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미국적 색채를 머금은 무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이하 SFS)의 첫 내한 공연이 11월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지휘는 20년 넘게 악단을 이끌고 있는 마이클 틸슨 토머스. 이들의 공연은 첫 내한이라는 수식보다는 ‘키핑 스코어(Keeping Score)’ 시리즈의 주인공을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했다.
‘키핑 스코어’는 악단의 자체 레이블인 SFS Media를 통해 발매된 멀티미디어 교육용 영상물이다. 마이클 틸슨 토머스의 주도 아래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리허설, 공연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공중파 TV를 통해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음악교육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전통을 잇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로, 한국의 많은 음악 애호가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은 아이템이었다. 이렇듯 레퍼토리 확장과 작곡의 병행, 대중적 노출, 교육 프로그램, 음악적 방향성 등 여러 방면에서 그는 제2의 번스타인이라는 이미지를 지니게 됐다.
그러나 이번 첫 내한 공연을 통해 그가 제2의 아무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오롯한 마이클 틸슨 토머스임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만큼 마이클 틸슨 토머스와 SFS의 연주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고 다양한 음악적 아이디어가 넘실거렸다.
파란색 안경을 쓴 댄디한 차림의 마이클 틸슨 토머스가 열광적인 박수를 받으며 고풍스럽게 장식된 나무 팔걸이를 지닌, 직접 본토에서 공수해온 포디움에 올랐다. 첫 곡으로 자신이 작곡한 ‘아그네그램’을 연주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일종의 행진곡풍 협주곡으로서, 엄격한 형식과 균질한 음향을 보여주는 고전성을 띠고 있는 반면, 자동차 클랙슨을 연상케 하는 소리나 재즈 선율, 갖가지 타악기가 어우러지며 미국의 현대성을 반영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이들이 지닌 관악의 에너지는 음반에서보다 훨씬 강력했고, 현악군의 표현력 또한 더 강도 높았던 점이 이채로웠다.
이어 임동혁과의 협연으로 이루어진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임동혁은 완연하게 무르익은 감수성을 바탕으로 작품을 전혀 새롭게 일구어나갔다. 여전히 아름답되 단호한 톤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일정한 패턴의 굴곡을 머금은 흐름과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강세. 개성 넘치는 낭만성이 어우러진 최고의 쇼팽을 보여주었다. SFS와 지휘자도 임동혁의 자유분방한 연주를 대체로 잘 서포트했지만, 아무래도 리허설 시간이 짧았던 탓인지 정교한 일체감까지 만들어내지는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2부는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으로 꾸며졌다. 말러 음악에 있어 스페셜리티를 지니고 있는 악단인 만큼 이날의 하이라이트로 손색없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특히 지휘자는 절제된 지휘 포즈를 바탕으로 연주 중간중간 번스타인을 연상케 하는 듯한 제스처를 섞어가며 악단을 일사분란하게 이끌어갔다. 독일어권 악단의 말러에 익숙한 애호가라면 이들의 연주가 살짝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현악 파트의 부풀어 오르는 듯한 입체감과 지극히 미국적인 음색, 연결구에서의 리타르단도와 인 템포로의 복귀 등등에서 특히 그러하다.
음반을 통해 듣던 것보다 훨씬 그로테스크한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템포가 다소 느린 편이었던 3악장은 현악군의 앙상블이 약간 흐트러지는 모습이 보였음에도 지휘자만의 개성적 관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2악장은 랜들러(오스트리아 민속 춤곡)풍 스케르초 악장으로서 전형적인 이미지보다 훨씬 더 세련됐고 부드러웠으며, 마지막 4악장에서는 밸브 트럼펫을 포함한 금관군이 불을 뿜는 듯한 장관을 이루며 청중의 피를 뜨겁게 해주었다. 다만 호른의 음색이나 질감은 유럽의 A급 악단들에 비해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했고, 클라리넷을 제외한 목관들의 올드한 느낌 또한 일말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사진 크레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