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O THE BOOK
예술을 담은 책 | 글 허서현 기자
음악에는 역사가 묻어있다
역사를 만든 음악가들
새로운 음악의 태동에는, 많은 인과 관계가 얽혀있다. 만약 바흐에게 종교가, 베토벤에게 혁명이, 쇼스타코비치에게 소비에트가 없었다면? 분리할 수 없는 그 총체적 요소를 프랑스 방송사 ‘유럽1’의 기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저자가 엮었다. 장바티스트 륄리부터 존 애덤스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음악사적 계보와 세계사가 나란히 놓인다. 잘 알려진 음악가들은 물론, 프랑스 작곡가 프랑수아조제프 고세크(1734~1829), 체코슬로바키아 피아니스트 기데온 클레인(1919~1945), 그리스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1925~2021) 등 그 목록으로 시선을 끄는 음악가들도 다룬다. 총 13명의 작곡가다. 이들 중 누군가는 부와 명예를, 또 누군가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음악을 남겼다. 다양한 인간의 군상을 소개하면서도, 그 의미를 넘어 창조와 예술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작곡가들의 열망이 담겼다. 음악학을 전공한 저자의 지식을 십분 발휘해, 그 음악적 시도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다룬다. 역사의 비극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음악이 무엇을 남기고 있는지 질문해 볼 시간이다. “모든 음악은, 가장 개인적인 음악조차도, 침해할 수 없는 고유한 집단적 내용을 지닌다.” (아도르노)
슬라브, 막이 오른다
광활한 대지의 여러 나라로 이루어진 슬라브 문화권은 강대국 사이에서의 굴곡 많은 역사를 거치며 피어난 한 송이의 꽃과 같다. 전쟁의 포화 속 쇼팽이나 드보르자크, 학살 속에서 보여준 작가 바츨라프 하벨의 행보, 미래를 내다본 극작가 카렐 차페크, 갈등과 분쟁 속의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의 ‘지하실 사람들’은 저자가 찾아낸 슬라브 문화권의 보석 같은 이야기다. 때로는 한 걸음에 피로 얼룩진 역사가, 때로는 그럼에도 흥과 열정으로 삶을 채운 생명의 의지가 함께 담긴다. 이처럼 찬란한 동유럽 문화 예술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잔혹한 현실, 그리고웃음 뒤에 담긴 눈물과 한숨으로 뒤섞여있다. 수많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와 민족주의 음악가,연극과 영화를 주름잡는 거장들은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 서쪽으로는 프라하, 남쪽으로는 유고슬라비아까지 향해 뻗어나간다.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객석’에서 수년간 기자로 재직하며 연극과 예술현장을 취재했던 저자의 이력이 희곡 및 무대화된 이야기들, 스크린으로 만나는 이야기들로 독자를 안내한다. 책의 구성은 하나의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과 이야기가 엮어져 있어 독자는 ‘막이 오르듯’ 펼쳐지는 슬라브 구석구석의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포트레이트 인 재즈’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 ‘음악다방’ 등 음악책들을 낸 하루키는 소문난 음악 애호가이자 음반 수집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클래식 음악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아왔던 그는, ‘통일성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중구난방의 컬렉션을 소개한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아날로그 레코드의 물성에 애착을 담아왔고, 독자는 그의 즐거운 취향에 선뜻 공감할 수 있다. “그래도 이렇게 돼버렸으니 별수 없다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인생이란 거의 의미 없는 편향의 집적에 지나지 않으니까”(책 속에서). 그의 레코드 목록은 익숙한 것부터 작가의 특별한 선호가 포함된 것까지 100곡이 넘어가며 소개된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 창작과 연결되는 영감의 순간이 진솔하게 담긴 에세이기에 음악을 사랑하는, 그의 소설을 사랑하는 모든 독자에게도 반가운 기록이다.
존재를 서사하는 사랑의 대상
아무튼, 피아노
“‘책’이 주제가 아닌 단독 저서는 처음이라, 더 기쁜 마음이다.” 화상 통화로 진행된 인터뷰의 첫 답변이다. 앞선 그의 저서는 ‘책의 말들’ ‘유튜브로 책 권하는 법’ 등이다. 꽤 큰 비중의 이들이 그를 북튜버(책을 주제로 한 유튜버) ‘겨울서점’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 신간은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라는 콘셉트로 간행되고 있는 시리즈 ‘아무튼’의 일환이다. 소규모 출판사 세 곳의 협업으로 만들어지는 이 시리즈는 색깔 있는 출판사와 개성 있는 저자가 어우러져 만들어진다. ‘아무튼, 노래’ ‘아무튼, 술’ ‘아무튼, 여름’ ‘아무튼, 클래식’ 등 그 주제도 다양하다. 김겨울에게도 이 시리즈가 썩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SNS에 무심코 ‘내가 이 시리즈를 쓴다면 뭘 쓰려나? 피아노? 만년필?’이라고 올렸는데, 두 시간 만에 ‘아무튼, 피아노’를 쓸 사람을 찾고 있었다는 출판사의 답장을 받았다고. 그렇게 ‘피아노로 인해 서사되는 김겨울’과 ‘겨울의 경험을 통해 설명되는 음악’ 이야기가 탄생했다. ‘김겨울’과 ‘피아노’ 중 어느 것에 관심이 있든, 면밀한 관찰로 완성된 매력적인 문구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피아노는 내 삶의 모든 것이었다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가, 느릿느릿 돌아왔다. (…) 내가 조직한 내 삶의 서사에서 피아노는 빠질 수 없는 주춧돌로 서 있다.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의 서사에 기반하고 있다면, 나의 정체성의 일부는 피아노라는 하나의 존재, 그 물건과 물건에 얽힌 무수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p.30) 책에는 저자의 개인적 서사와 더불어, 지메르만·조성진 등 명연주자들을 비교해 들어가며 그 연주의 맛이 무엇인지 전달하려는 기술(記述)의 친절함이 느껴진다. ‘찾아 들어가기’ ‘클래식 음악을 위한 스트리밍 서비스’ 등의 챕터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낯선 독자들을 위한 곡 제목 읽는 법이나 감상의 방법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INTERVIEW
피아노 연주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였나.
사실 클래식 음악으로 따지자면 어릴 때 배우고, 중간에 치지 않은 기간이 길다. 늘 치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다시 배우기 시작한 것은 몇 년 사이다.
이 문구가 가장 눈에 먼저 띈다. “나는 피아노를 배움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세계를 가진 인간이 되었다.” 피아노를 치는 행위에 대해 깊이 사유한 흔적이 느껴지는데.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편인 것 같다. 그게 내 스타일이다. 책을 쓰면서, 읽는 사람들에게 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고 싶어 더 고민한 것도 있다. 평소에 피아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혼자 써둔 글도 있었다. 어쩌면 피아노 자체가 그런 특성이 있는 것도 같다. 칠수록, 들을수록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향유하는 사람보다 참여하는 사람이 그것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문구에도 많이 공감했다. 들을 때 좋은 작곡가는 누구이며, ‘연주하기’ 좋은 작곡가를 고르자면. 선택에 차이가 있나?
요샌 작곡가 세실 샤미나드(1857~1944)의 작품을 많이 듣는다. 쇼팽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성이 느껴진다. 듣는 것과 연주할 때의 느낌이 다른 작곡가를 고르자면 J.S. 바흐다. 들을 때는 성스러운 분위기인데, 막상 성부별로 연주하면 굉장히 감정적이라는 게 느껴진다.
책에 있는 문장 중 직접 꼽아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사실 이 책에는 서브 메시지가 있다. “사실 이게 끝은 아니다. 당연히, 모든게 끝은 아니다. 이 글은 그 말을 하기 위해 쓰였다. 어쩌면 내 모든 글은 그 말을 하기 위해 쓰이고 있는지도 모른다.”(28쪽) 이 문구가 이를 설명해준다. 책이 단순히 ‘피아노 찬가’로 끝나지 않길 바랐다. 첫 장은 ‘모든 것은 건반으로부터 시작된다’이고, 이에 상응하며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모든 것은 건반으로부터 시작되며, 듣는 이에게서 끝난다. 계속 칠 수만 있다면. 멈추지 않기만 한다면.”
앞으로 또 음악에 대해 글을 남긴다면 무엇이 대상이 될까.
‘음악’이 가진 시간적·물리적 요소 등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철학 에세이를써보고 싶다. 물론 지금은 절대 아니고, 몇십 년 뒤쯤은 되어야 한다. 부디 그 때까지 내 책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길.(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