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컨덕터’

마침표가 아닌 쉼표가 바꾼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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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1월 13일 9:00 오전

굴곡된 거울에 비친 모습이 진짜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다. 어딘가는 부풀어 오르고 어딘가는 찌그러져 있지만 누구도 그것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다. 세상을 비틀어 버리는 왜곡된 거울에 맞서 온전한 제 모습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비틀린 세상은 늘, 자신을 비추는 굴절에 맞서 싸운 사람들 덕분에 조금씩 평평해지고 있다. 그리고 부당함에 맞서 바른 결과를 이끌어낸 개인의 삶은 타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평평해진 거울은 결국 나뿐만 아니라, 내 옆에 선 사람들의 모습까지 올바른 모습으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멀고도 가까운, 그리고 현재형의 편견들

마리아 피터스 감독의 영화 ‘더 컨덕터’(2018)는 암묵적으로 여성에게는 금지된 지휘의 영역에 첫발을 내디딘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Antonia Brico, 1902~1989)의 삶으로 들어가, 당시에 여성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편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말을 거는 영화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감독이 던진 그 질문은 우리의 머릿속에 후일담처럼 잔상을 남긴다. 그렇다면 지금은 정말 달라졌는가? 아니면 달라지고 있는가? 브리코는 버클리 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한 후 뉴욕 필하모닉을 시작으로 베를린 필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지휘한 세계 첫 여성 지휘자로 기록된 실존 인물이다. 20세기 초반, 100여 명이 넘는 연주자를 이끄는 지휘자는 군대로 말하자면 일종의 장군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각각의 연주자를 통솔해 음악을 직조해 내기 위해서는 강한 리더십과 힘,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음악계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지휘가 남성의 영역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그래서 ‘더 컨덕터’의 브리코는 그저 음악을 사랑하고 지휘하고 싶어 하지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들이 수월하게 오르는 계단을 힘겹게 빙빙 돌아 올라야 한다. 심지어 영화 속 남성 지휘자인 카를 무크는 ‘(남성들을) 컨트롤하고 싶은가?’라고 노골적으로 그녀에게 묻는다. 영화 속 브리코는 네덜란드 출신의 입양아다. 음악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여성을 차별하던 시절에 브리코는 어렵게 지휘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차별 속에 있었다. 다른 남자 동료들이 계속 지휘를 하는 것과 달리 그녀에게는 고작 1년에 한 번 정도 기회가 주어진다. 게다가 음악원에서 교수가 저지른 성추문의 피해자가 된 것은 오히려 브리코였다. 마리아 피터스 감독은 예술계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권력 관계에 의한 추행과 차별의 이야기도 놓치지 않는다. 세상의 편견과 채찍에 맞서 살아남아야 하는 한 여성의 생존 이야기가 날카롭게 툭, 송곳처럼 마음을 찌른다.

시간을 잇는 쉼표

간혹 ‘더 컨덕터’를 본 후 브리코가 지휘자로 성공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이 다 남성이라는 점을 껄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빗장 쳐 단단하게 가로막힌 시스템과 맞서기 위해서는 손잡고, 팔짱 껴서 작은 결속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차갑고 시린 바닥에 맨 발로 선 영화 속 브리코는 손을 마주 잡을 여성 동료를 옆에 두지 못했다. 세상을 온전히 바꾸는 것은 여성뿐만 아니라, 차별과 편견 없이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바라봐주는 사람들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이 영화를 봐야 할 것이다. 20세기 초반, 여성들이 겪어야 하는 사회적 편견들을 르포처럼 나열하고 있어 자칫 성 대결처럼 보일 수 있고, 진지한 주제 때문에 무거운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마리아 피터스 감독은 진지한 이야기 속에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여성의 친구가 되는 남성들의 이야기 역시 놓치지 않아 건조하기 쉬운 이야기에 물기를 더한다. 그리고 ‘더 컨덕터’ 속 연주 장면들은 영화 내내 귀를 황홀하게 만든다. 사실 안토니오 브리코의 이야기는 음악계에 굵은 마침표를 찍지는 않았지만, ‘(남성) 지휘자’라는 고유 명사화된 영역 사이에 ‘여성’이 함께 할 수 있는 쉼표를 찍었다. 그리고 그 쉼표 덕분에 여성과 남성은 지금 함께 어우러지고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영화의 말미에 ‘영국 음악 전문지 그라모폰이 선정한 세계 20대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나 음악감독 중 여성은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라는 자막이 오른다. 하지만 전 세계의 지휘대에 오르고 있는 여성의 수는 해마다 늘어나는 등 음악계가 변화하고 있다. 마린 알솝은 볼티모어 심포니의 음악감독이자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고, 시몬 영은 2021년 독일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바그너 오페라를 지휘하는 여성이 될 예정이다. 음악 신동에서 출발한 장한나는 2017년부터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지휘자 김은선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됐다. 오페라단 96년 역사상 첫 여성 지휘자라고 한다. 백인 남성 위주의 높은 유리천장을 깨고 여성, 동양인이라는 편견에 맞서 새로운 이음새를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는 끝내 한 시대에 종지부를 찍어버리는 파괴와 창조의 마침표 역사를 배워왔다. 하지만 시간 속에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어준 사람들 덕에 시대와 시간, 그리고 그 속의 사람들은 변화해 왔다. 남성의 영역이라고 당연시하던 지휘자의 앞에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브리코의 쉼표는 언젠가 젠더 수식어가 없는 시절을 이어주는 접속사가 될 것이다. 영화 속 지휘자 브리코는 강한 신념으로 여성이라는 성별이 운명이라 인식되던 시절과 맞섰다. 그리고 그녀의 의지는 편견에 사로잡힌 세상의 바깥문을 열어줄 열쇠처럼 단단하고 꼿꼿하다. 브리코의 얼굴에서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시대와 맞서지만 결국 시대가 적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하는 동료라는 것을 깨닫는 여성의 얼굴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치고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며 또 더 나은 미래의 시간을 꿈꾸는 우리의 얼굴이 쉼표처럼 계속 시간 속에 새겨진다. 브리코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 속에 새겨지고, 그 거울에는 미래의 시간을 꿈꾸는 우리들의 얼굴이 살짝 비쳐 보인다.

최재훈(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후 각종 매체에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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