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오페라 발레 수석무용수 박세은 – 춤으로 딴 파리 하늘의 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9월 20일 9:00 오전

“COVER STORY – 발레리나 박세은”

파리 오페라 발레 수석무용수 박세은

춤으로 딴 파리 하늘의 별

7월의 파리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어린 무용수들의 열정으로 뜨겁다. 파리 오페라 발레의 입단 오디션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중엔 22세의 박세은도 있었다. 당시 오디션에 응시한 여자무용수만 111명. 1등만 정단원으로 선발되는 이 오디션에서 박세은은 3등을 했다. 실망했을까? 아니! 곧장 가르니에 극장 옆 부티크로 달려가 DVD를 왕창 샀다. 가게 문을 나서면서 ‘내년 오디션 또 봐야지’ 다짐했다는 이 발레리나는 10년 뒤, 파리 오페라 발레의 에투알이 된다
글 박서정 기자  사진 강태욱(Workroom K, 55·57·60쪽)
의상 협찬 라실루엣드유제니(La Silhouette de Eugenny)  헤어·메이크업 협찬 까라디(Caradi)

Part 1    발레리나 박세은 인터뷰 _박서정
Part 2   ‘로미오와 줄리엣’ 현장 관람기 _배윤미
Part 3  에투알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_장인주

PART1 INTERVIEW

별 잘 보이는 곳

이름 참 잘 지었다. 파리 오페라 발레(이하 BONP)에서 수석무용수를 일컫는 ‘에투알(Étoile)’ 말이다. 프랑스어로 ‘별’이라는 말뜻처럼, 스스로 빛나는 에투알은 발레단 가장 높은 곳에서 반짝인다. 현재 150여 명 단원 중 에투알은 남녀 무용수를 합쳐 단 16명. 별자리 이야기처럼, 사연 하나 없이 이 자리에 오른 에투알도 없다. 에투알이 되면 출연작품을 논의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고, 개인 탈의실과 전담 어시스턴트가 제공되는 등 발레단에서도 특급 대우를 받는다. 주변이 어두울수록 별은 잘 보이는 법이다. 혹독한 겨울일수록 좋다. 차가운 밤하늘에 별빛은 더욱 선명하다. 군무를 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던 준단원 시절. 박세은에게 에투알은 더욱 밝고, 더욱 크게 보였다. “감히 바라볼 수 없어서” 무대 아래서 올려다보던 존재. BONP에서 춤추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국내외 유수 발레단의 솔리스트 입단 제의를 뒤로하고 프랑스행을 결정한 때였다.
박세은 그가 주역으로 선 ‘로미오와 줄리엣’(6.10~7.10/바스티유 오페라) 개막공연 커튼콜에서 에투알로 지명됐다. 352년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인 에투알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BONP는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발레단 같은 프랑스의 공공기관이다. 외국인 단원 비율은 5%로 제한되고, 이르면 8세부터 정통 프랑스 발레를 익힌 파리 오페라 발레 학교 졸업생이 단원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박세은은 2011년 한국인 발레리나 최초로 BONP에 입단해 10년 만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발레단 여름휴가 기간 한국을 찾은 박세은과 만났다. 새 에투알을 향한 관심은 국내에서도 뜨거웠다. “딱 50분 인터뷰하고, 끝나면 바로 또 인터뷰했어요.” “50분 인터뷰면, 10분은 쉬고요?” “10분은 이동!” 수십 번의 인터뷰에 지칠 법도 한데, 박세은의 높고 빠른 목소리가 기분 좋게 들린다. 부지런히 도착한 그는 사진 촬영을 위해 이제 막 메이크업 의자에 앉은 참이다. 최초라는 수식어에 만족하지 않고, “프랑스 발레계에서도 가장 큰 별”이 되겠다는 새로운 에투알, 발레리나 박세은의 이야기다.
먼저, 에투알이 된 걸 축하해요! 요즘 언론 인터뷰 일정이 워낙 빽빽해서 겨우 시간을 맞췄어요.
이렇게까지 관심받을 줄은 저도 몰랐어요. 이제 한국에서도 발레의 인기가 높아진 게 실감이 나요. 사실 저는 세간의 관심을 즐기는 편은 아니에요. 제 기사를 잘 찾아보지도 않고요. 단지 ‘발레 대중화’ 이것 딱 하나 때문에 인터뷰에 나서요. 사람들이 국립발레단은 잘 몰라도, 강수진 단장님은 다 알잖아요. 그런 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제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이 이 세계를 알았으면 좋겠어요.
소속사 대표가 “부기가 빠져야 선이 예쁘게 나온다”라고 언질을 주더라고요. 일부러 촬영 시간을 오후로 잡았는데, 스트레칭할 시간은 좀 있었나요?
간단한 스트레칭 정도? 대신 많이 잤어요(웃음). 촬영 전에 10분만 줄 수 있나요? 몸을 좀 풀고 시작하면 좋겠는데.
그럼요. 발레리나라는 직업상 메이크업 받는 건 익숙하겠어요. 아무래도 무대용 분장과 일반적인 화장은 다르죠?
춤추면서 땀을 워낙 많이 흘리니까 파우더를 아주 두껍게 발라요. 겉보기엔 뽀송뽀송해도 피부가 건조해질 정도죠. 멀리 떨어진 객석까지 잘 보이게 색조 화장은 라인을 강조해요. 속눈썹을 길게 붙이고, 얼굴 윤곽에 컨투어링도 강하게 주죠.
벌써 10년 전이에요. 지금은 윤서후, 강호현 등 후배들이 같은 발레단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2011년 입단 당시만 해도 발레리나로는 한국인 최초였어요. 
그땐 정말 아무 정보도 없었어요. 몇 명을 뽑는지, 어떻게 선발이 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입단 오디션을 봤어요. 그렇게까지 도전하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었어요.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제 의지로 뭔가를 선택한 순간이 별로 없었거든요. 주어진 길을 걷다 보면 항상 기회가 오고, 큰 고민이나 갈등 없이 받아들였죠. 그런 제게 파리 오페라 발레는 도전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킨 곳이에요.
자국의 프랑스인 무용수가 95% 이상인 발레단이에요. 대부분이 발레단 부속 학교 출신이고요. 같은 오디션에서 1등을 해서 정단원으로 선발된 무용수도 파리 오페라 발레 학교 졸업생이었죠.
그래서 저 3등하고도 엄청 기뻤어요. 가르니에 극장 옆에 부티크가 있는데, 그곳에서 DVD를 한아름 사고 나오면서 ‘내년에 다시 시험 보러 와야겠다’고 다짐했죠. 이곳이 나의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다행히 다음날 준단원으로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요.
당시 발레단에는 유색인종이 드물었을 텐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메이크업만 해도 백인 외모에 맞춰져 있었을 테고요. 왜, 백인을 기준 삼아 촬영한 할리우드 영화에서 다른 인종이 화면에 나오면 실물보다 어색해 보이는 문제가 발생하잖아요.
실제로 발레단에 동양인은 저뿐이었어요. 서양인과 똑같이 화장해주는데, 같은 모양으로 아이라인을 그려도 제 눈매에는 더 날카로워 보이는 거예요. 저들처럼 내 눈이 좀 더 컸으면, 이목구비가 더 입체적이었으면 하고 부러워하기도 했죠. 지금은 8~9명 정도 되는 극장 메이크업 팀 중에 제가 찾아가는 선생님이 따로 있어요. 제 취향을 잘 알고 저에게 맞는 화장을 해줘요. 물론 준단원 때는 그럴 겨를이 없죠. 프르미에 당쇠즈부터 우선권이 주어져요. 캐스팅이 확정되면 먼저 메이크업 일정을 잡을 수 있어요. 아니면 가끔은 직접 화장하기도 해요. 우리 극장이 워낙 커서 메이크업 받으러 내려가기 귀찮을 때라든지(웃음).(가르니에 극장 규모는 11,000m2에 달한다) 특히 에투알은 본인에게 맞는 화장을 직접 하는 편이에요. 아주 정교할 필요는 없어서 의외로 하기 쉽답니다. 대신, 헤어는 반드시 전문 팀에게 맡겨야 해요. 작품별로 해야 하는 스타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인데요, 예전 공연 사진을 찾아보면서 고증하듯이 따라하죠.
BONP의 공연 사진을 보면 감탄스러울 때가 많아요. 무대의상에 그만큼 공을 들이는 발레단이 또 있을까 싶어요. 다큐멘터리 ‘라 당스’(2009)에서 보니 그 화려한 무대의상을 한 땀 한 땀 다 바느질해서 만들더군요.
제가 발레를 시작한 이유도 ‘예뻐서’예요. 열 살 때 국립발레단 ‘호두까기 인형’을 보러 갔는데 반짝반짝한 의상이 참 예뻐 보였죠. 그길로 국립발레단 문화학교(현 국립발레단 부설 발레아카데미)에 들어갔어요. 김지영·김주원·김용걸·이원국, 국립발레단의 간판스타 넷이 있던 시절이에요. 공연이 끝나면 말 그대로 ‘팬사인회’가 열렸는데, 매일 문화학교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서 사인을 받곤 했죠.
스무 살 넘어서까지 한국에 살다가 BONP에 입단하면서 프랑스로 거주지를 옮겼잖아요. 특히 파리는 예술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한국과는 다른, 프랑스의 미의식에 놀란 적 있나요?
한번은 프랑스에서 프로필 사진을 촬영하는데, 이마 위 흉터(박세은은 2016년 아네 테레사 더 케이르스마커르 안무의 버르토크 현악 4중주 4번에 맞춰 4인무를 연습하다가 동료의 뒷발에 차여 상처를 입었다)를 포토샵으로 지워달라고 했더니, 사진가가 “왜? 진짜 멋있는데 그냥 놔두면 안 돼?” 하는 거예요. 프랑스 사람들은 주름도, 흉터도 그냥 있는 그대로 둬요. 화장도 거의 안 해요. 눈 밑에 다크서클조차 가릴 생각을 안 하죠. 왜 저렇게 안 꾸미나 싶을 수도 있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예뻐 보이는 걸 중시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희가 아는 게 더 중요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큰 거죠. 특별히 꾸며내지 않아도 풍겨 나오는 본연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프랑스 사람들이 성향이 그래서 프랑스 춤도 그런가 봐요.
그래서, 사진 속 흉터는 그대로 두었나요?
당연히 지웠죠! 저는 한국인이니까요(웃음).

스튜디오로 이동하는 차량에서 박세은은 익숙한 손길로 머리 매무새를 다듬는다. “발레리나 머리는 발레리나가 제일 잘 만지거든요. 이게 묶는 각도가 딱 있어요.” 큼지막한 가방에서 꺼낸 분홍색 틴 케이스에는 머리를 단단히 고정하는 데 쓰는 실핀과 실망이 가득 들어있다. 단정히 머리를 묶어 넘기고 검은색 연습복을 입은 박세은이 카메라 앞에 선다. 잘 발달한 근육은 흡사 체조 선수 몸처럼 보인다. 인생의 3분의 2를 발레리나로 살아온 사람의 몸이 그 자체로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발레리나 태’라는 게 있다. 예술의전당에 발레 공연을 보러온 많은 관객 중에서 발레리나 지망생은 어렵지 않게 구분해낼 수 있다. 작은 두상에 마르고 긴 체형 때문만은 아니다. 운동화를 신고도 팔자걸음으로 걷는 모양새가 그렇다. 특유의 걸음걸이는 발레 기본자세인 ‘턴 아웃’이 굳어진 탓이다. 신체 구조상 불편한 자세를 습관화한 이유는 단순명확하다. 그래야 다리를 더 높이, 더 넓게 올려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이다.
넓은 골반, 긴 팔다리, 키에 비해 큰 손발. 타고난 신체 조건이 유달리 좋다는 박세은이지만, 발레의 또 다른 필요조건인 유연성만큼은 철저한 노력의 결과다. 스스로 “손가락도 잘 휘지 않고 무릎, 골반, 발등 등 관절이란 관절은 다 뻣뻣해요”라고 말한다. 본격적으로 발레를 시작한 중학교 시절, 유연한 아이들처럼 다리를 높이 들고 싶어서 대신 골반 힘을 길렀다. 잠도 다리를 들고 잘 정도로 연습 또 연습. 촬영 중간, 박세은이 “토슈즈를 벗어도 되나요?”라고 묻는다. 발이 불편하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자꾸 발끝으로 서야 할 것 같아서요.” 한마디로 발레에 인이 박인 몸이다.

장장 3시간의 결과물입니다. 사진이 아주 잘 나왔네요.
다행이에요. 사진 찍는 건 어색해요. 사진작가가 표정 연기를 주문할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서요. 춤추는 사람은 얼굴이 아닌, 몸으로 연기하거든요. 감정을 잡을 때는 몸에서부터 출발해서 맨 마지막에 얼굴로 가요. 저도 이번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하면서 알았어요. 슬픈 표정부터 지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어떻게 20년 발레하면서 이제야 알았을까요!
줄리엣 역을 맡았던 이번 누레예프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BONP가 오랜만에 대면으로 진행한 공연이었죠.
코로나 이전엔 발레단 연금 파업 이슈 때문에 1년 반 정도 대면 공연을 못했어요. 극장이 문을 닫았던 초반에는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뜻밖의 휴식처럼 느껴졌죠.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면서 공연하느라 신혼여행도 못 갈 정도로 바빴거든요. 또 저는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공연을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지젤’을 하다가 인대가 끊어졌는데 병원에 가보니 6주 정도 쉬어야 한다고 했어요. 승급을 향해 달려가야 할 시기에 찾아온 부상에 마음을 내려놓고 있던 차에 코로나가 시작된 거죠. 조금은 마음 편히 쉴 수 있었어요. 그런데 록다운 기간이 길어질수록 우울하고 몸도 무거워지더라고요. 단원들이 공연이 없더라도 극장에서 연습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매주 월요일마다 테스트를 받는 조건이었지만 훨씬 낫더라고요.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뒤퐁 감독님은 “오랜만에 3막 전막 공연을 하면 무리가 될 수 있다”면서, 연습 기간을 길게 잡았어요. 보통은 3주 정도인데, 이번엔 두 달여간 연습이 이뤄졌죠. 감독님께서 연습실에 자주 나오셔서 코치도 해주셨고요. 우리의 최고 에투알 출신 답게, 보는 안목이 뛰어나고 가르치기도 잘 가르쳐주세요.
개막공연은 ‘로미오와 줄리엣’ 전막 데뷔 무대이기도 했죠. 부담감이 상당했을 것 같아요.
그동안 예쁜 작품, 아니면 발란신처럼 감정이 없는 네오클래식만 추다가 오랜만에 드라마 발레 주인공을 맡았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온갖 감정으로 들끓는 작품이에요. 게다가 줄리엣이 정말, 한 ‘성깔’하는 애거든요. 유모에게 옷을 집어던지면서 나가라고 하고, 피를 토할 정도로 분노를 표출하고. 그런 감정으로 두 달 넘게 사니까 사람이 피폐해지더라고요. 살이 저절로 빠지더니 앙상하게 뼈만 남았어요. 발레 동작은 근육을 길게 쓰는데, 항상 긴장하고 있으니 근육도 거칠어지고요. 그전에는 공연할수록 조금씩 발전하는 게 느껴지니까 끝나는 게 아쉬웠거든요? 그런데 이번 작품은 공연 마지막 날 끝나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 평론가가 ‘말괄량이 줄리엣’이라고 묘사했던데, 줄리엣 캐릭터에 대한 해석을 들어보니 그 이유를 알겠네요. 이 무대에서 에투알 지명이 이뤄질 거라고 예상했나요?
이제 와 말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정황이 여럿 있긴 했어요. 제일 중요한 개막공연에 프르미에 당쇠즈였던 제가 선 것부터 그랬죠. 뒤퐁 감독이 오고 나서는 에투알만 개막공연 무대에 올랐으니까요. 개막일을 불과 5~6일 앞두고, 첫 공연에 캐스팅된 남자무용수가 다치는 사고가 있었어요. 모두 남자무용수만 바뀔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걸 깨고 뒤퐁 감독이 저희 커플을 캐스팅한 거예요. 직접 저를 사무실로 불러서 캐스팅 소식을 알려주기까지 했죠. 프르미에 당쇠즈 때만 해도 감독님과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어요. 동료들이 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눈빛으로 ‘봤냐, 너 에투알이다’ 장난을 치기도 했어요(웃음). 공연 당일에는 뒤퐁 감독님께서 전통적으로 에투알만 받는 꽃다발과 함께 편지를 보내주셨죠.
2016년 감독으로 취임한 오렐리 뒤퐁(1973~)은 “파리 오페라 발레의 리더로서 다양한 재능과 다른 문화에 문호를 개방하겠다”라며 당신을 모범사례로 꼽았어요. 파리 오페라 발레 학교에 입학한 연도로 따지자면, 40년 가까이 프랑스 발레를 체득한 뒤퐁에게 인정받은 기분이 어땠나요?
뒤퐁은 제가 이 발레단을 꿈꾸게 된 이유예요. 학창 시절 유튜브에서 그의 춤을 보고 카리스마에 완전히 매료됐어요. 출연작을 찾아보면서 이제껏 내가 배운 춤 스타일과 다르다는 걸 느꼈죠. 차분하고 정적이었어요. 에투알로 승급된 다음 날, 면담 자리에 사진 한 장을 가져갔어요. 제가 준단원 시절 에투알이던 뒤퐁이 출연한 ‘오네긴’을 보러 가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죠. 사진 속 저는 책을 한 손에 들고 있는데요, 무대에 오를 기회가 없으니 작품 공부라도 하려고 샀던 ‘오네긴’의 원작 소설이에요. 감독님께서 그 사진을 아주 유심히 보셨어요.
한국의 발레 교수법은 러시아 바가노바 메소드를 기본으로 하죠. 러시아 발레와 프랑스 발레 사이에서 자신의 선호를 발견한 건 언제인가요?
한국에서 발레를 배우면서도 사실 내 안의 욕구는 이쪽이 아니란 건 어려서부터 알았어요. 춤에 대한 관점이 달라서 선생님들이 저를 가르치기 힘들어하셨던 것 같기도 해요. 물론 그분들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죠. 러시아 발레에 대한 존경심은 지금도 여전해요. 옛 러시아 무용수들 자료도 자주 찾아보고요. 그런데 BONP에서 춤추고 배울 때 진정 자유로움을 느껴요. ‘그래, 이게 예술이지!’ 내가 혼자 생각하던 것이 일치되는 느낌이 들어요. 여기서는 무용수 각각이 다 다른 춤을 춰요. 자기 색깔, 자기 예술 철학이 다 달라요. 희망을 봤던 것 같아요, 여기서 춤출 때 나만의 색깔을 내도 되겠구나.
그럼 프랑스 발레의 특징을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발레 용어가 프랑스어일 만큼 프랑스는 발레의 중심지이지만, 한국 관객에게 더 익숙한 쪽은 러시아 발레에요. BONP는 1993년 첫 내한 공연(2.18~20/세종문화회관) 이후 우리나라를 찾은 적이 없기도 하고요.
춤이라서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워요. 흔히들 프랑스 춤은 서정적이고 우아하다고 하지만, 러시아 춤이라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거든요. ‘춤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라는 말에 공감해요. 그래도 스타일을 나눠보자면, 러시아 발레는 에너지를 뿜어내듯이 춘다면, 반대로 프랑스 발레는 객석의 에너지를 흡수해서 간직하는 느낌? 아! 이건 정말 직접 보고 느끼는 수밖에 없어요. 파리 오페라 발레 갈라 공연으로 한국에 꼭 오고 싶은 이유예요. 내년 여름쯤으로 생각 중입니다.
한국에서 프랑스 발레의 정수를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앞서 덤덤히 말하긴 했지만, 입단 후 프랑스 춤의 문법을 새로 익히느라 몸고생,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콩쿠르에서 강점으로 작용했던 ‘뛰어난 테크닉’은 ‘감정 표현이 부족하다’라는 우려로 돌아오기도 했고요.
어쨌든 테크닉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발레단 승급 시험에서도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니까요. 시험에서는 1~2분, 짧을 땐 50초짜리 작품으로 평가받아요.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예술성을 어떻게 100% 선보이겠어요? 그러니 무용수로서는 테크닉이라도 확실히 입증하는 수밖에 없어요. 시험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춤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곳이에요.
철저한 실력주의에 기반한 BONP의 승급 시험은 다른 발레단과 구분되는 독특한 체제이자 전통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치러지나요?
승급 시험은 1년에 한 번 열려요. 시험 과목은 자유작과 지정작 하나씩이고, 지정작은 한 달 전에 발표하죠. 일반적인 콩쿠르와 다를 건 없지만, 정신적으로 훨씬 지치는 일이에요. 함께 연습하고 준비한 동료들이 경쟁 상대가 되니까요. 내 춤을 자꾸 다른 무용수와 비교하게 되고, 자신감도 낮아져요. 매년 젊은 무용수들은 치고 올라오지, 공연 준비도 함께해야 하지, 나이가 들수록 더욱더 버겁더라고요. 프르미에 당쇠즈 승급 시험에 통과했을 땐, 이제 정말 더는 못하겠다 싶을 만큼 힘들었어요.
쉬제에서 프르미에 당쇠즈로 승급했던 2016년 무렵 말인가요?
맞아요. 쉬제는 우리 발레단에서 군무도 하고, 솔리스트도 하는 중간 위치에요.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예로 들면, 주역인 ‘오로라’를 맡은 쉬제가 요정들의 군무도 추고, 고양이 춤도 추는 거죠. 제일 춤을 많이 출 때에요. 저는 프르미에 당쇠즈 승급 시험을 본 날 오후에 세 역할(군무·솔리스트·주역)을 맡은 작품의 리허설을 하고, 저녁 공연을 했어요. 그 당시에는 힘들단 생각보다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더 강했던 것 같아요. ‘꾸역꾸역’했다는 표현이 맞아요.
다큐멘터리 ‘라 당스’를 보면, 한 무용수가 주어진 배역이 너무 많다며 르페브르 전 감독을 찾아가 협상하는 장면이 나와요. “나는 언제까지고 25세가 아니다. 몸 관리를 해야 한다”라면서요. BONP는 단원의 복지를 위한 노조가 힘도 있잖아요. 너무 힘들면 출연을 거절할 법도 한데….
만약 거절했다면 다음 기회가 안 오겠죠. BONP는 150명의 무용수가 있는 큰 조직이고, 그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은 나 말고도 많아요.
정기적으로 열리는 여타 승급 시험과 달리, 에투알은 빈자리가 나면 그 자리를 채울 무용수를 임명하는 방식이에요. 발레단 예술감독과 이사회가 내부적으로 논의를 거쳐 결정하죠. 에투알을 발탁하는 데 어떤 자질을 중시하나요?
보통 어떤 무용수가 언더스터디(메인 출연자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대신 투입되는 출연자)를 얼마나 잘 해내는지 보는데요, 이 점이 에투알 심사 과정에도 반영되는 것 같아요. 갑자기 투입되어도 무대를 완벽히 해내는 것, 그게 진짜 실력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3일 만에 ‘백조의 호수’ 전막 주역을 한 적도 있었어요. 준비된 상태로 무대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했지만, 저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좋은 신호니까 불평할 수도 없었어요. 이 악물고 해내는 거죠.
발레단 내 분위기는 어떤가요?
승급 시험이 있기 한 달 전부터 긴장감이 감돌긴 하지만, 그렇게 경쟁적인 분위기는 아니에요. 프랑스 사람들이 콧대 높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다들 친절하고 예의 발라요. 단원끼리 나이 차와 상관없이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고요.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파리 오페라 발레 학교 출신들은 8세부터 발레단 정년인 42세까지 30년 가까이 같이 생활하는 거거든요. 한마디로 가족 같은 분위기예요.
가장 많이 호흡을 맞춘 파트너는 누구인가요?
이번에 로미오로 함께한 에투알 폴 마르케와 둘 다 프르미에 당쇠르(당쇠즈)였던 2~3년 전부터 언더스터디 상대역으로 자주 만났어요.
에투알로 지명되고 나서, 인사하고 눈물을 쏟으며 돌아오는 당신을 마르케가 ‘조금 더 누리라’는 듯, 다시 객석을 향해 힘껏 미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를 포함해 많은 동료가 박수와 환호로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니, 정말 10년 만에 완연한 일원이 되었구나 싶더라고요. 앞으로 정년까지 딱 10년 남았는데, 계획을 좀 세워뒀나요?
10년 안에 에투알로서 춤도 많이 추고 싶고, 출산 계획도 세우고 싶어요. 발레라는 예술이 활동 시기가 짧아서 참 아쉬워요. 음악처럼 아들이 결혼할 때까지, 90세까지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꼭 춤을 추지 않더라도 제가 발레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을 테니 그렇게 슬프진 않아요.
BONP는 고전 발레부터 모던 발레까지 방대한 레퍼토리를 갖춘 것으로 유명하죠. 스스로는 고전 발레를 선호하지만, 많은 현대무용가가 탐내는 무용수라고 들었어요.
고전 발레와 모던 발레를 모두 출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축복이죠. 과거에는 발레단 감독의 판단하에 무용수를 장르에 따라 나누기도 했으니까요. 한때 모던 발레만 춰야 했을 땐 힘들었는데, 지금은 서로 보완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고전 발레는 연습한 대로 똑같이 추려고 하지만, 모던 발레에서는 그날그날 느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추는 걸 시도해보고 있어요. 모던 발레는 다양한 음악을 사용하니, 내 안의 고정관념도 조금씩 사라지는 느낌이고요.
에투알에겐 출연하고 싶은 작품을 논의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집니다. 특별히 하고 싶은 작품이나 역할이 있나요?
제가 진짜로 하고 싶은 건 제게 주어지는 모든 작품을 다 해보는 거예요. 예전엔 했던 작품을 더 잘하고 싶었는데, 언제부턴가 바뀌었어요. 갈수록 새로운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요. 춤이란 춤은 다 좋아요. 모든 춤에 배움이 있고, 모든 안무가와의 시간이 의미 있어요. 그렇게 지루할 틈 없이 춤추고 싶어요.

이달 박세은은 파리 오페라 발레 에투알로 첫 시즌을 맞는다. 첫 행보는 9월 24일 열리는 ‘데필레(défilé)’다. 30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시즌 개막 행사로, 파리 오페라 발레 학교의 학생부터 최고 등급인 에투알까지 200여 명의 무용수가 화려하게 행진한다. 박세은은 맞춤 제작된 왕관을 쓰고 갈라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더는 내 춤을 증명하지 않아도 돼서 해방감을 느낀다”면서도, “예술의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긴장을 놓치지 않겠다”는 박세은. 한국에 프랑스 발레를 널리 알리는 데도 앞장서고 싶다고 의지를 표했다. 서울과 파리의 시차는 8시간. 그 어느 곳에서도 지지 않을 별이 이제 막 떠올랐다.
글 박서정 기자 사진 강태욱(Workroom K)·파리 오페라 발레

파리 오페라 발레 등급 체계
에투알 수석무용수
프르미에 당쇠르/당쇠즈 제1무용수
쉬제 솔리스트
코리페 군무 리더
카드리유 군무 단원
준단원

파리 오페라 발레의 상징  루돌프 누레예프는  누구인가?
“누레예프는 파리 오페라 발레의 가장 큰 자산이자 심장” 박세은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BONP는 누레예프의 안무작을 보전하기 위해 꾸준히 무대에 올리고 있다. 1980년대 중반 BONP 예술감독을 지낸 루돌프 누레예프(1938~1993)는 러시아 출신의 무용수 겸 안무가이다. 바이칼 호수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민속무용을 익혔다. 1955년 바가노바 아카데미에 입학, 1958년부터 키로프 발레의 솔리스트로 활약하던 중, 1961년 발레단의 파리 공연 때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 후 미국과 영국에서 활동하다가, 로열 발레에서 마고트 폰테인의 상대역으로 명성을 떨쳤다. 무용수로서 그의 주특기는 빠른 발동작과 화려한 테크닉.
안무가로서의 역량도 뛰어났다. 1983년부터 1989년까지 BONP 예술감독으로 재임한 6년 동안 발레단의 레퍼토리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안무작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마리우스 프티파의 고전 발레를 일정한 틀에 입각하여 약간의 변형을 가한 것과 ‘신데렐라’처럼 완전히 새로운 안무를 한 것으로 대별할 수 있다. 한 세기를 풍미했던 무용수인 만큼, 누레예프 버전은 테크닉이 복잡하고 어렵기로도 유명하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라 바야데르’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등 러시아 고전 발레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해 서유럽에 알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교한 발동작, 남성 무용수의 비중 격상, 호사스러운 무대와 의상을 곁들였다.
누레예프는 새로운 발레단과 작업할 때마다 자신의 이전 버전을 수정하는 습관이 있었다. ‘호두까기인형’을 예로 들면, 1967년 스웨덴 왕립 발레를 시작으로 1968년 로열 발레, 1969년 라 스칼라 발레, 1979년 베를린 오페라 발레, 1985년 파리 오페라 발레 프로덕션으로 계속 진화했다. 한국인 최초로 BONP에 입단해 지금은 안무가로 활동하는 김용걸은 “누레예프는 클래식 발레의 동작이 백개이던 시절에 만 개라는 걸 증명해 보인 사람”이라며 존경을 표했다.

파리 오페라 발레 영상물 BEST 3

① 로미오와 줄리엣
프로코피예프(작곡)/루돌프 누레예프(안무)/모니크 루디에르(줄리엣)/마뉘엘 르그리(로미오)/찰스 주드(티발트)/리오넬 들라노에(머큐시오)/윌프리드 로몰리(벤볼리오)/벨로 판(지휘)/파리 오페라 발레 & 오케스트라 외
Warner Classics 0630151542 (Blu-Ray, NTSC 16:9, Dolby Digital 5.1 Surround, 150분)
1995년 바스티유 오페라 공연 실황 영상이다. 1965년 로열 발레에서 맥밀런의 버전으로 마고트 폰테인과 함께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누레예프는 1977년과 1984년 자신만의 안무를 통해 더욱 현대적이고 세련된 색채와 정서를 불어넣은 바 있다. 화려함과 폭력, 격렬함과 아름다움이 어우러져 셰익스피어의 원작은 더욱 극적으로 그려진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영감을 받은 에지오 프리제리오와 마우로 파가노의 화려한 세트와 의상은 관객을 베로나로 이동시킨다. 마뉘엘 르그리(로미오)와 모니크 루디에르(줄리엣)의 폭발하는 젊음과 싱싱한 낭만이 포착된는 공연으로서 이 작품에 관한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권위를 자랑한다.

②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차이콥스키(작곡)/루돌프 누레예프(안무)/오렐리 뒤퐁(오로라 공주)/마뉘엘 르그리(데자이어 왕자)/뱅상 코르디에(프로레이스탄 왕)/나탈리 케르네(여왕)/데이비드 콜먼(지휘)/파리 오페라 발레 & 오케스트라 외
Warner Classics 0685738580224 (DVD, NTSC 16:9, Dolby Digital 2.0 Stereo, 148분)
1999년 바스티유 오페라 공연 실황 영상이다. 고전적 안무에 수많은 변형이 가해지는 것이 20세기 발레의 역사이지만 이 작품만은 ‘프티파에 대한 경의’로 인정되어 거의 원형을 손대지 않은 채 남아있으며 ‘발레 중의 발레’로 불린다. 누레예프의 개정 안무도 마리우스 프티파의 원형을 크게 손대지는 않았다. 다만 데자이어 왕자의 비중을 크게 강화하고 디베르티스망 장면을 정비하여 2막과 3막에 상당한 수정을 가했다. 이에 따라 음악의 순서도 일부 바꾸었다. 데자이어 왕자역의 마뉘엘 르그리는 누레예프가 직접 에투알로 발탁한 애제자였다. 이 밖에 악마 카라보스를 여성 무용수에게 맡긴 점이라든지 라일락 요정의 역할을 두 발레리나에게 나누어 부여한 점도 특이하다.

③ 라 바야데르
밍쿠스(작곡)/루돌프 누레예프(안무)/이자벨 게랭(니키아)/로랑 힐라일(솔로르)/엘리자베스 플라텔(감자티)/미셸 퀴발(지휘)/파리 오페라 발레/콜론 오케스트라 외
Warner Classics 4509968512 (DVD, PAL 4:3, HiFi Sound, 134분)
누레예프 사망 1년 후 오리지널 캐스팅으로 1994년 공연되었던 파리 오페라 발레의 공연 실황이다. ‘라 바야데르’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키로프 발레의 전유물이었다. 누레예프는 예술감독으로 자신의 마지막 인생을 불살랐던 파리 오페라 발레를 위해 중병에 걸린 몸으로 ‘라 바야데르’의 전막을 개정 안무했다. 누레예프는 자신의 마지막 작업을 위해 밍쿠스의 오리지널 악보 사본을 러시아에서 구해왔다. 발레 음악의 대가 존 랭크버리와 함께 철저하게 악보를 분석하고 새롭게 복원하여 이를 안무에 반영했다. 누레예프의 버전은 오리지널 버전과 2, 3막의 구성에서 차이가 나는데, 화려한 무대 구성이 특히 돋보인다. 이 새로운 프로덕션은 1992년 가을에 초연되었으며 그로부터 3개월도 안 되어 누레예프는 세상을 떠났다. 본 영상물은 초연 당시 멤버인 이자벨 게랭(니키아), 로랑 힐라일(솔로르), 엘리자베트 플라텔(감자티)이 출연해 실력은 물론이고 ‘망령의 왕국’에서 발레 미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최상의 자료이다.

PART2 REVIEW

박세은이 출연한 ‘로미오와 줄리엣’ 현장관람기 파리 오페라 발레는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6.10~7.10)을 공연했다. 1977년 루돌프 누레예프의 연출과 안무로 초연된 작품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2020년 에투알로 선정된 폴 마르케와 올해 에투알로 선정된 박세은이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각각 분해 큰 주목을 받았다.

이번 프로덕션에서 11명의 에투알이 돌아가며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캐풀렛 부인과 티볼트로 분했다. 6월 10일 개막공연엔 박세은이 줄리엣으로 분했다. 공연 후 커튼콜 중 갑자기 파리 오페라 극장장 알렉상더 니프와 발레단 예술감독 오렐리 뒤퐁이 등장했다. 그리고 니프는 “우리는 엄청난 재능을 보여준 이 환상적인 발레리나의 퍼포먼스를 감격스럽게 지켜보있다. (…) 오렐리 뒤퐁의 제안에 따라 나는 아주 큰 기쁨으로 마드모아젤 박세은을 에투알로 명명한다”라고 성명을 밝혔다.

쏟아지는 갈채 가운데 놀란 박세은은 눈물과 감동으로 뒤퐁의 품에 몸을 던졌다가 청중과 발레단을 향해 답례했다. 외국인으로서 에투알이란 최고의 경지에 이른 무용수들은 몇 안 된다. 이 점에서 프랑스 유서 깊은 언론과 무용 전문지는 저마다 이 한국 발레리나의 에투알 승급을 대서특필했다. 사실 그녀의 에투알 승급은 몇 년 전 그가 프르미에 당쇠르(제1무용수)로 임명되면서부터 자명하게 예상하던 바였다.

연기할 줄 아는 발레리나

박세은은 에투알로 명명된 후 줄리엣 역으로 후반기 공연에도 합류했다(6.16·19·23). 그중 6월 23일 공연을 지켜보았다. 과거에 본 박세은의 퍼포먼스는 강건한 테크닉과 우아함이 공존해 인상적이었다. 이번 줄리엣 역은 모든 것이 칸타빌레처럼 흐르는 유동성이 무척 놀라웠다. 이는 솔로뿐만 아니라 파트너와 함께하는 동선들 가운데서도 유독 눈부셨다. 이 점에서 현지 언론은 찬사 일색이었다. 로미오 역의 폴 마르케가 긴장해서인지 약간 경직되고 내적인 감정을 표출하지 못했다면, 박세은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순수한 처녀에서 사랑을 통해 만개하는 줄리엣을 민감한 뉘앙스로 연기해냈다. 특히 사랑을 잃어버린 절망 때문에 자살하는 비극의 여주인공까지 분해내는 데 성공했다.”

“스펙터클을 선사했다. 놀랍도록 비상하는 동선부터 자로 잰 듯 정밀한 테크닉과 충만한 유동성의 우아함이 그렇다.”

사실, 누레예프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발레 사상 가장 어려운 작품이다. 폴 마르케는 “1막 중반에서 벌써 신체적 한계가 온다. 그러나 이를 초월하고 끝까지 가면 정신이 명료해지는 마술적 순간에 도달한다”라고 말했다. 누레예프의 안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동선에서 다른 동선으로 연결되게 고안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세은을 향한 찬사는 단지 그녀의 발레 퍼포먼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폴 마르케는 이 작품처럼 상반되는 감정, 즉 첫눈에 반한다든지, 죽음과 투쟁이 한 작품에 다 담긴다든지 하는 작품은 드물다고 말한다. 고로, 이 작품에서 무용수는 연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레예프의 안무와 연출은 바로 이 점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이 지닌 작품성을 심도 있게 그리기 위해 연극적 요소도 상당 부분 염두에 두었다. 에지로 프리제리오의 무대 장식과 마우르 파가노의 의상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시공간, 즉 16세기 베로나를 효과적으로 재현했다. 1막 장터의 분위기나 시끌벅적한 디테일도 아주 사실적이었지만, 1막 4장의 화려한 붉은 비단 의상에 유명한 2박자 리듬에 맞추어 군무를 추는 캐풀렛가의 무도장은 할리우드 영화에 견줄 만큼 장중했다.

박세은은 감정의 동요로 들뜨던 소녀에서 여자로 변신하는 과정을 잘 연기했고, 3막 1장 로미오의 손에 죽은 오빠 티볼트의 소식을 접하고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하늘까지 금색 조각이 올라가는 그녀 방의 거대한 침대에 비해 작은 체구의 줄리엣은 묘한 대비를 자아냈다. 그럼에도 그녀의 예민한 미간에 감도는 번뇌는 눈에 확 들어왔고 그녀가 얼마나 이 작품에 감정이입을 했는지 잘 보여주었다. 또한, 고통에 찬 표정으로 아버지가 정해준 약혼자와 신부복을 거부하고 약혼자의 손길을 뿌리치는 그녀의 연기는 멜로의 극치였다. 어느 청중은 “환상적이다. 적어도 그녀는 연기할 줄 안다”라고 감상을 전했다.

빛나는 별이 되어

‘클래식아젠다(Classicagenda)’ 홈페이지에 실린 그녀의 인터뷰를 보면, 그녀가 개막공연에 서게 된 연유를 밝힌다. 박세은의 스케줄은 6월 16일부터였는데, 첫 공연 주역 커플이 부상을 당하자 대신 무대에 올랐다. 단지 줄리엣 역에만 집중해 온 힘을 다한 공연이 끝나자 그녀 자신도 모르게 에투알로 변신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의 끊이지 않는 찬사를 보며 에투알이 된 것을 피부로 실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뛰어난 감정이입에 관해서 스스로 이렇게 밝혔다.

“장면마다 나의 줄리엣은 달랐다. 테크닉적인 면에서나 연극적인 면에서 나의 퍼포먼스는 변해갔다. 나의 몸은 점점 더 가벼움과 유연성을 찾았다. 얼마나 이 역에 몰두했던지 숙고할 필요도 없이 나는 즉각적으로 줄리엣이 되었다. 예전부터 나는 한 역을 완주하기 위해 표정에 중점을 두었다. (…) 그러나 (연극적인 양상에서) 무용수들은 인간의 각기 다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 표정보다는 신체적인 표정을 써야 한다.”

가냘픈 체구에 소녀다운 그녀의 실루엣은 이러한 해석의 줄리엣 역을 더 감상적으로 승화시킨 시각적 요소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박세은은 자신이 비슷한 면도 있지만, “사실 누레예프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에 붙여 안무한 줄리엣은 장난기 많고 재밌고, 남자아이 같고 용맹하다. (…) 나의 성격은 오히려 절제된 편이라, 내가 과연 이 역을 할 수 있을지 반문했었다. 이 역을 구상해가며 점차 나는 줄리엣이 지닌 풍요로운 성격을 통해 나의 잠재력을 발견했다”라고 밝혔다.

박세은은 2010년 불가리아 바르나 콩쿠르에서 금상을 받고 2011년 준단원으로 파리 오페라 발레에 입단했다. 그 후 2013년 코리페, 쉬제, 2017년 프르미에 당쇠르, 그리고 2021년 에투알로 모든 등급을 차례로 밟아갔다. 그녀의 우상은 오렐리 뒤퐁으로, 입단 시 박세은은 에투알이었던 뒤퐁을 멀리서 감탄으로 응시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에투알이 되어 그녀를 사모하는 많은 젊은 발레리나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녀의 빛나는 미래를 관망해 보자!

글 배윤미(프랑스 통신원) 사진 파리 오페라 발레

PART3 COLUMN

파리 오페라 발레 에투알 탄생기 에투알은 에투알이 가르친다

‘에투알’은 프랑스어로 ‘별’이란 뜻이다. 지난 6월, 발레리나 박세은이 파리 오페라 발레의 최고등급인 에투알의 자리에 오른 것을 계기로 친숙한 단어가 됐다. 무용수 등급은 아래부터 ‘카드리유-코리페-쉬제-프르미에 당쇠르(당쇠즈)-에투알’로 구분되어있으니 맨 위의 ‘에투알’은 현재 박세은을 포함해 단 16명에게만 주어진 귀한 자리다. 우리나라 속담에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무엇을 얻거나 이루기가 매우 힘들 때 떠올리는 단어 ‘별’, 프랑스 발레의 ‘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에투알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에투알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요”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에투알’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하게 된 것은 1895년이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무용수를 칭하는 ‘쉬제’ 중에서도 뛰어난 무용수를 일컬어 ‘쉬제 에투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에투알 등급의 무용수는 1930년대에 이르러 배출됐다. 쉬잔 로르시아(1902~1999), 리세트 다르송발(1912~1996), 솔랑주 슈워츠(1910~2000) 등의 발레리나가 그 주인공인데 이들도 1940년에야 비로소 공식직함을 얻었다. 남자무용수로는 1941년 세르주 페레티(1905~1997)가 처음으로 에투알 자리에 등극했다.

세르주 페레티

세르주 페레티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파리 오페라 발레 학교에서 수학하고 발레단에 입단해 무용수로서 큰 명성을 떨쳤으며, 훌륭한 교육자로도 유명하다. 에투알이 된지 5년 만에 발레단을 떠나 개인교습을 시작했는데 1960년대 단원들을 지도하기 위해 발레단으로 돌아온 경력이 특이하다. 그는 에투알 전담이었으니 당시 예술감독이었던 세르주 리파르의 그늘에 가려있긴 했지만 프랑스 발레의 중요한 ‘맥’이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에투알도 누군가에게는 지도를 받아야 더 완성도 높은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기에, 페레티의 가르침은 에투알 계보를 따라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승되고 있다.

페레티를 포함해 3대 에투알이 모여 한 레퍼토리를 연습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스승이 스승을 모시고 현직 에투알을 지도하는 모습 속에서 스승의 귀중함을 재차 확인한다. 무용은 음악의 악보처럼 무보가 널리 활용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도제식으로 전승되다보니 스승이 교과서이자 매뉴얼이다.

1990년대 초, 당시 팔순을 훌쩍 넘긴 페레티가 여전히 현역에서 지도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거동도 불편하고 목소리에 힘도 없었지만, 파리 오페라 발레 학교의 어린 발레 지망생 ‘프티 라’에게 ‘발레는 이런 것이다’라며 섬세하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정성들여 지도하는 것이 아닌가. 손동작 하나, 시선 하나 무심히 지나치지 않았다. ‘프티 라(petit rat)’는 ‘작은 쥐’라는 뜻으로 발레 학교 독립건물이 없던 시절 가르니에 극장 연습실에서 어린 학생들이 내는 발소리에서 유래한 호칭으로, 작품에 출연하는 어린 무용수들을 일컫는다. 페레티 자신이 ‘프리 라’였던 시절을 추억하는 듯도 보였고, 미래의 에투알에게 프랑스의 전통을 잘 전달해야한다는 강한 의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베트 쇼비레(1917~2016), 시릴 아타나소프(1941~) 같은 거장들이 스승으로 모시는 ‘최초의 남성 에투알’ 세르주 페레티는 에투알을 가르친 대표적인 스승이다.

“이미 관객은 알고 있어요, 이번엔 누가 에투알이 될지”

파리 오페라 발레의 무용수 승급은 매년 있는 심사를 거쳐 발표하는데 유일하게 에투알 임명만 별도의 승급심사가 없다. 정해진 시기도 없이, 정년을 맞은 에투알이 자리를 내주면 선정위원회를 열어 그 자리에 들어갈 새로운 에투알을 결정한다.

올 3월 실제 하늘의 별이 된 파트리크 뒤퐁(1959~2021)에게 에투알을 임명했던, 1980년대 초 파리 오페라극장 행정감독을 지낸 베르나르 르포르는 이런 말을 했다. “에투알을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거라고 예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빈자리가 생겨 에투알을 뽑아야 할 때가 되면 이미 관객들은 알고 있답니다. 이번엔 누가 될지.” 발레 팬끼리 SNS로 소통할 수 없던 시절, 에투알은 미리 예고도 없이 공연이 끝나는 순간, ‘깜짝’ 임명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날의 예매가 폭증했던 사실만 보더라도 매의 눈으로 ‘에투알 감’을 선별하고 예상하는 건 바로 관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투알 임명에 있어 가장 유명한 인물은 실비 길렘이다. 16세이던 1981년에 카드리유로 입단해 1982년 코리페, 1983년 쉬제, 1984년 프르미에 당쇠즈로 승급했다. 매년 승급심사 때마다 한 등급씩 오른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프르미에 당쇠즈로 임명된 5일 후, ‘백조의 호수’ 주역을 끝내고 에투알에 임명됐다. 에투알이 되는 데는 정해진 나이도 없고, 심사도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기록적인 초고속 승급은 전무후무한 일화로 남았다.

르포르는 에투알의 조건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예술에서 완벽이란 불가능하죠. 하지만 에투알은 완벽해야 합니다. 완벽한 기술, 뛰어난 체격, 현명한 머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자신만의 장점으로 무대 위에서 표출할 수 있는 개성. 이 모두를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에투알이 되면 공연을 준비하는 모든 여건이 좋아진다. 세계 모든 프로발레단이 그렇듯이 단체를 대표하는 주인공들이니 최고의 대우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출연할 작품을 선정하는 데 있어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피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발레단의 얼굴인 에투알이 각각의 개성을 살릴 수 있어야 비로소 발레단이 독창적 전통을 가진 단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신념만큼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투알이 된 박세은이 소감을 말하는 인터뷰에서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겸손한 발언이기도 하지만 속내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에투알이 어려운 자리이고, 더 많은 가르침을 바탕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출신도 아니면서 최초의 동양인으로 그 자리에 오르는 쾌거를 올렸으니 어느 별보다도 더 화려하게 오랫동안 빛나길 바란다.

글 장인주(무용평론가) 사진 etoiledelopera.e-monsi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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