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이얼·플루티스트 손유빈 함께의 가치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10월 4일 9:00 오전

지휘자 이얼 & 플루티스트 손유빈

함께의 가치

보스턴 심포니 부지휘자 이얼·뉴욕 필 플루트 단원 손유빈 이 부부를 단단하게 만든 건 무엇일까?

미국 작곡가 애런 코플런드(1900~1990~)는 발레음악 ‘애팔래치아의 봄’을 남겼다. ‘아메리칸 클래식’으로 통하는 이 작품의 핵심 등장인물은 신혼부부이다. 19세기 초, 개척 시대의 애팔래치아를 배경으로 한다. 산지 중턱에서는 신혼부부의 결혼식이 펼쳐지고, 신랑과 신부는 앞으로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애팔래치아의 봄’은 신대륙의 봄이며, 인생의 봄을 은유한다.

여기 한 부부가 있다. 미국에서 만나 견고한 관계를 맺게 된 지휘자 이얼(1983~)과 플루티스트 손유빈(1985~). 신대륙에 터를 잡은 이들은 ‘애팔래치아의 봄’에 나오는 부부처럼 함께 손을 잡고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오는 10월, 지휘자 이얼의 서울시향 공연을 앞두고 이들은 잠시 한국을 방문했다. 이얼은 서울시향과 함께 코플런드 ‘애팔래치아의 봄’을 시작으로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5번(협연 신창용),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을 선보인다. 그들은 화상 인터뷰를 앞두고 “아이가 잠을 안 자서 10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10분 뒤,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와, 아이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손유빈 아이가 되게 귀여워요. 남편을 빼닮은 13개월 딸인데요. 결혼 후 5년 뒤에 아이를 가졌어요. 둘이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기니까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그러다 코로나 기간에 임신해서… 밖에도 못 나가고 태교를 했어요.

이얼 아시다시피 코로나 터진 직후 뉴욕에서는 인종차별 분위기가 심각했잖아요. 아내는 배가 불러 있고, 연주는 다 취소되고,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집에만 있던 그 시기가 잊히지 않네요. 어렵게 마트에 가면 사재기 현상이 심해 물품도 다 떨어지고…. 손유빈 그래도 장거리 연애를 오래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결혼 후 처음으로 둘이 붙어있던 것 같아요. 의지를 하면서 더 가까워지는 기회가 됐죠.

첫 만남이 궁금합니다. 이얼 님이 국소성 이긴장증으로 첼로를 관두고 지휘를 시작했을 때부터 관계가 깊어진 걸로 알고 있는데요.

손유빈 커티스 음악원에서 선후배 사이로 처음 만났어요. 이후 2010년에 가까운 동네에 살게 되면서 다시 인연이 시작됐죠.

이얼 당시 지휘 공부를 시작했을 때여서 저는 대부분 집에서 공부했어요. 그때 유빈이는 뉴욕 링컨센터 소속의 모스틀리 모차르트 페스티벌 단원으로 활동해 매우 바빴는데요. 그래서 강아지를 자꾸 저에게 맡겼어요.(웃음) 아내는 제가 지휘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어요. 본인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리허설도 참관하게 도와줬고요. 사실 공연은 프로덕트(product)이고, 리허설은 프로세스(process)이잖아요. 덕분에 지휘자들이 음악을 만드는 과정, 원하는 걸 리드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게 큰 도움이 됐죠.

손유빈 커티스 음악원에서도 첼로를 잘 하는 편이었거든요. 갑자기 손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너무 놀랐죠. 2년 동안 재활 치료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지휘를 시작한다고 해서 반가웠어요. 응원해 주고 싶어서 더 적극적으로 리허설을 보라고 했던 거예요.

각자의 위치에서 바쁘게 음악 활동을 지속하느라 ‘장거리 연애’가 오랫동안 지속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얼 제가 2013년에 뉴잉글랜드 음악원에 입학하면서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어요. 당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열심히 공부를 하고, 다섯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유빈에게 달려가 주말 데이트를 하곤 했죠. 토론토 심포니에서 부지휘자로 일할 때에는 비행기를 타고 보러 갔고요.

손유빈 의지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간 거죠. 저도 오케스트라 오디션을 보느라 힘들었을 때 많은 조언을 받았어요. 서로 격려해 주며 버틸 수 있었습니다. 이얼 저도 아내에게 곡에 대한 해석을 편하게 물어볼 수 있어서 좋아요. 유빈이가 뉴욕 필에서 일하니까 세계적인 지휘자들을 많이 만나잖아요. 각 지휘자의 스타일을 물어보기도 하고, 뉴욕 필의 리허설도 자주 보러 가고요.

미국의 오케스트라를 엿보다

뉴욕 필을 필두로 해서 보스턴 심포니, 시카고 심포니,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소위 미국의 ‘빅 5(big five)’라고 부르잖아요. 각 직장에 대한 자랑 좀 해주세요!

손유빈 뉴욕 필의 놀라운 점은 첫 리허설 때부터 연주가 완벽하다는 거예요. 단원들이 준비를 잘 해 와요. 물론 지휘자들이 각 캐릭터를 잡아주긴 하지만 처음부터 연주 수준의 리허설이 가능하다고나 할까요.

이얼 뉴욕 필이나 보스턴 심포니는 동시대와 호흡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움직임이 엿보여요. 살아있는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도 자주 올리고요.

손유빈 여성 작곡가나 여성 지휘자와도 많이 호흡하려고 하죠. 현직 여성 단원의 비율도 상당히 높은 편이에요. 번스타인(1918~1990)이 고용한 단원이 아직 계시는데요. 그분에게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에는 육아휴직도 없다가 점점 여성들이 일하기에 좋은 환경을 조성해왔다고 해요. 뉴욕 필은 미국 오케스트라의 첫 역사여서 그런지 모든 이슈에서 리드를 하려는 점이 보입니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미국 오케스트라에서 자리를 꿰차는 아시안 음악가들이 확연하게 늘었죠. 뉴욕 필 단원의 약 3분의 1이 아시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위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코로나 이후로 아시안 음악가들을 향한 편견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데요.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인종차별로 힘든 적은 없었나요?

이얼 사실 우리 세대는 인종차별을 당하더라도 꿋꿋하게 참고 이겨내는 게 익숙했던 것 같아요. 코로나가 터지면서 인종차별이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고, 이제 아시안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거죠. 특히 젊은 세대 중심으로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는 것 같아요.

손유빈 SNS에서도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고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를 알게 됐으니 천천히 변화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뉴욕 필 음악감독인 얍 판 츠베덴은 한국에선 까칠한(?) 지휘자로 알려져 있는데요. 가까이에서 접한 츠베덴은 어떠한 지휘자인지 궁금합니다.

손유빈 츠베덴이 뉴욕 필 단원들에게 심한 말을 한 적은 없어요. 다만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편은 맞아요. 틀린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가죠. 다 음악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 까칠하게 받아들여지진 않더라고요.

이얼 님은 보스턴 심포니 부지휘자로 임명됐습니다. 지휘자 성시연도 이 오케스트라에서 부지휘자로 활동한 바가 있어서 친숙한 느낌인데요. 음악감독인 지휘자 안드리스 넬손스가 직접 합격 소식을 전했다고요!

이얼 이번에 보스턴 심포니 부지휘자 오디션에 총 네 명이 봤는데, 넬손스가 대기실로 찾아와 저에게 수고했다고 축하한다고 합격 소식을 전했어요. 기분이 너무 좋아서 얼른 아내에게 전화해 자랑하고 싶었죠!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넬손스의 리허설을 많이 봤어요. 인품이 좋아서 감명 깊었죠.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공포심을 주어서 음악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요. 저 역시 그런 지휘자가 되고 싶은데 이렇게 보스턴 심포니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서 좋아요.

캐나다의 토론토 심포니(2015~2018), 미국의 피츠버그 심포니(2018~2021)에서도 부지휘자로 활동한 바 있죠. 악단마다 부지휘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다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얼 토론토 심포니는 제가 어릴 적에 유스 오케스트라 활동도 했던 곳이에요. 부지휘자 오디션을 보고 들어갔는데 단원들이 너무 따뜻하게 반겨주는 거예요. 고향에 돌아간 것처럼 편한 마음으로 지휘를 시작할 수 있었죠. 포디엄에서도 마음이 편했고요. 피츠버그 심포니에선 음악 외에 행정이나 경영적인 부분을 접했어요. 결정하는 상황에서 결정권을 저에게 주는 경우가 많았죠. 저만의 색깔을 끌어낼 수 있는 프로그램 기획도 많이 했고요. 커리어를 쌓는 과정에서 적합한 시기에 적합한 악단을 경험한 것 같아요.

함께 걸어가는 과거, 현재, 미래

이얼 님은 2007년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갑자기 찾아온 국소성 이긴장증 때문에 첼로를 관두고 지휘를 시작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기분 때문에 힘들진 않았나요?

이얼 처음에는 스코어 리딩부터 배웠어요. 아이들도 처음 악기를 배울 때 악보 보는 법부터 배우잖아요. 총보를 편안하게 읽는 트레이닝부터 시작했죠. 다들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에 대해 걱정이 많으셨는데 저는 2년 동안 손가락 재활 치료를 했던 경험이 있잖아요. 재활 과정이 너무 더뎠어요. 좋아지다가도 다시 무너지는 과정을 반복했기 때문에 지휘 시작은 오히려 즐거웠죠.

반면 손유빈 님은 2012년, 뉴욕 필 정단원 입단 소식을 전한 뒤 어느덧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악단 생활을 하면서 음악적으로 성장한 점은 무엇인가요?

손유빈 뉴욕 필에서 활동한 지도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네요. 연주 경험이 정말 늘었죠. 뉴욕 필은 1년에 거의 170회 정도 무대에 서요. 다양한 지휘자와 솔리스트를 만나다 보니 같은 곡에서도 여러 관점을 익힐 수 있었어요.

아무래도 악단 활동을 하면 솔리스트에 갈증이 생기진 않나요?

손유빈 뉴욕 필 안에서도 개인 연주 기회가 많습니다. 현대음악 앙상블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실내악단도 구성되어 있고요. 오케스트라만 해서 답답한 감정은 느껴보지 않았어요.

어떠한 지휘자는 독일 레퍼토리에서, 어떠한 지휘자는 현대음악 레퍼토리에서 강점을 보이곤 합니다. 새로운 시작점에 선 이얼 님은 어떠한 스페셜리스트로 자리 잡고 싶나요?

이얼 다 잘하고 싶어요.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세계 최고의 연주를 영상으로 쉽게 접하게 됐어요. 자연스레 대중의 눈높이가 높아졌어요. 저도 독일이나 프랑스 혹은 현대 레퍼토리 중 무엇을 잘 해야 할까 고민한 적이 있는데, 요즘은 모든 분야에서 다 잘해야 하는 것 같아요.

손유빈 님은 유독 한국 공연에서 만날 기회가 적었어요.

손유빈 사실 그간 한국 활동을 자주 할 수 없었던 건, 제 우선순위가 남편과 시간을 보내는 거였기 때문인데요. 시즌이 끝나면 떨어져 있던 남편과 시간을 보내는 게 그동안 우선순위였어요.

지난 8월, 이얼 님은 여수국제음악제에서 지휘를 했어요. 전남 여수가 고향인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금의환향인 셈이네요. 다가올 서울시향 공연에서도 지휘봉을 잡게 됐어요.

이얼 국내 연주는 이상하게 너무 떨려요. 제가 보스턴 심포니 오디션 때도 안 떨었는데요. 한국에서 연주할 때면 설렘이 커요. 콘서트 프로그램을 짤 때 제가 꼭 구성하는 형식이 있어요. 대중에게 잘 알려진 곡, 쉽게 들을 수 없는 신선한 곡을 알맞게 배치해요. 코플런드의 ‘애팔래치아의 봄’은 미국에선 인기가 많지만 한국에선 자주 연주되는 작품이 아닌데요. 이 곡을 서울시향과 함께 소개할 수 있어서 좋아요. 피아니스트 신창용과 함께하는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5번이나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도 이 작곡가들의 작품 중 많이 연주되는 편이 아니어서 기대되고요.

평소 서울시향 사운드는 어떻게 분석했나요?

이얼 한국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한과 혼이 있어요. 서울시향의 연주를 들으면 매력적인 사운드가 가슴에서 묻어 나오는 느낌이랄까요. 어떤 아픔이 눌려져 있는 깊은 느낌을 받아요. 얼마 전에 운전을 하는데 라디오에서 브람스 교향곡 1번이 나오는 거예요. 감정이 묻어 나오는 묵직한 연주를 들으며 ‘베를린 필이겠지’ 추측을 했어요. 그런데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 연주더라고요. 그때 너무 설렜어요. 내가 한 달 후에 이런 악단을 지휘할 수 있다니!

성악가 부부인 소프라노 홍혜란, 테너 최원휘가 15년 전 나란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멋진 성악가 부부로 성장했을 때 공식으로 선보이는 첫 앨범은 꼭 찬양음반으로 발매하자”고 약속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15년 뒤 그 결실의 음반을 발매하였는데요. 이처럼 두 분도 부부로서 함께 소망하고 있는 음악 프로젝트가 있나요?

손유빈 여행을 자주 다니는데 좋은 곳에 갈 때마다 “이런 곳에서 뮤직 페스티벌을 하고 싶다”는 얘기를 종종 나눠요. 이얼 아름다운 곳에서 우리 음악을 즐기며 그 지역 커뮤니티까지 발전할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여행하면서 좋은 곳들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죠?

글 장혜선 기자

이얼/서울시향(협연 신창용)

10월 15·16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롯데콘서트홀

코플런드 ‘애팔래치아의 봄’,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5번,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이얼(1983~) 커티스 음악원과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첼로를 전공했다. 2010년 이그나트 솔제니친과 지휘 공부를 시작했으며, 맨해튼 음대·뉴잉글랜드 음악원을 졸업했다. 2021년 미국 솔티 재단의 젊은 지휘자상을 받았다. 보스턴 심포니 부지휘자로 임명됐다.

손유빈(1985~) 커티스 음악원·예일대·맨해튼 음대를 졸업했다. 2012년 11월에 한국인 최초로 뉴욕 필 관악 단원 정식 입단이라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뉴욕 링컨 센터 소속의 모스틀리 모차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플루트 수석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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