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여전히 건재한 거장의 개성
5년 만에 독주 무대를 갖는 피아니스트 머리 페라이어의 소식을 공연 하이라이트인 베토벤 소나타 ‘하머클라비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쩌면 최근 그가 경험한 여러 가지 ‘음악적 사정’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놓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내한 연주 직전 인터뷰 자리에서 직접 나눈 이야기들은 필자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최근 완성한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 앨범과 다른 모음곡들의 텍스처 비교, 바흐와 베토벤이 구사한 대위법의 근본적 차이, 20세기 음악에 대한 호기심과 이와 상반되는 앞으로 연구 방향에 이르기까지 짧지만 유익한 대화가 이어졌다. 아울러 그가 바쁜 연주 일정 가운데에도 지속하고 있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편집 작업 역시 자신의 인문학적 관심과 그 열정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베토벤의 문제작 ‘하머클라비어’가 난곡임에 분명하지만 그의 기념비적 무대도 앞으로 이어질 베토벤에 대한 새로운 고증과 연구 과정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그가 주로 다뤄온 작곡가들로 다양하게만 꾸민 듯한 프로그램 구성은 후기 베토벤의 작품 세계를 강타한 음악적 사건으로서 ‘하머클라비어’가 있게 된 배경과 그 후 영향을 나타내는, 간단하지만 명료한 콘셉트로 구성됐다.
쾌활함이 두드러지는 하이든의 건반악기 음악 중 변주곡 F단조는 분위기와 구성 면에서 매우 독특하다. 변주곡이지만 자유로운 환상곡 형태를 공유하고 있는 작품의 해석은 그동안 여러 가지 길로 나타났는데, 페라이어는 비교적 편안하게 자신의 기질을 그대로 드러내며 작품의 즉흥적 면모를 외향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택했다. 분방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흐름과 아르페지오 등의 음상은 깔끔하지만 풍성한 배음을 지닌 페달의 조력을 받고 더욱 구체적인 모습을 띄었다. 하이든과 같은 단조이지만 짙은 비장미와 무게감이 큰 존재감을 나타내는 모차르트 소나타 A단조 K310 역시 완성도 높은 호연이었다. 연주자는 음량의 발산이 다소 지나치다 싶었던 1악장을 지나 실내악적 호흡과 다채로운 음색 변화를 보여준 2악장에서 차분함을 되찾았고, 타이트한 템포 속에 자신의 장기인 아기자기한 손놀림을 빈틈없이 구사하며 야무진 마무리를 했다.
발라드, 카프리치오, 인터메조 등이 혼합된 브람스의 후기 소품 모음은 비르투오소적 작품을 앞머리에 배치하고, 비슷한 분위기를 나열하며 작품집의 첫 곡을 마지막에 연주하는 등 연주 순서부터 페라이어의 독자적 의견이 돋보였다. 페라이어는 작곡가의 스쳐 지나는 상념을 애써 붙잡거나 지나친 감상을 뽑아내려고 하지 않으며 유창하고 자연스런 흐름과 율동감이 느껴지는 템포 속에 순수함이 동반된 멜로디들을 풀어놓았다. 또한 후기낭만의 서정성과 작곡가의 감성을 노년의 작품임을 의식하지 않고 수줍고 싱싱한 젊음의 표현으로 바꿔놓은 것도 훌륭한 선택이었다.
후반부의 ‘하머클라비어’는 우리가 알고 있던 ‘바로 그’ 페라이어가 그대로 건재하다는 모습이 그간의 성장이나 변화보다 더욱 반가운 자리였다. 어딘지 수줍은 느낌의 루바토와 새침하게 마무리하는 프레이징, 해머와 강철현의 마찰에서 맑은 음만을 걸러내는 듯한 정갈한 톤 컬러는 베토벤의 대곡을 마주해도 그 개성을 잃지 않았다. 빈틈없는 터치와 절제된 아고긱의 1악장, 유머감각조차 단정함으로 포장해낸 2악장, 내제되어 있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긴장감의 3악장과 씨줄날줄이 현란한 율동감으로 엮여나가는 자유로운 대위법의 극치인 4악장에 이르기까지, 페라이어라는 이름의 촘촘한 그물을 까다로운 과정으로 통과한 매우 흥미로운 베토벤이 탄생했다. 훌쩍 앞으로 다가온, 동곡의 음반 출시가 기다려지는 흡족한 무대였다.
사진 크레디아/Hyuckhoon M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