장난기 가득 찬 노 거장의 지휘는 모든 것을 다 이룬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였다.
1868년 창단해 브람스가 지휘를 맡아 유명해진 톤할레 오케스트라는 20세기 말인 1995년부터 무려 20년에 걸쳐 포디엄을 지킨 진먼으로 인해 명성과 함께 실력 또한 일취월장했다. 1936년생으로 팔순을 넘긴 진먼, 이제 그는 톤할레를 떠났지만 전 세계 일급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며 여전히 왕성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뉴욕에서 태어나 오벌린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미네소타 대학에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공부한 학구파 지휘자는 전설적 거장 피에르 몽퇴를 사사하며 지휘의 모든 것을 익혔다. 네덜란드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시작으로 로테르담 필하모닉, 로체스터 필하모닉, 볼티모어 심포니에서 음악감독으로 있는 동안 숱한 명연을 이끌어냈다. 특히 볼티모어 심포니와의 베토벤 교향곡 사이클은 지금도 애호가들이 찾고 있는 걸출한 해석으로 이름 높다. 무려 100장이 넘는 분량의 음반 녹음 목록을 자랑하는 진먼은 볼티모어 심포니 이후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와도 베토벤 교향곡 전곡 레코딩을 감행해 5개의 그래미상, 에디슨상, 그라모폰 어워즈를 거머쥐는 쾌거를 일구었다.
“슬픔의 강 너머, 빛을 향해 나아가다.”
진먼의 이번 내한 공연의 홍보 문구다. 진먼이 1993년 런던 신포니에타를 지휘한 구레츠키 교향곡 3번은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이 작품은 진먼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레퍼토리인데, 바로 이 ‘슬픔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교향곡을 이 땅에서 진먼과 NHK 교향악단의 실연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숨져간 폴란드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작곡된 교향곡은 소프라노 가수의 절절한 고백이 더해져 슬픔을 넘어선 영혼의 씻김까지 체험할 수 있는 불멸의 걸작이다. ‘이 시대, 상처 입은 모든 이에게 건네는 묵직한 위로의 노래’, 이제 인생의 황혼에 도달한 거장이 빚어내는 늦가을의 치열한 음악 열락에 빠지는 시간만 남았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대니얼 하딩/파리 오케스트라
파리 오케스트라(Orchestre de Paris, OdP)도 11월 16일 예술의전당에서 5년 만에 내한 공연을 갖는다. 1985년 다니엘 바렌보임, 2007년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2011년 파보 예르비의 방한과 마찬가지로 OdP는 이번에도 음악감독과 한국에 온다. 2016년 9월부터 새 음악감독에 부임한 대니얼 하딩이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을 대동하여 멘델스존 협주곡을 협연하고, 드뷔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모음곡, 베를리오즈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을 통솔한다.
1975년 영국 옥스퍼드 태생인 하딩이 프랑스 대표 오케스트라의 수장이 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런던 심포니(LSO) 수석 객원 지휘자인 하딩의 OdP 음악감독 부임은 2015년 3월 사이먼 래틀의 LSO 음악감독 확정에 따른 도미노 효과를 넘어, 2010년대 중반, 파리가 ‘파보 예르비식 다이내믹’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일사불란함을 갈망하는 신호로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OdP는 샤를 뮌슈 이외에 모든 음악감독(카라얀-솔티-바렌보임-비치코프-에셴바흐-예르비)을 프랑스 밖에서 영입하면서, 시류에 맞춰 악단의 컬러에 변화를 기했다.
OdP는 예르비와 여러 곳에서 갈등했던 예술감독 디디에 드 코트니를 하딩의 임기 시작 전에 경질했고, 프랑스 뮈지크 프로듀서 출신 고음악 전문가 에두아르 푸레 콜퓌티를 새 예술감독에 임명했다. 아바도와 래틀의 후광에서 벗어나 독자적 영역을 구획하기 위해, 하딩은 스웨덴 방송교향악단 수석 지휘자,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 지휘 이외에 파리에도 새로운 장을 형성했다. 콜퓌티는 하딩 이외의 시즌 플래닝에서 성악과 바로크 코디에 여러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2015년 5월 하딩의 파리행이 발표되자,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지는 “지휘자가 해협을 건넌다”고 썼고, 프랑스 언론은 1997년, 지휘자 스스로 최악의 공연으로 기억하는 OdP 데뷔와 더불어 악단과 별 인연이 없던 인사를 발탁한 배경에 의문을 표했다. 하딩을 임명한 OdP 대표, 브뤼노 아마르의 환영사에 단서가 있다. “명석하고 모험심이 강한 하딩은 새로 건립된 파리 필하모니의 관중을 모으기에 이상적인 인물”이라 했다. 새 부대에 적합한 새 술을 부은 배경은 이름을 보면 알 만한 대중성과 그동안 악단에 결핍된 모험심이었다. 2014년 객원으로 파리에 온 하딩은 악단을 짜냈고, 단원들은 그럴수록 그를 더 원했다.
하딩은 지난 9월 18일 OdP 시즌 오프닝을 슈만의 오라토리오 ‘괴테의 파우스트 장면들’로 시작했다. 자신의 특장인 말러 2·5·10번과 외르크 비드만·해리슨 버트위슬의 작품을 파리에 소개한다. OdP는 2016/2017 시즌 하딩과 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서울과 도쿄, 빈과 프라하를 순회 연주하며 서로 알아갈 예정이다. 소프라노 크리스티아네 카르크와 함께하는 말러 4번은 OdP의 중부 유럽 투어 작품인 동시에 2017년 LSO 아시아 투어 레퍼토리다.
하딩은 오래전부터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에 참가하면서 프랑스 환경에 익숙했고 프랑스어도 유창한 편이며, 두 자식과 함께 예전부터 파리에 거주했다. 2003~2008년까지 음악감독을 역임한 자신의 분신,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떠난 이후 그는 더욱 성숙해졌다. 아바도의 옆에서 익힌 우아한 손의 움직임 말고도, 특별 수업을 통해 벼른 날카로운 바톤 테크닉을 결국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스웨덴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LSO가 달라진 하딩을 먼저 체감했고 이제 OdP의 차례다.
글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