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부로 들어선 음악 여정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10월 18일 9:00 오전

아티스트 에세이

 

발전부로 들어선 음악 여정

비올리스트 김세준

 

©임주희 피아니스트 임주희(2000~)는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로버트 맥도널드를 사사하고 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취미로 그리는 그림을 SNS에 올리는 등 대중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인 젊은 연주자다

2018년 5월, 도쿄 비올라 콩쿠르가 끝나고 아마추어 비올리스트 모로츠미 상을 만났다. 그와는 8년 전 일본 오타루에서 열렸던 노부코 이마이(1943~)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며 인연을 맺었다. 그가 물었다.

“세준, 너 8년 전과 지금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 보여.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 지금 군 복무 중이야.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자 마침 옆에 있던 노부코 이마이가 거들었다.

“아니야, 난 지난해 제네바 실내악 콩쿠르 때도 봤는데 이미 그때도 달라 보였어.”

 

소나타는 고전 시대에 주로 쓰이던 음악 양식으로 제시부-발전부-재현부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발전부는 소설에 비교하자면 기승전결 중 승, 즉 전개에 해당하며, 역동적이고 많은 음악적 변화가 일어나는 부분이다. 내 음악 인생을 소나타에 비유하자면 독일에서 공부한 시절이 발전부에 들어선 시점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나의 변화를 알아봐 준 모로츠미 상과 노부코 이마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인생의 ‘발전부’에서 무엇이 나를 변화하게 만들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타베아 치머만

 

타베아 치머만의 마지막 조언

비올라의 거장 타베아 치머만(1966~) 교수와의 마지막 레슨은 가장 처음 나를 변화의 길로 들어서게 한 일이다. 그는 내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 중 한 분이다.

‘마지막 레슨’이라는 생각에 교수님의 사소한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평소보다 훨씬 더 집중했다. 레슨이 끝난 후, 교수님께서는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듯 차분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세준, 너한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넌 가끔 나도 부러울 만큼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걸 다루는 능력도 좋다고 생각해. 그래서 항상 너의 연주는 탄탄하고 잘 준비된 느낌이야. 하지만 네가 더 좋은 음악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더 필요해. 첫째는 톤의 다양성, 그리고 둘째는 듣는 사람에게 연주자가 마법을 부리는 듯한 순간을 선사할 수 있는 ‘매직 모멘트’가 있어야 한단다.”

그 순간 나는, 그동안 굉장히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는 교수님과 공부했던 2년이라는 세월 동안 꽤 자주 하셨던 말씀이었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듣는 사람의 상황과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들리듯 그날의 말씀은 유독 내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어떤 곡을 하든지 항상 그 두 가지를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질문했다.

‘지금 충분히 다채롭게 소리가 표현되고 있는가?’

‘이 곡의 특별한 순간은 어디이고, 그 또한 충분히 표현되고 있는가?’

 

에버하르트 펠츠

 

이성과 감성의 연결고리

독일에서 유학한 지도 어느덧 약 5년이 되어가던 무렵, 나는 내 음악 인생 최고의 멘토를 만났다. 현재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와 뮌헨 음대 실내악 교수로 재직 중인 바이올리니스트 에버하르트 펠츠(1937~)다. 유럽에 내로라하는 현악 4중주단은 대부분 그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현악 4중주 부문에서는 최고의 마에스트로이기 때문에 그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아벨 콰르텟 역시 그분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했다. 그날의 기억은 내 음악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즈음 나는 독일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이론이나 디테일에 매우 집중하고 있었다. 특히 이론에 대해서는 어떤 곡이든 바로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있었다. 펠츠 교수님께서는 레슨 때 질문이 매우 많은 편이신데, 그날 역시 교수님의 질문 세례와 함께 레슨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음악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지?”

교수님께서 물었다. 나는 내가 아는 것을 최대한 끌어모아 대답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교수님의 질문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Wo ist dein Herz? (네 심장은 어디 있어)?”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해 있던 나에게 펠츠 교수님은 설명하셨다.

“넌 늘 다 맞는 말을 하고, 심지어 마치 사무실 서랍처럼 잘 정리도 되어있는데, 가장 중요한 머리와 가슴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

만난 지 불과 5분 만에 나를 꿰뚫어 본 듯했다.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마음까지 들던 나에게 교수님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 음악에서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풍부한 지식,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넌 이미 그 두 가지를 가지고 있어. 하지만 그 어떤 완벽한 이론도 머리로만 이해하고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한다면, 좋은 음악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워. 그 안에서 균형을 잘 유지했으면 좋겠어.”

훗날 깨달았다. 펠츠 교수가 나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은 음악가에게 가장 중요한 개성에 관한 것이라는 걸. 어떤 음악도 다른 사람 음악과 같을 수 없고, 그 다른 무엇이 그 사람의 개성이다.

 

도쿄와 독일에서의 도전

NDR 하노버 라디오 필하모닉

2018년 도쿄 비올라 콩쿠르에 참가했을 당시 나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입대 후 실력이 하락할 것을 염려해 나의 대부분의 휴가를 사용해 참가한 콩쿠르였다. 상황도 상황이지만 콩쿠르 준비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나를 제일 힘들게 했던 건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내가 온전히 짊어져야 하는 짐이었다. 하지만 고통 속에 핀 꽃이 더 아름다운 법 아니던가. 나는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 엄한 선생님이 되어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하게 준비했다. 결과를 떠나 무대에서 제일 나답고 확신에 찬 음악을 연주했다.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얻었으니 내 음악 인생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값진 시간이었다.

김세준(1988~)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석사를 졸업했다. 2018년 도쿄 비올라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준우승을 차지하며 연주자로서 입지를 다진 그는 아벨 콰르텟의 멤버로도 활동한 바 있다. 현재 독일 하노버 NDR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종신 수석을 맡고 있다

지난 2019년 1월, 다시 내 음악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현재 독일 하노버 NDR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으로 일하고 있다. 이는 나에게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이고 흥미로운 일이다.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이며 음악이 곧 그들의 역사이자 삶 그 자체인 이곳에서, 나는 많이 배운다. 단원들에게 음악은 ‘배워야 하는 존재’가 아닌 ‘언어’ 그 자체다. 그렇기에 음악 그대로를 느끼고 표현한다. 또한 어느 음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며, 단원들 개개인 모두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이 모든 것이 한데 모여 만들어내는 음악이란! 풍부하고 충만하기 그지없다. 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음악이 나에게는 매주 새로운 챕터의 도전이고 경험이다. 내 음악 인생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발전부를 항해 중이며 내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다.

글 김세준 일러스트 임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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