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연극, 박제된 기록을 넘어서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3월 9일 9:00 오전

THEORY&THEATRE

 

다큐멘터리 연극

박제된 기록을 넘어서

동시대 다큐멘터리 연극이 갖는 ‘다큐멘터리성’은 무엇일까?

방송이나 영화에서는 다큐멘터리가 일반화된 장르로 안착해 친숙한 형식으로 다가오지만, 연극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경우 그 개념은 다소 난해해진다. 다큐멘터리 개념이 주로 ‘사실’ ‘진짜’ ‘현실’의 등가물로 간주돼 대상을 가능한 왜곡 없이 전달한다고 간주되는 까닭이다. 영상이 카메라라는 객관적 장치로 현실을 온전히 포착한다는 신뢰를 전제하는 반면, 연극은 배우라는 주관적 매개물을 통해 재현된다. 연극이 실제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자료를 그대로 투사하는 등 객관성을 담보하는 재현을 시도하더라도 대상이 무대 위에 소환되는 순간 허구라는 혐의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 연극’이란 현실을 꾸며낸 거짓 이야기인가? 다큐멘터리 연극이 갖는 이른바 ‘다큐멘터리성’이란 무엇일까?

다양한 흔적을 포괄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다큐멘터리 연극은 ‘다큐멘트(document)’를 기반으로 현실을 구성하는 연극이다. 물론 모든 창작물이 어느 정도 다큐멘트를 활용할 수 있지만 다큐멘터리 연극은 집적된 다큐멘트가 하나의 아카이브임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다큐멘트를 활용했다고 모두 다큐멘터리 연극이라 할 수 없는 이유다).
이때 다큐멘트란 사료적 권위에 근거해 사실임을 주장할 수 있는 데이터들이 아닌, 과거나 사건, 존재나 현상을 충분히 대표할 수 있는 ‘잠재적’ 권위를 지닌 다양한 흔적을 포괄한다. 예컨대 역사·문헌·영상·사진 등의 박제된 공적 기록에서부터 일기·메모·증언 같은 사적 기록, 나아가 실존하는 인물, 기억과 경험, 일상의 행위처럼 증명하기 어렵지만 분명 실재하는 ‘포스트-다큐멘트’의 세계까지도 아우른다. 이는 20세기 중반 이후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극복하면서 확장된 관점으로 다큐멘트를 이해하게 된 덕이다. 이에 다큐멘터리 연극 역시 현실세계에 확고부동한 지시성을 갖는 기록에 집착하지 않고 유동적이고 비물질적인 현상마저 다큐멘트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즉 다큐멘터리의 개념을 사실·현실이라는 고정된 잣대로만 이해한다면 동시대 다큐멘터리 연극 경향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재현의 스펙트럼이 확장되다
1990년대 이후 유럽연극을 중심으로 실천되어온 다큐멘터리 연극은 포스트모던, 포스트드라마, 퍼포먼스 등의 맥락에서 동시대 연극들이 배태해온 고민들을 받아들이며 다양한 형식적 실험으로 진화했다.
20세기 초중반 다큐멘터리 연극은 주로 공적인 기록물을 무대 위에 소환하는 정치극으로서의 경향과 서사적 효과를 창출하는데 집중됐다. 1990년대 이후에는 다큐멘터리 연극은 장소특정성, 버바팀, 레디메이드(ready-made)로서의 공연자 등의 방법론에 착안해 일상 속으로 침투하기도, 음악·무용극, 디지털 퍼포먼스, 모크다큐멘터리(mock-documentary) 등으로 연극적 양식화를 강조하는 등 재현의 스펙트럼을 확장시켜 왔다.
이로 인해 동시대 다큐멘터리 연극에서는 사실과 허구, 실재와 가상, 연극과 일상, 진짜와 가짜, 객관과 주관의 경계를 분명히 구분하기가 불가능해졌고, 관객은 이러한 경계를 넘나드는 연극적 경험 속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스스로 다큐멘터리 가치를 탐색하는 수행적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뿐이다.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한 가지 지표
동시대 다큐멘터리 연극이 일상에 많은 관심을 두지만, 한쪽에서는 과거 다큐멘터리 연극 이념을 계승하며 정치사회적 논쟁을 무대로 소환해 고발하는 흐름도 여전히 유효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다큐멘터리 연극은 정치사회적으로 격렬하고 혼탁한 시기에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큐멘터리 연극의 동시대 성장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불만과 불안을 드러내는 한 가지 지표라 할 수 있다. 근래 한국연극에서 세월호참사, 블랙리스트, 국정농단, 미투운동, 난민문제 등 정치사회 이슈를 다룬 다큐멘터리 연극을 쉽게 찾아볼 수 있던 이유이기도 하다.
‘반복 – 연극의 역사’로 내한하는 밀로 라우는 폭력적인 역사, 금기시된 주제들을 소환해 도발적인 질문을 멈추지 않는 가장 정치적인 다큐멘터리의 선봉에 선 인물 중 하나이다.
요컨대 일상으로 침투하는 퍼포먼스에서부터 양식적 실험, 나아가 탈정치 시대 정치적 연단이길 주저하지 않는 극단의 스펙트럼 속에서 동시대 다큐멘터리 연극은 다양하게 실천되고 있다.
따라서 동시대 다큐멘터리 연극에서는 사실성이나 정확성 같은 다큐멘터리의 고전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다큐멘트가 ‘창의적’으로 처리되고 있는지, 그렇게 생산된 연극적 허구는 현실과 어떻게 만나 관객의 수행적 경험을 확장시키고 있는지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 남지수(연극평론가) 사진 크리에이티브 VaQi

 

동시대 연극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용어


포스트드라마 연극(postdramatic theatre)  1960년대 네오 아방가르드 영향 하에 등장한 새로운 연극 양식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드라마, 모방(mimesis), 환영(illusion)의 삼각체제를 중심으로 이어져온 고전적 연극 형식에 저항한다. ‘드라마 이후(post-drama)’라는 개념에 연극과 텍스트 사이의 존속 관계에 대한 변화가 내포되어 있듯,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텍스트는 더 이상 우위를 점하지 않으며 연극의 다양한 재료 중 하나가 될 뿐이다.
수행성(performativity)  언어학에서 처음 제안된 수행성이란, 언어가 ‘의미’ 지시의 기능을 넘어 ‘행위’ 실천의 가능성으로서 기존 의미를 변환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연극에서의 수행성은 언어적 전환을 통해 생산된 다양한 공간의 기표들(몸·공간·소리·조명 등)이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를 구성하고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버바팀 연극(verbatim theatre)  버바팀이란 라틴어로 ‘말(글자) 그대로의 인용’이라는 의미로, 현실에서 발화된 말을 편집·인용하는 다큐멘터리 극작술의 한 가지 기법을 의미한다. 인터뷰·증언·진술을 통해 녹음·채록된 현실의 말이 대사로 전환되기에 배우들은 실제 인물들이 사용한 말로 인물을 연기하게 된다.
디바이징 연극(devising theatre)  주로 텍스트가 없는 상태에서 출발해 즉흥을 기반으로 공연 텍스트를 구성해 나가는 공동창작 방식을 의미한다. 연출가나 작가의 권위에 종속되어온 연극제작의 관습을 벗어나 창작 주체들의 수평적인 작업 방식을 지향하며, 대본 구성을 위한 선택과 결정도 공동의 몫이다.
장소특정적 연극(site-specific theatre)  극장공간을 벗어나 삶의 현장으로 침투해 일상을 퍼포먼스화하는 연극 형식이다. 극장을 벗어난다고 모두 장소특정적 연극은 아니며, 그 공간에 축적된 정치사회적, 역사문화적 지층이 공연의 수행적 경험을 통해 포착되고 이야기됨으로써 새로운 공간 담론을 발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
드라마투르기(dramaturgy)  고전적 의미에서 극작술을 의미하는 용어이나 현대 공연예술에서는 의미가 확장되어 장면구성을 두루 일컫는 개념으로 확장됐다. 드라마투르기의 역할을 수행하는 드라마투르그(dramaturg)는 대본 구성뿐 아니라 공연의 제작 과정 전반에 참여하며 공연의 요소들이 어떻게 의미를 생산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연출가 밀로 라우

인류를 위한
정의를 세우다

폭력적인 사건들, 어떻게 무대에 재현할 수 있을까?

세계 정치의 불평등에 맞서며, 인류의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연출가 밀로 라우(1977~)가 내한 공연을 앞두고 있다. 1977년 스위스 베른 출생인 그는 보수적인 스위스 무대와는 인연이 약했다. 일찍이 유럽 전역으로 시야를 넓혀 파리·베를린·취리히에서 사회학과 독일학을 공부했고, 파리의 피에르 부르디외 연구팀에서 일하며 행동의 목표점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라우는 리포터로 활동하며 현실 정치에 눈을 뜬다.

연극, 정의를 세우는 재판장
“사건을 직접 보고, 직접 설명하며 싸우고 싶었다”는 라우는 아프리카·남아메리카·러시아로 여행을 떠나 ‘글로벌 자본 공간’의 속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콩고 및 아프리카 분쟁 지역의 전투에 참여하고, 러시아에서 반정부 투쟁에 가담해 재판에 회부된다. 위험한 상황에 온몸을 던져 투쟁했고, 그의 생생한 다큐멘터리를 작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2002년에 그는 영화감독·작가·사회 활동가로 출발해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극을 올렸다. 각종 페스티벌을 순회하면서 불평등과 싸웠다. 2007년에는 국제 정치 살인 연구소(IIPM)를 설립했다. 그의 선언문에는 세상의 불편한 초상이 묘사되어 있고, 함께 세상을 구하자는 호소가 담겨 있다.
라우의 연극은 주로 독일에서 공연됐다. 2016년 베를린 샤우뷔네(Schaubuhne)에 초대되면서 그의 명성은 독일에서 급상승했다. 연극계의 권위 있는 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작품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다. 라우의 공연은 고전극에서 포스트드라마까지 다양한 양식이 뒤섞이고, 특정 형식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그의 무대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라우가 2018/19 시즌에 부임한 벨기에 겐트 국립극장은 지금 변화를 겪고 있다. 그는 자신을 ‘극장 개혁가’ ‘관여 예술가’로 칭한다. 새로운 극장 모델을 구상하는 라우는 겐트 극장의 무대와 객석을 법정으로 만들어, 가족 문제를 재판하는 연극을 준비 중이다. 그의 극장은 아마도 세계시민 정신으로, 인류를 위한 정의를 세우는 재판장이 될 것 같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실
이번에 내한하는 ‘반복 – 연극의 역사’는 ‘연극의 역사’ 시리즈 중 한 작품이다. 2018년 초연한 이 연극은 세계 주요 페스티벌에 초대받아 호평을 받았다.
작품은 미궁에 빠진 범죄 사건을 재구성한다. 2012년 벨기에 리치에서 동성애자 이산 야피가 살해됐고, 세 명의 살인범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의 범행 동기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범인들은 야피를 몇 시간 동안 두들겨 팬 후 벌거벗은 그를 숲에 버렸다. 2주 후 시체가 발견되면서 잔혹한 범죄로 온 도시가 술렁였다.
라우는 이 연극에서 당시의 사건과 사회적 환경을 재구성한다. 연극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자동차를 무대에 올려놓고, 안개가 자욱한 무대에 비를 내린다. 배우들은 각자 자신이 어떻게 이 사건의 재구성을 위해 캐스팅됐는지 각별한 사연을 설명한다.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적응하는 단계를 거쳐, 사건의 재현을 진행한다.
범죄의 시작은 무엇인가? 의도적인가, 우발적인가? 관객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범죄를 재구성할 수 있을까? 라우는 현실을 계속 반복한다. 이 사건은 한 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다. 관객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실’이라는 것의 공격을 받아야 한다. 라우는 동료들과 함께 폭력적인 사건들을 어떻게 제대로 무대에 재현할 수 있을까를 자주 고민한다.
“연극을 아무리 사실적으로 올린다고 해도 얼마나 사실처럼 묘사할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연극? 그것이 어느 정도로 하면 연극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을까?”
이번 무대는 라우와 그의 동료들이 오랫동안 고민하는 “예술의 가장 오래된 형식”에 관한 연구의 과정이다.

진실을 위해 싸워야 하는 이유
‘반복 – 연극의 역사’는 라우의 다른 연극들과 비교하면 논란이 적었던 작품이다. 라우의 대표작들은 실제 사건에 더 과감하게 진입한다. 자료를 무대에서 보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인물을 무대에 출연시키고, 배우들은 체험한 몸 그대로를 무대에 옮긴다.
라우의 대표적인 문제작 ‘콩고 재판소’(2015)는 1994년 600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콩고 전쟁을 재판한다. 라우는 이 전쟁이 세계화 시대의 점유율을 결정짓는 경제 전쟁 중 하나라는 점에 주시해 전쟁의 원인과 배경을 고발하는 대형 트랜스 미디어 프로젝트를 시행한다. 연극과 영화 외에도 책·다큐멘터리 게임·아카이브가 있는 웹 사이트·심포지엄 투어로 동부 콩고에서 발생하는 무법을 비난한다.
라우는 베를린 극장에 실제 관계자들 및 변호사 등을 소환해 이들을 배우로 등장시켜 재판에 참여하게 했다. 라우의 미디어 활용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베를린 샤우뷔네와 기획한 프로젝트 ‘총회(General Assembly)’(2017)로 이어진다. 정치인과 사회운동가를 포함한 60명의 대표단을 결성해 라우는 시뮬레이션 총회를 개최했다. 여기에는 현직 의원부터 NGO 단체, 각 정치 그룹의 대표들이 참가해 자신이 속한 단체의 목소리를 냈다. 이 행사는 파리·함부르크·브뤼셀·겐트·뮌헨의 극장에서 동시에 생중계됐다. 라우는 글로벌 민주주의를 조직하기 위해 세계 정치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
또한 그는 유럽의 NGO 원조 산업이 아프리카나 중동의 국가구조 파괴로부터 이익을 얻는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이를 고발하기 위해 배우들과 현지로 떠났다. 연극 ‘연민-기관총의 역사’(2016)에서는 실제 난민 출신 배우와 현지에 체류했던 여배우가 직접 등장한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백인 여배우가 관객에게 기관총을 겨누며 “이야기(역사)의 끝은 기관총을 누가 가졌는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라우가 덧붙인다. “수 세기 식민 통치와 신식 민주주의, 제국주의, 신제국 주의를 거치며 우리의 삶을 손에 쥘 수 없었다. 이것이 진실과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하는 이유다.”  글 서지영(연극평론가) 사진 LG아트센터

‘반복 – 연극의 역사’  4월 1~3일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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