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 바흐 연주
건반음악이 빚어내는 다양한 빛깔이 어디까지 아름다울 수 있는지 유감없이 들려준 언드라시 시프의 이번 내한 연주회에서 필자가 경험한 ‘결정적’ 순간은 음악회가 아닌 다른 시간과 장소였다. 그의 독주회 날, 필자 역시 2시 공연이 있어 리허설을 하러 오전 10시쯤 예술의전당 대기실에 도착했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바흐의 선율은 말할 것도 없이 아침 일찍부터 워밍업을 하는 시프의 피아노 소리였다. 들어본 이들은 공감하겠지만, 문밖에서 듣는 피아노 소리가 홀에서 듣는 사운드와 전혀 다른 신비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평소 우리가 아는 시프의 이미지대로, 연습실에서도 건성으로 대하는 법 없이 진지하게 누르는 타건은 매우 단단했다. 콘서트홀로 자리를 옮겨 연습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텅 빈 객석을 향해 정성스레 만들어내는 음상은 부드러우면서도 짙은 밀도가 느껴졌다.
바흐로만 구성된 이날 음악회의 피날레는 계속 이어지는 멘델스존, 슈만 등 낭만파 레퍼토리의 앙코르였다. 청중은 두어 시간을 연주해도 흔들리지 않는 체력과 연주력을 지닌 대가에게서 기분 좋은 포만감을 만끽했지만, 그 속에 숨은 미묘하고도 중요한 그의 변화는 다분히 짙은 빛깔의 기교를 직접적으로 나타냈다는 점에 있었다. 나긋나긋하고 편안한 그의 터치가 공연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더욱 강한 설득력을 띠고 구체적인 질감으로 바뀌어갔음이 분명히 느껴졌다.
어쩌면 음악회의 첫 곡부터 시프의 변화한 연주관은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외향적이고 명랑한 ‘이탈리아 협주곡’을 연주하는 시프의 모습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그의 발이 놓인 위치였다. 이전의 내한 공연에서 바흐를 연주하는 내내 페달과 거리를 두었던 시프의 발이 페달을 누르는 자세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놀라움이다. 관현악적 색채로의 전환이 필요할 때 절제된 형태로 등장하는 시프의 페달링은 절묘했다. 시프 특유의 단아함과 깔끔함이 프레이징으로부터 드러난 2악장은 노래하는 악장이지만 오히려 적게 사용된 페달도 흥미로웠고, 왼손의 아티큘레이션은 지극히 단호하게 처리되어 바로크적 맛을 풍겼다.
바흐의 작품 중 기교적 화려함을 통해 피아니스틱한 효과를 내기에 가장 용이하다고 여겨지는 ‘프랑스풍 서곡’BWV831은 예상외로 모노톤의 진행이었다. 하프시코드의 음색을 염두에 두고 무리한 색채 변화를 꾀하거나 오케스트라적 이디엄을 나타내려 하는 것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한 해석이었지만, 악장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무게를 더해가는 터치와 미세한 아고긱 조절에 의한 긴장감의 증가 등은 시프가 작품 전체를 여유롭게 조망하고 있다는 증거와도 같았다. 짙은 뉘앙스가 과감하게 표현된 사라반드를 거쳐 부레―지그―에코로 이어지는 감성의 점층적 증가는 악장 간의 파우제를 차별화한 연출로 나타났는데, 몇 십 년 된 바흐의 내공은 이렇게 음이 없는 곳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시프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별다른 사족이 필요할지가 의문이지만 사색과 달변, 유희와 고뇌, 감성과 고도의 논리 등이 공존하는, 게다가 이 모든 요소가 결코 과도하지 않게 표출된 해석은 피아노로 만들어낸 시간예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주에 필요한 모든 해석적 장치를 곱게 갈고닦아 내놓은 연주자의 정성은 그 자체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 어떤 과장이나 불필요한 설명 없이 모든 반복을 그대로 지키며 자신과 청중을 서서히 클라이맥스로 이끌어간 연출의 핵심은 교묘하게 쌓아올려진 터치의 무게감과 양념처럼 곁들인 페달, 그리고 신선한 꾸밈음의 가세였다. 담담한 필치로 그려진 바흐의 우주는 황홀했던 기억으로 오래 남을 듯하다.
사진 마스트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