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5~12월 18일
백성희장민호극장
낙원의 사과, 주방의 칼
스트린드베리의 ‘미스 줄리’가 루마니아 출신 연출가 펠릭스 알렉사의 연출로 국립극단 무대에 올랐다. ‘미스 줄리’는 “삶은 본질적으로 투쟁이다”라는 스트린드베리의 대표적인 자연주의극이다. 펠릭스 알렉사는 ‘미스 줄리’를 “시적 폭력성”과 “심리적 잔혹함”의 연극이라고 말했다.
무대는 백작의 저택, 냄새나고 습한 지하 주방이다. 관객 입장과 함께 공연이 시작되면 하녀 크리스틴이 요리하는 음식 냄새가 객석 가득 퍼진다. 이윽고 크리스틴은 무수히 많은 칼을 닦으며 부엌을 정돈한다. 강렬한 탱고풍 음악이 들려오면서 하인 장이 등장한다. 장은 하지절 축제에서 춤추는 무리를 보고 들어오는 길이다. 그는 “오늘밤 줄리 아가씨가 완전히 미쳐버렸다”고 혀를 내두른다. 하지절 축제 날 귀족 친척들의 모임 대신 하인들과 춤판을 벌인 줄리 아가씨의 품행에 대한 논란도 빠뜨리지 않는다. “지저분할 땐 귀족들이 더하다”는 것이다. 줄리 아가씨의 성격도 성격이지만 만만치 않은 하인과 하녀다. 장은 백작 몰래 값비싼 와인을 훔쳐 마시고, 자유분방한 줄리 아가씨는 평민들이 먹는 맥주를 마신다. 스트린드베리의 인물들은 성별과 나이가 다르고 신분과 계급의 사회적 차이가 있더라도 생물학적 남녀관계는 동등한 투쟁의 관계이며, 각 개인은 동등한 입장권과 발언권을 가지고 극에 참여한다. 다윈의 진화론 속 자연의 생존법칙처럼 각각의 인물은 끝까지 살아남고자 애를 쓴다. 때문에 극은 점점 더 강력해진다.
펠릭스 알렉사는 이러한 권력 관계에 놓인 투쟁의 드라마를 사과와 칼이라는 단순한 상징물을 통해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신분상승의 욕구가 있는 장은 낙원의 사과를 따고 싶어 하고, 여성해방과 평등사상을 교육받은 줄리 아가씨는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 한다. 실제로 무대에는 커다란 바구니에 담긴 사과가 잔뜩 쌓여 있다. 줄리와 장의 정사 장면에선 긴 테이블 가득 사과를 쏟아놓는다. 반면 줄리는 칼로 사과를 조각내면서 장을 위협한다. ‘낙원의 사과’와 ‘주방의 칼’은 그 자체로 장과 줄리의 치열한 대결을 나타낸다. 장의 꿈은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욱 강력하고, 줄리의 추락은 누구도 말릴 수 없기에 무기력할 뿐이다. 처절한 꿈과 무기력한 현실은 점점 더 팽팽하게 활시위를 잡아당길 뿐 멈추질 못한다. 심리적 해부학과도 같은 스트린드베리의 극단성과 난해함 때문에 그동안 한국 연극계에서 스트린드베리는 그 명성에 비해 쉽게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 공연에서도 단순히 고전극의 현대적 재해석의 지점 이외에 한국적 맥락에서 이 공연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난감한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권력투쟁의 심리적 해부학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지금 현재의 맥락들이 묘하게 겹친다. 줄리는 영주의 딸, 곧 영애(令愛)다. 지금 한국에선 두 달째 매주 촛불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완전히 추락한 영애 줄리는 하인 장에게 말한다. “난 몰라” “나에게 명령을 내려줘”
그런가 하면 도피 행각을 서두르는 와중에도 줄리는 커다란 새장 속 애완용 새를 포기하지 못한다. 불현듯, 이른바 ‘강아지 게이트’로 불리는 최순실 게이트의 장면들이 한낱 우스꽝스러운 코미디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위 사람들을 아무도 믿지 못하는 상황, 오로지 애완용 개와 새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완전히 무기력하고 아이러니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에서 믿을 수 없도록 똑같은 현실의 비극을 다시 읽게 된다.
새의 목은 잘리고, 모두의 꿈은 사라지고, 사과에는 면도칼이 박힌 채 공연은 끝난다. ‘미스 줄리’의 정확한 해부학적 관찰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외국인 연출가에 의해 우연히 포착된 ‘미스 줄리’의 뜻밖의 장면들이다.
사진 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