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으로 다시 기억하는 그, 메조소프라노 이르마 콜라시

그리스에서 태어나 프랑스 가곡에 음악 인생을 바친 그녀를 다시 돌아보다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6월 7일 9:00 오전

WORLD HOT

세상에 모국어가 둘인 사람은 없다. 어머니가 둘인 사람이 없는 것처럼. 어머니도 하나이고, 모국어도 하나이다. 하지만, 때로는 어머니의 언어가 모국어가 아닌 경우가 있다. 메조소프라노 이르마 콜라시(Irma Kolassi, 1918~2012)의 경우가 그렇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을 파리에서 보냈고, 아테네로 돌아온 뒤에도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으며, 이후 혼자 파리로 떠나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 그리고 당대 가장 중요하고 뛰어난 프랑스 가곡 해석자가 되었다.

피아니스트이자 성악가로

콜라시는 할머니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으면서 음악을 시작했다. 이후 그리스 아테네 음악원에 들어간 그녀는 14세에 피아노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그리스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는 콜라시를 ‘특별한 피아니스트’로 평가하며 소프라노 매기 카라자에게 소개했다. 매기 카라자의 성악 클래스에서 반주자로 활동한 콜라시는 필요에 따라 직접 노래하기도 했다. 어느 날 콜라시가 부르는 토스티의 가곡을 들은 카라자는 그 실력에 감탄했고, 두 사람은 성악교수와 반주자의 관계에서 진정한 친구관계로 발전했다. 이후 콜라시는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성악 공부를 이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했던 그녀는 후자를 선택했고, 이에 피아니스트 알프레도 카셀라는 콜라시에게 피아니스트로서의 커리어를 쌓을 것을 격려하며 무료로 레슨을 해주었다. 2차 대전이 시작된 직후 그녀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온다. 아테네 오페라의 성악가로 활동한 그녀는 ‘나비 부인’ 속 스즈키 역할로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콜라시는 당시 함께한 성악가들이 악보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태도에 놀랐다. 그중 한 테너의 ‘음을 길게 끄는 것만으로 청중들의 박수를 받는 것은 충분하다’는 말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콜라시는 아테네 오페라에서 계속 일했지만, 성악가로서가 아니라 피아노 반주자로서였다. 간혹 주어지는 역할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젊은 나이의 마리아 칼라스를 지도하기도 했다. 당시 칼라스는 베토벤 오페라 ‘피델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콜라시는 칼라스가 흉성을 이용해 내는 효과에 대해서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칼라스가 매우 진지한 성악가이며 악보를 섬세하게 대하고, 극적인 효과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평가했다.

프랑스에서 다시 피어난 콜라시의 음악

성악가로서의 그녀는 프랑스 가곡을 깊이 공부하며, 이 분야의 전문가를 꿈꿨다. 하지만, 당시 그리스에서 프랑스 가곡은 별다른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성악가로서의 경력을 프랑스 가곡만으로 쌓기는 힘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는 우울함을 느끼기도 했고, 자신이 노래를 잘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휩싸이곤 했다. 그래서 노래도 중단하고, 생계를 위해서 라디오 방송국 작가 일을 했으며, 간혹 무성 영화를 피아노로 반주하는 일도 했다. 1949년, 아테네의 프랑스 문화원과 대사관을 통해서 콜라시는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 연주회에 초대되는 기회를 얻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완벽한 프랑스어 덕분이었다. 프랑스 대사관의 부인은 콜라시를 당대 최고의 성악가로 여기며 바이올리니스트 장 푸르니에에게 콜라시를 추천하는 편지를 썼고, 프랑스에서 도움을 줄 여러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별다른 희망을 품지 않았던 그녀는 파리에서 루이 오베르, 앙리 뷔세르, 피에르 캅데비엘을 만날 기회를 얻는다. 작곡가 루이 오베르와의 약속에서 콜라시는 파리의 메트로 때문에 약속 시간에 거의 3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화가 난 오베르는 콜라시에게 단지 5분만을 할애하겠다고 일갈했다. 하지만, 콜라시의 노래를 듣고 놀란 오베르는 자신이 작곡한 가곡집 ‘아랍의 시’를 시창해보라고 요구한다. 콜라시가 이를 완벽하게 노래하자 그는 콜라시가 이 노래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작곡 중인 곡을 꺼내서 노래해보라 요구한다. 또다시 선보인 그녀의 완벽한 노래에 오베르는 할 말을 잃었고, 콜라시가 늦게 도착했을 때 선언했던 5분은 어느새 2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콜라시의 완벽한 음성과 음악성에 반한 오베르는 그해 가을, 자신이 작곡한 가곡을 직접 반주하며 콜라시와 함께 녹음한다. 그녀는 피아니스트이자 라디오 방송국의 음악 책임자였던 피에르 캅데비엘도 만난다. 그는 콜라시가 부르는 프랑스 가곡을 몇 곡 듣고는, 다음 해 5월 31일에 일정이 없는지를 묻는다. 당시 콜라시는 이 질문에 다른 일정이 없다고 답하면서도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다시 아테네의 일상으로 돌아온 콜라시에게 놀라운 편지들이 도착했다. 캅데비엘은 콜라시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목소리라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계약서를 보냈다. 콜라시는 캅데비엘의 피아노 반주로 드뷔시 ‘빌리티스의 노래’, 라벨 ‘말라르메 시에 의한 3개의 노래’를 불렀고, 이 연주는 녹음되어 BBC의 전파를 타고 많은 이들에게 전해졌다. 콜라시의 노래를 들은 풀랑크는 ‘우리는 이제야 진정한 무대 위의 성악가를 한 명 갖게 되었다. 콜라시라고 불리는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이 성악가의 목소리에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다. 콜라시의 국제적인 경력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피에르 몽퇴·존 바르비롤리 경·샤를 뮌슈·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등의 세계적인 지휘자들의 초대를 받았으며, 나디아 불랑제는 기꺼이 콜라시의 반주를 자청했다. 1960년대 후반, 콜라시는 약 20년가량의 화려한 무대 생활을 접고 은퇴를 선언한다. 그녀는 무대가 자신을 버리기 전에, 자신이 무대를 떠나는 편이 낫다는 말을 남겼다. 무대를 떠난 콜라시는 파리의 스콜라 칸토룸, 트루아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무대를 떠난 콜라시는 조금씩 잊혔고, 2012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인 일간지 ‘르 몽드’를 비롯한 많은 언론이 콜라시를 추모하는 기사를 썼고, 콜라시의 탄생 100주년인 지난해 2018년부터 파리의 한 소규모 음반사 멜리즘(MELISM)에서 콜라시의 녹음 전집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 가곡 해석에 반평생을 바친 그리스 성악가 이르마 콜라시, 그녀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였다.  글 김동준(재불음악평론가)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