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데이비드 이, 이메일과 손수건으로 맺은 인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8월 9일 9:00 오전

“ARTIST’S ESSAY 데이비드 이”

 

이메일과 손수건으로 맺은 인연

지휘자 데이비드 이

©임주희


2014년, 나는 주저 없이 바로 미국 보스턴 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독일 바이마르 음대에서 지휘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매주 진행되는 지휘과 수업에서 약 45분 정도 오케스트라와 함께 수업을 진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휘과 수업은 일반적으로 오케스트라가 아닌 두 대의 피아노와 함께 이루어진다. 피아노가 오케스트라를 대신하는 것이다. 물론 가끔 오케스트라와 연주할 기회도 주어지지만, 흔한 기회가 아니어서 지휘 학도들은 늘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연주에 목말라 있다. 그래서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매주 진행되는 오케스트라와의 연주는 매우 흔치 않은 기회였다.

 

한 통의 이메일에서

뉴잉글랜드 음악원 첫 수업 때 휴 울프 교수님은 나에게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 지휘를 맡겼다. 안타깝게도 지휘하는 나의 모습은 ‘비극’ 그 자체였지만, 연주보다 더 값진 만남이 있어 첫 수업이 마냥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건 아니었다. 그곳에서 2013년 서울시향의 정명훈 지휘 마스터클래스 참가자였던 마카오 출신의 리오 쿠오크만을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미국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를 역임한 바 있는 그는 현재 홍콩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레지던트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당시 그는 이미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졸업한 상태였지만, 지휘과 학생이 새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수업을 참관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서울시향 지휘 마스터클래스는 어떻게 초대받은 거예요?”

 

그가 서울시향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했을 당시, 최수열(부산시향 상임지휘자), 서진(과천시향 상임지휘자), 홍석원(광주시향 상임지휘자) 등이 참여했다. 그들은 그때의 마스터클래스를 발판삼아 현재까지도 지휘자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서울시향에 이메일을 보냈어.”

 

예상외로 간단명료한 대답에 적잖게 당황했지만 나도 일단 이메일을 보내보기로 했다. 내 이력서와 지휘 영상을 검토한 서울시향은 2015년 여름, 내게 정명훈 지휘자가 주관하는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할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이메일 한 통을 시작으로 서울시향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2015년 서울시향 정명훈 마스터클래스 현장

 

 

 

 

 

 

 

 

 

 

 

음악은 여전히 내 속에 남아

사실 나는 그날 마스터클래스가 진행된 세종문화회관 5층 연습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긴장 상태였다. 후들거리는 허벅지에 힘을 꽉 주고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 1악장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도입부에 먼저 등장할 현악기를 향해 첫 다운비트를 지휘했다. 음악이 시작되고 내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비올라와 첼로가 첫 마디의 완전 5도에서 시작해 네 번째 마디의 옥타브로 안착하는 순간, 바이올린의 주선율에서 신선한 공기가 느껴졌고, 현악기에서 스미어 나오는 소리에서 편안한 자유를 느꼈다. 평소 나는 좋은 음악이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바라던 음악적 경험을 체험했다.

나는 음악이 주는 자유로움에 집중했다. 오케스트라 소리가 자연의 소리로 승화되고, 지휘자를 포함해 그 어떤 것도 음악의 호흡과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상태였다. 나는 이 순간 내 안으로 깊이 스며드는 음악을 굳이 멈춰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 끊지 않고 계속 지휘를 했다. 나를 유심히 관찰하던 정명훈 선생님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내 해석과 연주를 좋게 보았던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과하게 몰입했나? 선생님의 속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값진 경험으로 남아있다.

 

연륜이 빚어내는 음악

모든 마스터클래스 과정이 끝나고 정명훈 선생님과 만남이 있었다. 정명훈 선생님은 친절하고 유머 있는 분이었다. 선생님은 당신의 학창 시절, 카라얀의 마스터클래스에서 지휘했을 때를 떠올리시며 참가자들에게 조언해주셨다. “아무리 위대한 거장의 지도를 받는다고 해도 지휘자로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지휘자는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번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어 간다면, 그 작은 깨달음이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평생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고 하셨다. 그리고 웃으시며 “잘 버터요. 60대가 되면 한결 편해지니까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라고 덧붙이셨다. 그때 해주신 말씀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여운으로 남아있다.

나는 좋은 지휘자란 무엇인지 고민한다. 배움이 늘어날수록 그 답을 찾기 더욱 어려워진다. 지휘자란 미스터리한 직업이다. 답이 없는 질문들로 지칠 때면, 정명훈 선생님의 조언을 되새겨본다. 아직 갈 갈이 멀었으니 조바심은 내지 않기로 한다. 내가 60대가 됐을 때, 그 고민에 대한 답을 받았을까? 나는 대답할 수 없다. 마스터클래스가 끝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지휘자 선배에게 문자를 받았다. 내가 서울시향 연습실에 손수건을 두고 갔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 손수건을 서울시향의 지휘자가 되어 다시 찾으러 갈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5년 전 연습실에 두고 온 손수건은 지금 내 곁에 있다.

 

공연 정보

데이비드 이/부산신포니에타(협연 박종화·김재원·이정현)

8월 25일 오후 7시 30분 부산문화회관 중극장

베토벤 3중 협주곡 Op.56, 베토벤 교향곡 7번

 

데이비드 이
지휘자 데이비드 이(1988~)는 독일 바이마르 음대에서 니콜라스 파스케를,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휴 울프를 사사했다. 2016년 한국에서 열린 이탈리아 오페라 아카데미에서 리카르도 무티에게 발탁되어 ‘라 트라비아타’를 지휘했다. 그는 2020년 서울시향의 부지휘자로 부임해 올해 3월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마쳤다

 

 

 

 

 

일러스트 임주희 피아니스트 임주희(2000~)는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로버트 맥도널드를 사사하고 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취미로 그리는 그림을 SNS에 올리는 등 대중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인 젊은 연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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