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청중에게 말을 걸다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 내한 공연
10월 26일
롯데콘서트홀
꼬마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면 고전 음악보다 현대음악을 더 좋아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지난해 봄, 바이올리니스트 강혜선은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이 곧 한국에 갈 거라며 그렇게 말했다. 그냥 한번 들어보라는 말도 했다. 현대음악 전문 단체라고 미리 공부할 생각 말고, 베토벤 소나타 듣듯이 그냥 한번 와서 들어보라고.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의 첫 내한 공연은, 차원이 다른 감상의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그동안 현대음악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연주회를 볼 때면 연주자들의 능력보다는 작곡가의 의도에 집중하곤 했다. 작곡 기법을 통해 작곡가가 의도한 효과를 파악하고, 참신한 아이디어와 진부한 생각을 구분 짓고, 그것이 미학적으로 완성된 구조를 이루는지, 새로운 감각을 깨우는지 판단하는 것이 옳은 감상법이라 여겼다.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의 연주는 이러한 과정을 거칠 겨를도 없이 그대로 귀와 가슴에 와 꽂혔다. 자유롭게 흩어졌다 모이는 ‘음’들은 하나의 공간을 이루기도 하고, 주인공을 내세워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기도 하고, 미술 작품 같은 강렬한 이미지를 그리기도 했다.
1923년작인 바레즈의 ‘옥탕드르’를 시작으로, 지휘를 맡은 핀처의 작품 ‘마레흐’(2011), 리게티의 13개 악기를 위한 실내 협주곡(1970), 불레즈의 ‘회상’(1985) ‘파생 1’(1984) 그리고 이 단체가 한국 작곡가 진은숙에게 위촉한 피아노와 타악기, 앙상블을 위한 이중 협주곡(2002)이 차례로 연주되었다. 20세기와 21세기에 작곡된 여섯 개의 작품 중 특히 눈을 번쩍 뜨게 한 건 강혜선이 협연한 핀처의 바이올린과 앙상블을 위한 ‘마레흐’였다.
‘마레흐’에서 강혜선과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은 한 편의 완성도 높은 영화를 감상하는 듯한 감흥을 가져다주었다. 강혜선의 바이올린은 섬세하고 날카롭게,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악기가 표현할 수 있는 음색의 범위를 확장했다.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은 이를 중심으로 조연 또는 배경이 되며 음향을 통한 마법을 부렸다. 신비롭게 부유하면서도 흐름은 거침이 없었다. 창작과 표현을 구분 짓지 않는 단체가 들려준 생생한 사운드는, 듣는 이를 완전히 몰입하게 만들었다.
이날의 음악은 옛날 귀족을 위한 음악이 아닌, 창작자의 실험을 위한 음악이 아닌, 오늘날의 ‘나’에게 말을 거는 음악이었다. 혼란한 시국에 이들은, 덧없이 덧칠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가슴에 묵직한 무언가를 움직이는, 의미 있는 시간을 선사했다. 김호경
네 대의 악기, 단 하나의 순간
콰르텟 K 리사이틀
11월 3일
금호아트홀
현악 4중주를 가리켜 가장 고도화된, 가장 형이상학적인 음악이라고들 말한다. 단단한 질감의 건반악기도, 포근하게 공기를 채우는 관악기도 없이 오직 예민한 현악기 네 대로만 만들어내는 절묘한 균형은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하면서도 이상적으로 구조화된 텍스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네 가닥의 실이 유연하게 노닐며 자아내는 순수하면서도 밀도 높은 음향은 가깝게 붙어 앉아 마주보며 연주하는 실내악에서만 즐길 수 있는 묘미인 것이다.
서울시향 바이올린 수석 임가진과 김덕우, 첼로 수석 주연선, 그리고 비올리스트 이수민이 2013년부터 함께해온 콰르텟 K는 현악 4중주가 지향하는 이러한 미덕에 충실히 부합하는 음악을 들려준다. 금호아트홀은 이들의 사운드를 즐기기에 아주 적합한 공간이었으며, 객석 곳곳에는 동료의 연주를 감상하러 온 서울시향 단원들이 자리했다.
이날은 브람스와 슈만의 작품이 한 곡씩 연주됐다. 두 곡 모두 A단조로서 레퍼토리 상의 안정감과 통일감이 느껴졌지만, 사제지간이자 삼각관계의 주인공인 두 작곡가의 작품을 나란히 연주하다니, 은근히 짓궂은 페어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첫 곡은 브람스 현악 4중주 2번으로, 콰르텟 K는 4성부가 밀착된 소리를 내며 긴장을 고조시키는 2악장과 이어지는 3악장의 산뜻하고 발랄한 선율이 흐르는 음악적 대조를 능란하게 다뤄갔다. 긴장과 이완의 흐름을 유연하게 타고 넘는 네 사람은 여유로운 악상 속 견고한 사운드를 들려주며 곡의 균형감을 유지했다. 브람스로 1부가 채워지는 동안 아쉬웠던 점은, 각 악기 간 음정이 조금씩 어긋나 감상에 다소 방해가 됐다는 것이다. 연주자들도 이를 느끼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악장과 악장 사이마다 꽤 긴 시간을 들여 조율을 거듭했다.
2부의 슈만 현악 4중주 1번은 1부에서보다 더욱 극대화된 감정이 흐르는 연주였다. 우아하고 간결한 프레이징이 돋보인 1악장에 이어, 2악장은 콰르텟 K가 가장 즐겁게 연주한 악장이 아닐까 느낄 만큼 적극적인 표현의 향연이 펼쳐졌다. 마치 신경계의 ‘자극과 반응’처럼, 순간순간 서로의 소리를 듣고 민첩하게 반응하는 과정 속에서 음악의 생동감은 극에 달했다. 슈만 특유의 서정과 슬픔과 열정이 뒤섞인 3악장에서는 연주자들의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했는데, 특히 주연선의 첼로 선율은 농밀한 감정선을 매력적으로 이끌어가는 힘을 보여주었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또 솔리스트로 활약하는 네 사람에게 이 무대는 몇 날 며칠 손꼽아 기다리던 나들이 같은 즐거운 시간이 아니었을지 상상해본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무대를 경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오직 그 순간만의 기쁨’이 스쳤다. 이정은
가을의 노래
이미경 바이올린 리사이틀
11월 10일
금호아트홀
가을만큼 클래식 음악이 어울리는 계절이 있을까? 봄날의 싱그러운 감성이 여름날의 태양과 비바람을 견뎌내고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가을의 서정은 은은한 멋을 지닌 클래식 음악과 많이 닮았다.
바이올리니스트 이미경의 바이올린 리사이틀은 마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웠고 부드러움 속에서 느껴지는 강인하고 확고한 그녀만의 음악 언어는 각 작품 안에 스며들어 진한 여운을 남겼다. 브람스 스케르초 C단조는 청년 시절 브람스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자유롭지만 고독한 감성이 그녀의 연주 속에 묻어나 청중의 마음속으로 조용히 흘러 들었다. 온화하고 때로는 다이내믹한 브람스의 젊음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어진 소나타 2번도 아름다운 스위스 툰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지는 것처럼 섬세했고 아름다웠다.
이어진 비에니아프스키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화려한 폴로네이즈는 브람스 작품과는 다른 매력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화려한 기교도 돋보였지만 감정의 변화와 섬세한 강약의 조절, 그리고 깊은 통찰력이 빛났던 연주였다. 중간부에 들린 현의 부드럽고 잔잔한 선율은 시(詩) 속의 여백처럼 단아한 미를 풍겼다.
그리그의 소나타 3번은 특히 2악장에서 피아노의 청명한 선율과 어울리는 바이올린의 조화가 절묘했다. 바이올린의 예리하면서도 폭넓은 그녀의 음악성이 아름다운 북구의 시정을 그려내고 있었다.
화려한 연주와 테크닉이 주목받는 이 시대에 자기만의 속도로 자기만의 색깔을 간직하며 천천히 음악가의 길을 걷고 있는 그녀. 깊은 성찰을 통해 이뤄낸 이날 연주는 많은 사람의 마음에 긴 울림을 주었다. 브람스와 비에니아프스키, 그리그가 지나간 자리. 그녀가 음악으로 그려낸 가을의 노래가 스산한 바람과 함께 하늘을 맴도는 것 같았다. 국지연
그대, 그 강을 보았는가
연극 ‘슬픔의 노래’
10월 28일~11월 20일
아트원씨어터 3관
슬픔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시대,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공연이 올랐다. 1995년 극단 김동수컴피니 무대로 초연된 이래 1996·2001·2002년 재공연되었고 이후 14년의 세월이 흘러 2016년 림에이엠시가 제작을 맡아 이 공연을 다시 관객 앞에 내놓게 된 것은 배우 박지일의 의지가 컸다. 초연부터 배우 남명렬과 함께 이 작품을 매만져온 그는 “이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이 남자 배우들의 로망”이라는 이야기를 제작사 대표에게 건넸다 한다. 초연 당시 아우슈비츠 역사나 우리나라 광주에 대한 기억을 중심으로 회자되던 이 작품이 이후 새로운 비극과 슬픔을 겪어온 2016년의 관객에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했다.
연극의 원작인 소설가 정찬의 ‘슬픔의 노래’는 동명의 부재를 지닌 폴란드 구레츠키의 교향곡 3번에서 비롯됐다. 이 작품은 1991년 데이비드 진먼/런던 신포니에타, 소프라노 던 업쇼가 참여한 앨범이 일렉트라 논서치 레이블을 통해 소개되면서 미국 빌보드 차트 클래식 음악 부문 31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화제를 보았다. 그즈음 음악 전문지 기자로 활동하던 원작의 저자는 구레츠키를 인터뷰하며 경험한 것을 훗날 자전적 소설로 풀어낸 것이다.
이것을 연극으로 옮긴 무대 위에는 구레츠키를 인터뷰하기 위해 폴란드에 간 기자 겸 소설가 유성균(박지일·김병철 분), 그의 친구로 유학 중인 영화감독 지망생 민영수(남명렬·이명호 분), 폴란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 중인 박운형(손성호·이찬영 분)까지 세 사람이 등장한다. 초연부터 무대를 지켜온 배우들이 레전드팀, 이번 공연을 위해 새롭게 더블 캐스팅된 배우들이 뉴웨이브팀으로 그날의 무대를 책임졌다.
극 중 구레츠키는 ‘슬픔의 노래’는 슬픔의 강이 흐르는 소리라고 말한다. 그를 인터뷰하는 유성균이 그 슬픔의 강가에서 예술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자 그는 대답한다.
“예술가란 살아남은 자의 형벌을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형벌이기도 하다. 빛은 어둠이 있어야 존재한다. 축복과 형벌은 빛과 어둠의 관계다. 그런데 예술가는 축복보다 형벌에 민감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형벌을 견뎌야 한다. 단언컨대, 견디지 못하는 자는 예술가가 아니다. 슬픔의 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있지만, 그 강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 강이 있음을 일깨우는 사람이 바로 예술가다.”
공연 이후에도 가슴 속에 이 말이 계속 맴돈 이유는, 슬픔의 강이 있음을 일깨우는 일이 예술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일 터다. 과거의 슬픔은 형태만 다를 뿐 결국 현재, 미래의 슬픔과 다름없다고 생각한 작곡가의 선율은 소설가에게 1980년대 광주를 들여다보게 했고, 작가의 텍스트는 연출가와 배우를 일깨워 움직이게 했다. 무대에 선 배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이 슬픔의 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김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