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피아노 독주회 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10월 4일 9:00 오전

공연수첩


김태형 피아노 독주회

상상으로 빚어낸 세상의 작은 소리

8월 26일 금호아트홀 연세

공연장 문턱에서부터 공연을 미리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 김태형은 이번 공연에서 그가 직접 프랑스에서 영상으로 담아온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와 해 질 녘의 바닷가 영상을 무대의 세 벽면에 비추고, 공연 전 그가 직접 녹음한 뮌헨에만 있다는(?) 새소리와 양재시민의숲 풀벌레 소리로 음악에 몰입을 더했다. 나무 영상과 새소리는 연주로 만나볼 라모의 ‘새들의 지저귐’ ‘뮤즈의 대화’ ‘암탉’, 라벨의 ‘거울’ 중 ‘슬픈 새들’, 생상스의 ‘백조’를 이을 연결고리로 보였다. 음악의 시간은 자연스레 낯에서 밤으로 흘렀다. 2부 시작 전, 잔잔한 파도가 이는 해변의 해 질 녘 영상과 풀벌레 소리가 관객을 맞았다. 2부에서 연주될 드뷔시의 12개의 전주곡 2권 L123 중 ‘달빛 쏟아지는 테라스’와 3개의 영상 2집 L111 중 ‘달은 쓰러져가는 사원에 지고’와 결이 닿아 있다. 영상에 덧입힌 소리는 연주 중에는 재생되지 않았다.

작곡가가 음표로 옮겨온 세상의 작은 소리의 비밀을 김태형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그가 상상으로 펼쳐본 음악의 비밀을 보다 쉽게 관객들이 알아차렸으면 하는 바람을 무대에 담았다.

연미복 대신 파란 셔츠를 입은 김태형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첫 순서로 만나본 라모(1683~1764)의 ‘상냥한 호소’를 마치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마이크를 잡은 김태형의 눈은 반짝이고 양 볼은 상기됐다. 그는 “영상·새소리·풀벌레 소리가 주는 몰입이 오늘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만날 때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그가 공연을 위해 주문한 건, 영상과 음향효과뿐만이 아니었다. 점차 어두워지는 무대·객석 조명의 대비로 음악이 주는 시차를 느낄 수 있게 배려했다. 덕분에 관객은 공연의 기획 의도와 음악의 흐름을 쉽게 읽어갈 수 있었다.

양손의 독립적인 선율의 움직임과 속도 차이를 두고 주고받는 새소리는 점점 옅어지는 화성과 부유하는 듯한 타건으로 자연스레 밤의 세계를 열었다. 풍부한 페달 사용으로 흐릿한 화성의 울림 사이 선율을 수놓았다. 이러한 몽환적인 음악의 인상은 피아니스트가 그린 ‘상상 속의 밤’을 더욱더 신비롭게 했다.

이날 만난 프랑스 작곡가의 작품들은 언뜻 ‘표제’로 음악적 상상의 폭을 제한해둔 듯하지만, 서사가 아닌 ‘일상의 대상’을 음악으로 담아냈기에 자유롭고 막연하다. 작곡가는 친절하지 않다. 해서 “이렇게 상상해보시오”라고 악보에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건 연주자의 몫이자 역량이다. 그 막연함 속, ‘상상력’을 간과하고 기교로 음악의 건축을 쌓을 때, 음악은 밖이 아닌 안에서 무너진다.

김태형은 섬세하고 깊은 상상력을 가졌다. 프랑스 시골 암탉의 “꼬꼬꼬” 소리, 물의 일렁임으로 굴절된 노을의 소리, 달빛의 “웅웅웅” 거리는 소리는 건반을 누르는 손끝이 아닌 김태형의 내면에서 발현됐다. 그렇기에 기교와 소리가 아닌 상상으로 만난 음악의 비밀을 관객은 엿볼 수 있었다. 내일이면 또다시 새로워질 음악에 담긴 비밀에 피아니스트는 두 눈을 다시 반짝일 것이다.

언젠가 기자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음악의 비밀을 나 혼자 알고 있기 아쉬워서”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은 한껏 들떠있고, 눈이 반짝인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연주자 입장에서 상상해보아도 그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음악은 언제나 작곡가의 비밀을 엿본 흥분에서 시작하기에. 그럼 나는, 그 비밀을 엿보러 다시 공연장을 찾을 것이고.

글 임원빈 기자 사진 금호문화재단

뮤지컬 ‘하데스타운’

모든 기원은 변용된다

9월 7일~2022년 2월 27일 LG아트센터

신화는 인간적이고 뮤지컬은 현실적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기원은 음악이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의 큰 줄거리는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 이야기에서 따왔다. 자신의 노래로 저승의 신을 감동시켜 죽은 아내를 데려오려는 어느 음유시인 이야기. 그러나 이 신화가 비극인 이유는 지상으로 발을 내딛기 직전,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어기고 아내 에우리디케를 잃은 오르페우스 자신도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하데스타운’에서 변치 않은 캐릭터는 순진하리만큼 음악의 힘을 맹신하는 오르페우스(박강현)뿐이다. 생활력이라곤 없는 가난한 싱어송라이터로, ‘봄을 불러올 노래’를 쓰는 데만 매진한다. 18세기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서 카운터테너가 주로 맡던 오르페오 역할처럼 뮤지컬 속 오르페오의 넘버도 높은 음역대로 작곡되었는데, 박강현은 가성을 듣기 편하게 사용하며 잘 소화해냈다.

남자(남편 오르페우스, 저승의 신 하데스)에 의해 운명이 좌우되던 에우리디케(김환희)는 이제 스스로 지하로 향한다. 가난한 지상의 삶에 지친 그는 이곳을 벗어나, 지하 세계에서 거대 산업을 운영하는 하데스와 위험한 계약을 맺는다. 석탄산업 시대 거대한 광산을 소유한 거만한 사장처럼 그려지는 하데스(지현준)는 노동자를 부리고 대가를 지급하는 것을 큰 업적인 양 내세우는 캐릭터다. 그런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은 자신의 아내 페르세포네를 대할 때뿐이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과감하게 포크 록을 부르는 오늘날의 페르세포네(김선영)는 그 어떤 인간보다도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

그리고 이 작품의 형식을 결정짓는 중요한 캐릭터, 바로 신과 인간의 세계를 이어주는 헤르메스(강홍석)가 있다. 두 세계를 오가는 신화 속 헤르메스의 특성은 작품에서 제4의 벽을 자유로이 오가는 내레이터로 변용된다. 스탠드마이크 앞에 선 헤르메스는 관객에게 뮤지컬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소개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며, 중요한 상황이 되면 해설자로 나선다. 때로는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기도 한다. 창극에서 관객의 흥을 돋우고 줄거리를 전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전지적 시점의 도창의 역할인 셈인데, ‘하데스타운’이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아니이스 미첼(1981~)의 포크 앨범을 극화한 뮤지컬이라는 것을 떠올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미첼은 콘서트에 가깝던 초창기 ‘하데스타운’을 무대화할 연출가로 레이첼 차브킨을 낙점한 이유에 대해 “음악과 뮤지컬, 그리고 콘서트 문화의 가장 좋은 면들을 어떻게 극장에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감각이 아주 뛰어나다”라고 밝힌 바 있다.

작품의 콘셉트는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신화 속 캐릭터로 분장한 가수들의 콘서트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실제로도 콘서트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브로드웨이 원작 무대 디자이너의 표현을 빌자면 ‘뉴올리언스식 하이브리드 뮤직바’로 구현된 무대 양옆에는 밴드 연주자들이 올라와서 공연 내내 라이브 연주를 들려준다. 콘서트로 치면 무대 뒤쪽의 코러스 가수에 빗댈 수 있는 세 ‘운명의 여신’, 백업댄서처럼 가수 뒤에서 춤추고 합창하는 앙상블까지. 그렇다고 해서 극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하데스타운’에서 음악과 이야기의 결합은 절묘하다. 다시 앞서 이야기한 무대를 살펴보자. ‘하데스타운’의 무대가 ‘하이브리드’인 이유는 뉴올리언스에 위치한 유명 재즈 공연장(프리저베이션 홀)과 고대 그리스 원형경기장의 형태를 절반씩 취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노래로 전해 듣는 관객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서울의 공연장인지, 혹은 인간과 신들의 세계 하데스타운의 공연장인지 모를 기분 좋은 모호함에 휩싸인다.

자칫 현실과 동떨어진 뮤지컬에 그칠 수도 있었다. 자본과 계약의 논리에 충실한 하데스를 노래 하나로 돌려세우다니. 그러나 미첼이 만든 오르페우스의 반복적인 선율은 이성적인 잣대에 익숙한 현대인까지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언젠가 들어보았던 바로크 시대의 성악곡을 닮아 고전적인 멜로디는, 앞으로도 사랑받을 것 같다.

글 박서정 기자 사진 에스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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