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꿈나무의 나이테, 5월 어린이날을 맞아 이들의 긴 역사를 촘촘히 살펴본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5월 25일 9:00 오전

COVER STORY

창단 60주년
리틀엔젤스예술단

예술 꿈나무의 나이테

리틀엔젤스예술단은 1962년에 창립한 어린이 민간 예술단이다. 60년의 활동은 한국 근현대사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타임캡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문화사절단의 역할을 수행한 리틀엔젤스예술단은 전쟁 후 빈곤했던 시절, 한국인들의 자부심 고취에 공헌을 했다. 5월, 어린이날을 맞아 리틀엔젤스예술단의 긴 역사를 촘촘히 살펴본다.

                                                                                                                        

사진
강태욱(Workroom K), 리틀엔젤스예술단

 PART 1 소개
리틀엔젤스예술단 _김희선

PART 2 좌담
김덕수·문훈숙·박은영·이다현
_장혜선

PART 3 만남
큰반 단원 박규희 &
작은반 단원 김서윤 _장혜선

PART 4 인터뷰
예술감독 배정혜 _박서정

PART 5 역사
60년의 발자취 _김희선

 

 


PART 1 ABOUT

리틀엔젤스예술단을 소개합니다

©리틀엔젤스예술단

제도와 운영 ➊

준전문 공연단체로서 예술단
8~13세 소녀들

리틀엔젤스예술단(단장 정임순, 이하 리틀엔젤스)은 1962년 선화어린이무용단의 명칭으로 설립되어 1965년 첫 해외 공연 시부터 영어 명칭인 ‘The Little Angles’를 사용했다. 국내에서는 선화어린이예술단, 선화어린이무용단으로 혼용되어 불렸다.  단원은 공식적으로는 “8세에서 13세의 소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실제로 여자 어린이들의 군무가 주요 레퍼토리였기 때문이었는데 단원들은 선발된 이후 3년간의 교육과 훈련을 마친 후 해외 공연에 참가할 수 있었다. 작품 간 휴지부가 없는 빠른 전환이 특징인 공연은 레퍼토리를 언니반(현 ‘큰반’, 12~15세)과 꼬마반(현 ‘작은반’, 8~11세)에 나누어 교차배치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언니반과 꼬마반은 나이뿐 아니라 체격을 고려하여 구분하였다. 피날레 공연인 농악을 위해서는 남사당 출신의 남자 어린이 단원을 특별 “리쿠르트”하여 참가하였다. 대표적인 단원으로는 이성진, 김덕수 등이있다. 순회공연은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5~6개월에 걸친 장기 투어 형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적게는 75회, 많게는 184회에 이르는 공연을 소화했다. 또한 점차 해외 공연 지역이 확대되면서부터는 1진, 2진으로 나누어 지역에 따라 배치하였다. 가장 공연이 많았던 1974년에는 3진까지 나누어 파견하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며 연습, 훈련, 활동 이후 중학교 재학 중 13세가 되면 리틀엔젤스를 졸업한다. 해외 장기 공연에 의한 학교 결석과 학업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해외 공연에 교사가 동행하여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고 장기 결석에 따라 상급학년이나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어 리틀엔젤스예술학교의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리틀엔젤스는 초기 단장(현재 정임순) 체제로 운영되다가 예술단의 성장에 맞추어 무용부와 음악부로 세분화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무용부와 음악부에는 각각 무용, 합창, 가야금 교사를 두어 어린이 단원들이 입단부터 공연무대에 오르기까지 지도한다. 일정 기간 기초연습과 공연작품을 숙지한 단원들은 공연무대에 오르게 된다. 또한 예술단에는 공연을 위한 사무국과 기술부를 두고 기획 및 홍보, 무대, 의상 등을 관리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운영체계는 리틀엔젤스가 ‘어린이예술단’으로 교육과 공연기관의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제도와 운영 ➋

예술단의 해외 공연
뚜렷한 비전과 체계적 운영

설립 초기부터 리틀엔젤스는 해외에서 활동할 어린이민속예술단으로 지향과 한국 민속예술의 해외소개라는 비전을 분명히 하고 예술단 체제 및 해외공연을 위한 정규 단원과 악단, 단원 모집 및 선발, 체계적인 교육, 악단 모집, 후원, 해외 공연 프로모터(기획사) 등의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당시 민간예술단으로는 매우 드문 선진적인 전문단체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이었다. 리틀엔젤스는 첫 미국 투어부터 해외 프로모터를 통해 공연장 섭외와 홍보 마케팅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여러 도시에서 유수의 극장 공연을 현지의 시민 관객을 대상으로 성공적으로 치러낼 수 있었다. 초기 리틀엔젤스 공연은 호텔이나 대학 등지에서 열리기도 했지만 뉴욕의 링컨센터를 비롯한 현지 유명 극장의 무대에 올랐는데, 면담에 의하면 당시 공연장은 “교포가 와서 자리를 채운 것이 아니라 양복을 입은 백인 현지 미국인들이 가득 채워” 공연을 관람했다. 이는 현지 공연계를 잘 아는 현지 매니지먼트와 프로모터가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4차 투어인 1969년부터 1976년까지는 미국의 주요 매니지먼트사인 콜럼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CAMI)가 참여하였다. 당시 CAMI는 한국 연주자로 세계적 활동을 하던 한동일, 정경화, 정명화의 매니지먼트를 맡기도 했고, 구 소련 볼쇼이 발레의 미국 공연을 맡아 미국 유수의 오케스트라도 담당하는 등 가장 큰 네트워크를 가진 매니지먼트였다.

레퍼토리 구성과 특징 ➊

전통춤과 음악
해외용 전통예술 레퍼토리 개발

리틀엔젤스의 전통춤과 음악 레퍼토리는, 당대 전통예술 공연계의 여러 명인이 참여함으로써 한국 전통공연예술의 근현대적 양식과 전통을 계승한 측면과 동시에 해외 무대용 한국적 예술로서 새롭게 창작된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리틀엔젤스 전통춤 공연의 특징으로 3~5분 길이의 짧은 형식, 소품 활용 안무, 의상과 장신구 효과, 군무, 무용극, 민족적 이미지와 테마, 시적이며 유미적 이미지, 한국인의 내재된 정서 표출, 발레와 민속춤의 혼합, 창작 신무용, 와우 이펙트 등이 제시된 바 있다. 리틀엔젤스의 춤은 설립 초기부터 다양한 레퍼토리를 개발하고 실험적으로 무대에 세웠으며 지난 60여 년간의 시간을 거치며 시대에 맞게, 공연의 성격이나 시간에 맞도록 변천해왔다. 춤 레퍼토리 개발과 함께 이들 춤의 반주음악은 초기 참가자들의 참여 이후 조금씩 수정되어 고착된 것으로 보인다. 무용 반주음악의 악기는 음악에 따라, 공연에 따라 장구, 북, 가야금, 대금, 단소, 피리,해금, 양금, 아쟁, 징, 바라, 박 등 다채롭게 구성하였다. 또한 명인들이 홍주의를 입고 아악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따로 연주하기도 했는데 ‘수제천’ ‘염불도드리’ ‘타령’ ‘대금 독주’ ‘중주’ 민요, 시나위 등을 연주했다. 리틀엔젤스에 참여한 명인들은 당시부터 이후까지 국악예술고등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국립국악고등학교, 각 대학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이후 국립국악원,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민속악회 시나위, 김덕수패 사물놀이, 국립국악원 사물놀이 등에서 활동하며 국악의 현대화를 견인했던 예술가들이다. 그런 점에서도 한국 현대 공연예술사에서
리틀엔젤스의 기여는 재평가되어야 한다.

레퍼토리 구성과 특징 ➋

합창
다양한 언어로 부르는 노래

리틀엔젤스는 1970년 가을, 당시 KBS 어린이 합창단의 지휘자로 있던 유병무(1938~2020)를 초빙하면서 정규 레퍼토리에 합창이 들어갔다. 합창은 피날레 공연인 ‘농악’ 이후 바로 연결하여 공연하는데 단원들은 백스테이지에 소도구를 놓고 재등장하는 사이 무대 복판에 피아노가 준비된다. 지휘자가 직접 연주하는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단원들은 2열로 도열하여 화음을 넣어 여러 곡의 짧은 합창곡을 메들리로 노래한다. 초기 레퍼토리는 주로 당대 어린이 합창곡으로 널리 알려진 레퍼토리를 선정하였다. 또한 해외 공연의 성격에 맞추어 해당 국가의 민요, 동요 등을 해당국의 언어로 노래하는 레퍼토리가 개발되어 이후 리틀엔젤스만의 레퍼토리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러한 합창곡이 문화사절단의 외교활동에 유용했음은 물론이다. 일례로 1974년 미국 포드 대통령의 방한 시 청와대에서 초청공연을 한 리틀엔젤스는 꼭두각시와 북춤을 춘 후, 포드 대통령의 모교인 미시간 대학교의 응원가를 합창하여 높은 관심을 이끌어냈다.
합창이 레퍼토리로 편성된 이후 리틀엔젤스는 합창앨범을 출반하는데 현재까지 파악된 음반은 총 8장으로, 이 중에는 리틀엔젤스의 합창곡을 중심으로 출반한 음반도 있고, 싱글 앨범으로 한 곡만을 출시한 음반도 있으며, 영화 OST 등에 참여하여 출반한 음반도 있다.

공연예술사적 의미 ➊

어린이예술단
고아의 나라에서 문화의 나라로

국제 공연예술계에 등장한 한국의 어린이예술단 리틀엔젤스는 당대 국제적으로 활동하던 어린이예술단의 공연 맥락에서 파악해 볼 수 있다. 우선 국내에서 리틀엔젤스에 앞서 활동한 해외 공연에 나섰던 어린이예술단으로 1947년 창단된 서울방송전속 어린이노래회(이후 1968년 KBS 어린이 합창단 개칭)와 1956년 창단 한 후 1년 뒤 해산했다가 1960년에 재창단한 고아로 구성된 선명회 어린이합창단(현 월드비전어린이합창단)이 있었다.
서울방송전속어린이노래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한국에 원조를 하였던 미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한 ‘감사사절단’의 명목으로 파견되었다.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은 전쟁고아로 구성된 합창단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리틀엔젤스도 미국 활동 시 한국의 고아 예술단으로 오해를 받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차원에서 “전쟁과 고아의 나라로 인식되는 한국을 문화국가로” 인식을 전환시키고자 하는 리틀엔젤스 초기의 미션이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어린이예술단의 국제 활동은 당대 명성을 얻은 유럽의 어린이예술단의 활동 차원에서도 고찰이 가능하다. 특히 한국에도 널리 알려졌던 빈소년 합창단은 1926년부터 국제 공연을 펼쳐왔다. 또한 파리 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은 1931년 미국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투어를 진행하고 있었다. 근대에서 현대로 전환되던 시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이념으로 대립되던 냉전이라는 국제정치, 식민지에서 벗어나 국민국가를 수립하던 당시 이러한 어린이예술단의 국제적 활동은 당대 국제정치의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일부 수행한 측면과 함께 국제 평화를 염원하는 당대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짐작이 가능하다. 이러한 차원에서 합창만이 아닌 전통예술을 무대화하여 세계 순회공연을 함으로써, ‘한국적’ 공연예술로 세계무대에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리틀엔젤스만의 독보적 역할을 재평가할 수 있다.

공연예술사적 의미 ➋

문화사절단 및 평화사절단
냉전을 넘어 화합으로

1960년대 문화사절단 시기 리틀엔젤스의 사명은 세계 속 신생국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이념 대립의 냉전체제 가운데 반공의 국가 정체성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초기 리틀엔젤스의 사명이 한국을 알리는 일에 있었다는 것은 리틀엔젤스의 공연 종목이 전통예술이었다는 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국제적으로 북한과의 경합 속에 한국 전통예술을 통해 외교적 차원에서 공적인 국가 사절단의 역할을 수행한 점은 당대의 맥락 속에 의미 있는 행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리틀엔젤스의 활동을 국가 사절단의 활동으로만 한정 짓는 것은 리틀엔젤스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이다. 당대 최고의 매니지먼트인 CAMI와의 협력을 통해 글로벌 공연예술계의 한복판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리틀엔젤스를 당대 글로벌 공연예술계의 차원에서 재평가할 중요한 명분이 된다. 또한 1990년 이후 러시아-중국-북한으로 이어지는 민간예술단으로서 리틀엔젤스의 평화사절단 역할 수행은, 글로벌 차원에서 탈냉전기 맥락에서 이루어졌음을 기억할 때 리틀엔젤스의 역할이 이념을 넘는 국제 평화와 인류의 화합에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김희선(국민대 교양대학 교수·음악인류학 박사)
출처 ‘리틀엔젤스예술단의 공연예술사적 의미’(리틀엔젤스
예술단 창단 6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요약·발췌 박서정 기자

 


PART 2 DIALOGUE

마음이 고와야 예술이 곱다

동문 좌담 | 김덕수·문훈숙·박은영·이다현

©강태욱

 

60주년을 기리며 세대별 동문 4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각기 다른 시간에 활동했지만, 그들의 추억에는 리틀엔젤스의 전통이 흐른다. 좌담에 참석한 동문 외에 리틀엔젤스는 소프라노 신영옥, 발레리나강수진, 배우 황정음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걸출한 동문을 배출했다.

 


어린 날의 추억이 지금의 ‘나’로

리틀엔젤스예술단(이하 리틀엔젤스) 세대별 동문을 대표해 좌담에 참석하셨습니다. 처음 리틀엔젤스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김덕수  1965년,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인데요. 리틀엔젤스 관계자를 통해서 우리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어요. 제가 여러 언론에 ‘천재 소년’으로 이름이 오르던 시기였거든요. 장구를 잘 치는 김덕수를 스카우트하려고 그러신 거죠. 당시 저는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중고)를 장학생으로 다니고 있어서 마음대로 공연하러 다니기가 힘들었어요. 한국민속가무예술단의 일본 투어 공연도 내정돼 있었고요. 그래서 그 다음 해부터 리틀엔젤스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세계최대의 그 평화 축제에 리틀엔젤스가 가슴에 자랑스러운 태극기를 품고 참여했어요. 그때부터 리틀엔젤스와 함께 세계 곳곳을 누빈 것 같습니다. 많은 공연을 함께했기에 리틀엔젤스의 역사를 아는 데까지는 다 압니다.

문훈숙  저는 아버지(박보희 이사장)가 리틀엔젤스를 운영하니까 자연스레 합류하게 됐는데요. 제가 세 딸 중 제일 핏기가 없고 말라서 한번 시켜보자고 하신 것 같아요. 열 살 때까지 미국에 살다가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왔어요. 아버지는 한국어도 못하는 저를 한국에 데려다주시곤 일주일 후에 다시 미국으로 가셨어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때부터 무용 인생이 시작된 거죠. 1973년이었어요.

이다현 저는 세 살 때 발레, 일곱 살 때  한국무용을 시작했어요. 무용학원을 다니다가 제일 친한 언니가 리틀엔젤스 시험을 본다고 해서 따라왔어요. 그때 태평무를 췄던 것 같아요.

박은영 태평무라니…. 그 사이 난이도가 높아졌네요. 제가 오디션을 볼 때는 기본 동작만 따라 하는 거였거든요.

김덕수 그런데 그 기본 동작이 꽤 어려웠어요. 쉬운 동작이 아니었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리틀엔젤스는 또래 집단에서 함께 무대를 만들며 공동체 경험을 통해 사회 일원으로 성장하도록 기여하고 있습니다. 리틀엔젤스와 함께한 어린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다현 저는 리틀엔젤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요.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예술과 관련된 일이고, 예술단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고요. 리틀엔젤스 활동할 때는 사춘기를 겪는 중요한 성장기잖아요. 리틀엔젤스에서는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고, 마음이 고와야 노래가 곱고, 마음이 고와야 얼굴도 곱다’는 말을 계속 들었어요. 이 구호를 미스코리아 나갈 때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왜냐하면 내면에서 아름다움이 나와야지 외면으로 나오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리틀엔젤스 다닐 때 정신 교육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당시에는 와닿지 않았는데, 살면서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때 교육이 저에게는 크게 작용했습니다.

박은영 KBS 아나운서로 입사해서 큰 무대에서 사회를 봤는데요. 관중이 몇만 명씩있는 행사의 사회를 볼 때마다 선배들이 “너는 왜 안 떠느냐”는 거예요. 아마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 섰던 습관들이 몸에 배서, 긴장감이 밖으로 표출 안 되고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 있던 것 같아요. 사실 여학생들은 단체 생활을 할 일이 별로 없는데, 리틀엔젤스 경험 덕분에 아나운서실 적응이 빨랐어요. 아나운서실은 여성의 비율이 훨씬 높거든요. 남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도 어릴 때 리틀엔젤스 활동을 하면서 영향을 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문훈숙 해외 공연 때 호텔에 다섯 명이 한방에 들어가요. 그럼 방장 언니가 있고, 어린아이들은 언니가 하라는 대로 해요. 단체 생활을 하면서 질서를 배우는 거죠. 리틀엔젤스에서는 사회성 배우는 걸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미국 투어를 하면 늘 버스 운전사에게 노래를 불러드려요. “아저씨 아저씨 우리를 위하여 수고합니다”라는 가사가 담겼죠.

박은영 생각해 보면 항상 인사를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해외를 가면 꼭 그 나라의 말로 인사하는 걸 교육받았고요.

문훈숙 리틀엔젤스는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눈으로 듣는 것’을 강조해요. 눈을 마주치면서 어른과 대화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죠.

김덕수 공동체 생활 속에서 인성을 배운 거는 평생 갑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다 사실이에요. 저는 무대 밖에서 단체 운영에 관한 것들도 많이 배웠어요.

 


문화사절단 역할을 하다

해외 활동이 어렵던 1960년대부터 리틀엔젤스는 미국과 유럽 순회공연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며 그야말로 ‘문화사절단’ 역할을 했습니다

리틀엔젤스예술단 활동 시기 1965~1974 김덕수(1952~) 5세 때 남사당 무동(새미)으로 데뷔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만들어 사물놀이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서며 명성을 쌓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제자를 양성했다. 현재 리틀엔젤스예술단 동문회장이다.

 

 

김덕수 모든 공연이 다 중요했죠. 당시 선진국에서 보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전쟁’밖에 없었어요. 선진국에서 밀가루 원조를 안 해주면 우리는

먹고 살 수 없었죠. 카네기홀이나 케네디 센터에서의 공연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던 주요 공연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생각나는 게 캘리포니아 스테이트 페어인데요. 무대에 오르는 아티스트가 전부 월드스타들이었어요. 레드 제플린과 같은 세계적인 록밴드와 같은 무대에 서기도 했고요.

 

 

문훈숙 영국 BBC의 ‘블루 피터’ 쇼에 나간 것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어요.

김덕수 제가 어른이 되어서 ‘블루 피터’ 쇼에 나갔는데, 리틀엔젤스로 방송에 나온 적이 있다고 하니까 예전 파일을 찾아서 보여주더라고요. ‘리틀엔젤’이 ‘올드엔젤’이 되어서 다시 왔다면서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나요.

문훈숙 본 공연도 중요했지만, 그 나라의 대통령 관저에서 공연한 것도 특별한 경험이었죠.

리틀엔젤스예술단
활동 시기
1973~1977 문훈숙(1963~) 선화예술학교, 영국 로열 발레학교,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를 졸업했다. 유니버설발레단 창단 멤버(수석무용수)이며, 1995년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으로 취임했다. 2004년 유니버설문화재단 이사장에 위촉됐다.

 

이다현 저는 2010년도에 참가한 ‘6·25전쟁 60주년 기념 참전 16개국 순회 감사공연’이 생각나요. 당시에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지 몰랐는데요. 공연이 끝나면 단원들이 참전용사들에게 메달을 걸어드렸어요.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해서요. 그분들이 눈물을 엄청 흘리시더군요. ‘기브미 어 초콜릿’하던 아이들 다 어디 갔냐고 하면서, 잘 자란 한국의 아이들이 뿌듯하다고 얘기해 주셨어요. 콜롬비아 공연에서는 고산병 때문에 단원들이 공연하다가 한 명씩 쓰러져서 실려 나가는 거예요. 마지막 합창할 때는 반 정도만 남아서 공연했어요. 당시 저는 고학년이어서 책임감을 느끼며 끝까지 공연을 마무리하고 쓰러진 기억이 나네요.

 

 

박은영 분쟁 지역에 공연하러 가는 게 흔한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이스라엘을 갔어요. 항상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고 했는데 막상 가니까 평화롭고 햇살이 좋은 거예요. 그런데 출국이 어려워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이집트에 가서 피라미드 구경
하다가 며칠 더 보내고 한국에 돌아온 기억이 나요.

 


앞으로 이어나갈 리틀엔젤스의 정신

리틀엔젤스 레퍼토리 중 성인이 된 지금에서 봐도 어린이 예술단이 소화하기엔 난이도가 높다고 생각하는 작품이 있나요?

박은영 북춤이요. 제가 감히 말씀을 드리자면 국립무용단만큼 리틀엔젤스 북춤 수준도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김덕수 사실 리틀엔젤스가 국립무용단보다 북춤 선배죠. 국립무용단에서 북춤 추기 전부터 리틀엔젤스에서 먼저 시작했으니까요. 북 개수도 달라요. 리틀엔젤스는 육고무를 추잖아요. 대부분 삼고무 아니면 오고무를 추거든요.

 

리틀엔젤스예술단이 60주년을 맞았습니다. 리틀엔젤스의 전통, 앞으로도 유지되었으면하는 ‘리틀엔젤스의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문훈숙 아까도 언급한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고, 마음이 고와야 노래가 곱고, 마음이 고와야 얼굴도 곱다’는 말이 진짜 중요해요. 누구나 아름답고 싶지만 그 아름다움이 겉치레가 아니라 인성에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을 아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리틀엔젤스예술단
활동 시기
2006~2012 이다현(1997~) 선화예술중·고등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2019년 미스코리아 미에 당선됐다.서울시무용단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리어예술단을 창단해 이끌고있다.

방법으로 알려주는 거예요. 리틀엔젤스가 존속하는 한 이게 굉장히 중요한 정신, 전통이 될 거예요. 리틀엔젤스 단가에도 애천, 애인, 애국의 정신이 담겨있어요.

이다현 예술은 사실 돈을 보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명예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리틀엔젤스 활동 때에 “우리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예술가의 봉사 정신을 항상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저는 그 정신이 예술을 순수하게 지키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리틀엔젤스에서는 어린 나이였는데도 아티스트로서 존중을 해주셨어요. 모든 구성원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걸 너무 잘 알았죠. 그런 순수함이 리틀엔젤스의 롱런 비결이 아닐까요.

 

리틀엔젤스 동문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때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다현 저는 어린 시절 리틀엔젤스를 통해 외국을 많이 경험해 본 게 좋더라고요. 유명 인사들을 만났던 경험도 뿌듯함으로 남아 있고요. 리틀엔젤스는 단복에 항상 태극기를 달고 다닙니다. 리틀엔젤스 출신이라는 게 언제나 제 자부심이에요.

문훈숙 그동안 리틀엔젤스가 어린이 단체라는 이유로 예술성에 대한 주목을 못 받았죠. 60주년을 맞으면서 리틀엔젤스의 지난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어 흐뭇해요. 우리나라 문화 발전에 얼마나 많이 기여했는지 다시금 알게 되는 기회인 것 같습니다.

박은영

리틀엔젤스예술단
활동 시기
1991~1998 박은영(1982~) 선화예술중학교, 국립국악고등학교, 이화여대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2007년 KBS 33기 공채 아나운서로데뷔했다. 2020년 KBS를 퇴사하고, 프리랜서 방송인으로 활동하고있다.

지금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있지만, 이전까지는 소위 전쟁 고아들이 있는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잖아요. 그때 해외에서 국위 선양한게 지금으로 치면 BTS급인 것 같아요. 그게 자부심으로 이어질 수 있던 것 같아요. 저는 한국무용을 전공했기에 우리 문화의 뿌리를 지키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리틀엔젤스가 지켜야 할 정신은 우리 문화의 뿌리를 잘 지켜나가는 거겠죠.

 

앞으로 ‘교육단체’와 ‘공연단체’의 기로에서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하나요?

김덕수  리틀엔젤스의 교육 가치는 정말 핵의 덩어리예요. 우리의 것을 중심으로 이제는 세계 속에 우뚝 선 모습으로 리틀엔젤스
가 존재해야죠. 개인적인 바람은 어느 순간부터 리틀엔젤스 단원들이 고학년이 되면 다른 세계로 가는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리
틀엔젤스가 일자리 창출에도 신경을 써서지구촌의 아름다운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는 교육, 인재 양성을 이루길 바랍니다.

문훈숙  리틀엔젤스를 아이들로 구성한 이유는, 어린이는 평화의 상징이기 때문이에요. 예술은 마음을 정화시켜요. 그런 뜻으
로 세워진 리틀엔젤스는 교육이 바탕이 돼서 예술 활동을 하는 것이죠. 아마 앞으로도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거예요.

 

 

글 장혜선 기자

 

 


PART 3 MEET

예술의 열매를 먹으며
꿈을 키우는 곳

전통적으로 리틀엔젤스예술단 공연은 중학생으로 구성된 ‘큰반’과
초등학교 고학년인 ‘작은반’ 작품을 번갈아 무대에 올린다.
설레는 마음으로 리틀엔젤스예술단 활동을 하고 있는 두 단원을 만나 소감을 물었다.

글 장혜선 기자

 


“선화예술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박규희입니다. 리틀엔젤스예술단에 입단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어요. 어머니가 SNS를 둘러보시다가 신입 단원 모집 공고를 보고 오디션에 보게 되었거든요. 처음으로 섰던 정기공연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처음으로 큰 무대에선 경험이었는데요. 관객이 뜨겁게 박수치던 것이 참 인상 깊었어요. 저는 리틀엔젤스예술단의 무용 수업을 제일 좋아해요. 제가 가장 흥미를 가지고 임할 수 있는 시간이죠. 앞으로 한 번은 꼭 서보고 싶은 작품은 ‘풍잠무’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작품이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해보고 싶어요. 무용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무용 수업이 제일 어렵기도 해요. 몸을 쓴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하지만 리틀엔젤스예술단에서의 시간들을 발판 삼아 꼭 무용교수가 되고 싶어요. 매 수업 시간마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있어요. 저도 꼭 좋은 무용 지도자가 되도록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할 거예요!”

박규희(리틀엔젤스예술단 큰반)

 


“서울 광남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인 김서윤입니다. 여섯 살 때 리틀엔젤스예술단 체험교실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그때 언니들이 너무 예쁘고 멋있어 보여서 리틀엔젠스예술단 오디션에 지원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예술단에 직접 나와서 수업을 듣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컸어요. 하지만 온라인 수업에 열
심히 참여했답니다. 기초체력을 쌓고 한국무용의 기본을 복습하면서 기초를 다지는 시간을 가졌어요. 저는 무용 수업을 할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요즘은 무용 시간에 신입 단원들에게 제가 무용을 알려주고 있는데 마치 선생님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들어 더욱 즐겁게 임하고 있죠.  2020년 1박 2일 여수 공연이 생각나요. 가족과 떨어져 처음 잠을 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선생님이 끓여주신 라면 맛도 잊을 수 없습니다. 아, 그리고 공연 끝인사를 제가 맡아서 더 기억에 남는 공연이었죠! 큰반 언니들 작품 중 하고 싶은 작품이 정말 많아요. 그중 배정혜 예술감독님께서 안무를 하신 ‘바라다’ 작품을 꼭 하고 싶습니다. 센터 역할에 꼭 서고 싶어요! 앞으로 저는 한국무용을 전공해 리틀엔젤스예술단의 선생님이 되는 게 제 꿈입니다. 지금 느끼고 배웠던 것을 후배들에게 잘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서윤(리틀엔젤스예술단 작은반)


PART 4 INTERVIEW

‘천재 소녀’가 만드는
어린이를 위한 무용

리틀엔젤스예술단 예술감독 배정혜

 

©강태욱

1960년대는 한국무용의 현대화 흐름이 활발했다. 1962년 창단한 리틀엔젤스의 무용 레퍼토리도 이러한 예술 경향을 띤다. ‘부채춤’ ‘처녀총각’ ‘꼭두각시’ 등 대표 레퍼토리 상당수가 익숙한 한국춤을 재구성했다. 대원칙이 있다면 ‘어린이 단원이 최대한 돋보여야 한다’는 것.

2018년, 리틀엔젤스는 창단 60주년을 앞두고 무용가 배정혜(1944~)를 상임안무가로 초빙했다. 배정혜는 국립국악원 무용단(1986~1989), 서울시립무용단(1989~1998), 국립무용단(2000~2002, 2006~2011)에서 예술감독과 상임안무가직을 두루 지냈다. 1970년대부터 전통춤을 재창작하는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어느덧 팔순을 앞둔 그를 줄곧 따라다닌 별칭은 ‘천재 소녀’다. 다섯 살 때부터 한 번 본 춤은 그 자리에서 곧장 익혔다. 1955년 명동 시공관(현 국립극단 명동예술회관)에서 열린 배정혜(당시 이름 배숙자) 무용 발표회는 열두 살 소녀의 춤을 보기 위해 몰린 인파로 붐볐다. 그런 그가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한 것이 리틀엔젤스의 작품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맞는 안무”를 만드느라 고심했다고. 리틀엔젤스에서 ‘궁’(2019) ‘미얄’(2019) ‘설날’(2020) 등 7편의 신작을 발표하며 “이제야 노하우가 생겼다”는 그에게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무용 레퍼토리 개발에 관해 물었다.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겠다며 주요 직책에서 물러났다. 상임안무가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리틀엔젤스가 창단할 때 20대 초반이었다.당시만 해도 외국에서 “코리아” 하면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꼬마들이 한국춤으로 우리나라를 알린다고 하니, 참 기특한 예술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외부 전문가로서 리틀엔젤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몇 십 년째 같은 작품으로 무대에 오르는 게 아쉬웠다. 더 늙기 전에, 새로운 걸 하고 싶은 의욕이 있을 때 리틀엔젤스에서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맞는 레퍼토리를 개발해주자 싶었다. 예술단은 프로그램이 변해야 발전하니까.

리틀엔젤스에서 발표한 작품은 신선하면서도 기존 레퍼토리와 잘 어울린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무용 창작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어린이 안무는 그나마 나았다. 내가 꼬마 세계로 들어가 깜찍하게 만들면 된다. 그런데 청소년은 애도 어른도 아닌 그 중간이다. 너무 깜찍하면 유치하고, 또 너무 어른인 척하면 징그럽다. 고민을 거듭한 매 순간이 나와의 투쟁이었다. 보통 착상이 떠오르면 5~7분짜리 안무는 하루 이틀 안에 끝난다. 그런데 리틀엔젤스에서는 한 작품 가지고 한두 달을 고민하고도 아이들에게 맞게 계속 다듬었다.

‘맞춤형 안무’라고 하면…?

리틀엔젤스는 일단 기초가 부족하다. 여기서 무용을 배워 공연한다. 재료가 준비되지 않았는데 요리해 맛을 내야 하는 상황인 거다. 그렇다고 기본 동작으로만 안무를하면 관객이 재미가 없고. ‘잘 추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숨은 노력이 있었다.(웃음) 어린이 예술은 성인과는 다른 예술 감각이 나오되, 유치해서는 안 된다. 내용적인 깊이보다는 시각적인 환상성이 필요하고, 작품이 철학적이기보다는 신나야 한다.

어린 나이에 무용을 시작했다. 단원들을 보면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저만 했을 때 내가 무슨 춤을 췄고, 얘만 했을 때 무슨 춤을 췄는지가 생각난다. 가끔 못 추는 아이들 보고 “너만 했을 때 나는 발표를 했다”고 한다.(웃음) 어려서부터 춤을 췄는데 이제 다 늙어서 그 나이대 꼬마들을 가르치니, 인생이란 게 참…. 인생의 삼라만상을 표현한 게 예술이라는 생각이든다.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쳤느냐, 뭘 위주로 가르쳤느냐,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게 예술인 거지.

남은 임기, 이루고 싶은 과업이 있다면.

리틀엔젤스에 좋은 레퍼토리가 더 많이 생겼으면 하는 것이다. 전문 단체라면 20~30개의 레퍼토리로 돌아가야 한다. 개인적으론 요즘 ‘바기본’을 다시 연구하고 있다. 내가 한국춤의 호흡을 정리해 실제로 적용할 수 있게 한 훈련법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

글 박서정 기자


PART 5 HISTORY

60년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1962년 창립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민간 예술단으로 활약해 온 리틀엔젤스예술단(이하 리틀엔젤스)의 60년은 한국 근현대사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타임캡슐이다. 리틀엔젤스가 창립되어 해외 공연을 펼치기 시작한 1960년대는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이념 갈등, 민족 전쟁과 분단을 거쳐 국민국가 수립을 이루기까지 매우 혼란했던 시기다.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문화사절단의 역할 수행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다. 리틀엔젤스는 당대의 한국인들에게 한국의 자부심 고취에 큰 공헌을 한 문화적 아이콘이기도 했다. 리틀엔젤스는 당대로서는 드물게 전문예술단체로서의 운영 체계를 가지고 해외 매니지먼트를 통해 투어를 성공적으로 운영한 선진적 예술 단체였다. 무대 양식화된 레퍼토리와 공연 형식은 이후 해외 레퍼토리의 전범이 되었다. 리틀엔젤스는 당대 한국과 글로벌 공연예술계에 등장한 “어린이예술단”의 맥락 안에서 존재 의미를 파악해 볼 수도 있다. 이들의 존재는 특히 한국에서 예술의 조기 전문교육과 여성 예술가의 배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리틀엔젤스의 의미를 살피기 위해서는 한국과 글로벌 근현대기 공연예술사의 입체적 고찰이 필요하다.

1962~1964
창설기
선화어린이무용단 | 한국의 이미지


➊ 경복궁 안에서 프로그램 사진 촬영중인 리틀엔젤스(1965년)

리틀엔젤스는 1962년 5월 5일 선화어린이무용단의 명칭으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에 의해 창설되었다. 1963년 7월 27일에는 통일교 교인의 자녀로 구성된 17명의 단원으로, 신순심(1939~)의 무용지도로 낙원동 중앙문화회관 무용연구소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빈곤,고아 등 낙후된 한국의 이미지를 예술공연을 통해 문화국으로 높이고자 하는 취지로 민속예술단이자 어린이예술단으로 구상되었다. 1964년 박보희(1930~2019) 총재가 귀국하여 합류하기 전까지 선화어린이무용단은 단원 모집, 훈련, 레퍼토리 구성을 하는 기간을 가졌으며 교도소, 미군 기지 등의 위문공연과 교회 공연 등을 진행하였다. 초기 교회 식구들의 자녀들로만 구성되었던 단원들에 무용을 공부하고 있던 어린이들을 추가적으로 모집하여 점차 단원의 수를 증가시키고 기초 훈련을 시작했다. 이화여대에서 발레를 전공했던 신순심 안무가는 음악가이자 안무가 박성옥(1908~1983)을 초빙했다. 그는 국악과 무용반주, 아동무용단을 이끌었던 경험이 있었던 경험이 있었다. 월북 음악가 최승희의 해외 공연에 동행하기도 했는가 하면 신무용 안무, 무용 반주 음악, 어린이 무용, 어린이 무용교육의 전문가였다. 이 시기 박성옥과 신순심을 통해 다양한 초기의 소품 작품들이 구상되고 시범적으로 운용 되면서 레퍼토리가 준비되었다. 리틀엔젤스의 미국 진출이 구체화된 일은 1964년 9월, 미국의 초대 선교사로 파견된 박보희 총재가 당시 양유찬 주미한국대사와 함께 미국에 한미문화자유재단(KCFF)을 설립하면서이다. 한미문화자유재단은 “한국의 문화와 자유 정신을 선양” 하고자 조직되었고, 자유아시아방송(Radio of Free Asia)과 리틀엔젤스를 중요한 문화 사업으로 설정하였다. 양유찬 당시 주미대사의 도움으로 당시 알리 버크 해군 제독을 총재로, 아이젠하워(공화당)와 트루먼(민주당) 등 두 전직 미국 대통령을 명예총재로 추대하였으며, 그 외에도 미국의 정계, 재계, 언론계의 유력인사들로 이사회와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➋ 미국 게티스버그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위한 특별공연(1965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어전 공연(1971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어전 공연 (1971년)

 

 

 

 

 

 

 

 

 

1965~1976
문화사절단 활동기
자문화에 대한 자부심 | 한국의 문화 아이콘


리틀엔젤스는 1965년 9월 20일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사저 공원에서 첫 해외 공연을 시작하였다. 공연은 그간 준비한 신무용 소품으로 ‘파고다’, 무사놀이, 장고춤 등으로 한 시간 반 정도의 공연을 진행하였다. 무용은 함께 참여한 악사들의 라이브 반주로 진행되었다. 이어 3개월간 미국의 대표적 공연장인 링컨센터의 최초 외국인 공연과 백악관 초청공연 등을 포함하여 미국의 25개 주 70개 도시에서 74회의 공연을 진행했다. 당시 미국의 유명한 TV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번 쇼에도 출연하여 북춤, 장고춤,농악을 선보였는데 에드 설리번도 리틀엔젤스의 자문 위원이었다.

첫 미국 공연 이후 1976년까지 12년간 캐나다, 호주, 일본, 유럽, 동남아, 남미에 이르기까지 세계투어 공연을 진행했다. 특히 해외에서는 각국의 정상을 만나고 각종 국제행사 등에 초청받았다. 특히 1971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전 공연은 리틀엔젤스 공연에서 특히 중요한 공연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러한 각국 정상들과의 공연이 리틀엔젤스뿐 아니라, 국가의 산업 발전과 외교가 확장되던 1960~70년대 문화사절단으로서 전통예술 공연으로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였음은 물론이다. 유럽에 이어 1974년에는 동남아시아, 이란을 비롯한 중동, 아프리카 지역으로, 1975년에는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로 지역을 확장하였다. 이외에도 유엔, 유니세프, 일본 적십자사 등 국제 평화 기관의 초청공연으로 리틀엔젤스는 한국의 문화사절단을 넘어 세계의 평화사절단 활동으로 연결되는 단초를 마련하기도 한다. 문화사절단으로 해외에 한국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활약한 리틀엔젤스는 당대 한국의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첫 해외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리
틀엔젤스는 1966년 2월 서울, 부산, 대구에서 귀국 공연을 선보였다. 자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높지 않던 시기, 리틀엔젤스의 존재를 통해 국내적으로도 전통예술 공연과 한국 문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정부 공식 문화사절단으로서의 활동이 시작된 1968년 이후에는 국내 개최 주요 국제행사와 외국 대통령 방한 시 특별 공연 등은 리틀엔젤스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1969년 니제르 공화국 대통령 방한, 1974년 미국 포드 대통령 방한, 1975년 가봉 봉고 대통령 방한 특별 공연 등 외교 행사에 참여하는 문화사절단으로서의 역할을 지속했다.  리틀엔젤스의 국내 활동은 공연을 넘어 영화, 음반, 합창 활동으로 확장되었다.

1977~1989
민간예술단 전환기
어린이예술단이자 민간예술단으로 활약


리틀엔젤스는 1976년 미국 공연 이후 해외 공연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예술계의 맥락에서 1970년 국립무용단의 설립과 무용단을 신설한 국립국악원 등 국립공연단체가 체제를 갖추며 국가 문화사절단의 해외 공연을 주도하게 되자 태생적으로 민간단체이자 어린이예술단인 리틀엔젤스예술단에게 주어졌던 문화사절단의 역할은 지속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에는 1985년 ‘츠쿠바 세계박람회 한국의 날’ 특별 공연에 참가한 일본 공연이 유일한 리틀엔젤스의 해외 공연이었다. 이 시기 리틀엔젤스는 국내에서 개최된 다양한 예술제, TV 출연, 주한 외국인 행사, 엑스포, 서울올림픽, 서울장애자올림픽 등 국제 메가 이벤트에 참가하고 어린이 관련 행사, 합창 행사, 크리스마스 콘서트 등을 개최하며 국내 민간예술단 활동에 집중했다. 서울올림픽에서는 리틀엔젤스 48명의 단원들이 북춤을 개회식에서 선보여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로부터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서울장애자올림픽에서는 ‘북의 제전’이라는 작품에 국립무용단 55명과 함께 리틀엔젤스 48명이 북춤을 공연했다. 특히 1981년 리틀엔젤스 예술회관(현 유니버설아트센터)이 준공되자 리틀엔젤스는 민간예술단으로서 안정된 거점을 확보하여 공연과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공고히하는 계기가 되었다.

➌ 미국 독립 200주년
특별 축하 공연(1976년)

➊미국 독립 200주년
특별 축하 공연(1976년)

➋ 서울올림픽 개막식(1988년)

 

 

 

 

 

 

➎ 콜롬비아에서 열린
한국전 참전용사에 대한 보은공연에서 화려한 부채춤을 선보였다(2010년)

➍ 구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1차 세계언론인회의 참석자를
위한 특별공연 관람후 영부인
라이사 여사와 함께(1990년)

 


1990~현재
평화사절단 활동기
문화의 다리 | 북한 공연


민간예술단으로 전환을 마친 리틀엔젤스는 1990년 일본 베아트(BEART) 음악협회 초청 일본 전국 순회공연을 시작으로 해외 공연을 재개한다. 리틀엔젤스 평화사절단 활동기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공연은 “리틀엔젤스, 철의 장막을 뚫다”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넘나드는 자유의 천사들”로 널리 홍보된 1990년 구소련 모스크바 공연이다. 이 공연은 1990년 문선명 총재와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크렘린 궁 회담(1990년 4월 11일)에 리틀엔젤스가 민간예술단으로 참여하여 공연한 것이었다. 1990년의 모스크바 공연은 1991년 소련의 해체로 냉전 종식 이후 리틀엔젤스의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주요 공연으로는 구소련(1990), 러시아(1991), 이스라엘(1996), 북한(1998), 중국(2001), UN 참전 16개국 순회공연(2010~2012), 6.25 전쟁 UN 의료지원국 순회감사공연(2011) 등이다. 앞서 국제적으로 냉전 시기이던 문화사절단 활동기, 반공을 명분으로 미국, 유럽, 반공 아시아와 남미 지역에 “파견”되었던 것과 비교하여 탈냉전의 행보를 보인 이 시기는 평화사절단 활동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평화사절단 시기 가장 중요한 공연은 1998년 성사된 민간 최초의 북한 공연(단장 조성숙)이다. 5월 1일에서 12일에 걸쳐 총 38명의 단원이 북한을 방문하고 평화봉화예술극장(5월 4~5일)과 만경대 학생소년궁전(5월 7일)에서 공연이 올려졌다. 1부에서 화관무, 처녀총각, 부채춤, 시집가는날, 가야금 병창, 밤길, 북춤, 2부에서 장고춤, 꼭두각시, 강강수월래, 탈춤, 농악, 합창이 연주되었다. 이들의 방북 일정은 공연뿐 아니라 주요 기념지 방문, 만찬,관광, 북측 공연 관람 등이 포함되었다. 이 평양 공연은 실제로 민간 남북 교류로 이어졌는데, 2000년 5월 24~30일, 평양학생소년예술단 서울 공연이 답방으로 초청된 것이다.

앞으로의 과제
세계 예술 다양성 | 인류의 예술에 기여


리틀엔젤스는 전후 한국의 이미지를 전 세계에 문화국으로 전달하고 한국 고유의 전통예술을 세계에 소개하는 일에 공헌하였다. 식민지의 단절의 역사로 인해 현대로의 전환을 모색하던 전통예술이 국가적으로 인정받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리틀엔젤스의 공연 레퍼토리가 한국형 해외 공연물의 전범과 지향을 제공하고 당시의 민간 예술가들에게 해외 공연의 기회와 일정한 활동의 발판을 제공하고 생활을 보장했다는 점도 리틀엔젤스의 주요한 기여라 할 것이다. 리틀엔젤스의 미디어 노출은 예상치 않은 다른 여러 효과를 가져왔는데 특히 국내에서 수많은 당대 어린이들과 부모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 점이다. 이들의 명성과 대중성으로 한국 공연예술계에 예술 조기교육과 여성 예술가의 등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틀엔젤스의 한계라면 자생적인 공연단체가 아니라 어린이 단체였다는 점과 이들의 활동이나 역량이 당장 예술계 안으로 수렴되지 못하고 예술계의 흐름과 분리되어 있어 공연예술계에 변화를 적극적으로 견지할 수 없었다는 점은 아쉬운 점이자, 그간 리틀엔젤스예술단의 활동이 공적인 현대 공연예술사 안에서 평가를 받지 못한 지점이라 할 수 있겠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중요했던 국가 수립기와산업 발전기 리틀엔젤스예술단의 국가대표 문화사절단의 역할은 충분히 평가받을 가치 있는 작업이었다. 또한 이후 민간예술단으로서의 활동과 탈냉전기 평화사절단으로서 세계 평화를 향한 발걸음과 도전은 글로벌 시대에 한국 공연예술이 세계 예술 다양성에 기여할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사명이다. 향후 세계적 명성의 리틀엔젤스가 환경이나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도 주목하여 세계적 예술운동으로 전개한다면 인류사회의 예술의 기여를 견인할 미래의 역할로 기대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김희선(국민대 교양대학 교수·음악인류학 박사)
출처 ‘리틀엔젤스예술단의 공연예술사적 의미’(리틀엔젤스예술단 창단 6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요약·발췌 박서정 기자


2011

독일 베를린 대성당에서의 합창공연

6·25전쟁에서 간호사로 한국을 도와주었던 스웨덴 전직 간호사 케스틴 조나슨 자택을 방문한 리틀엔젤스

 

 

 

 

 

 

 

 

                  2020                                                            2022

6·25전쟁 70주년 기념 리틀엔젤스 보은공연

두바이 엑스포(EXPO) 2020 특별공연

 

 

 

 

 

 

 


리틀엔젤스예술단 출신 예술가

강수진 |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리틀엔젤스 세계 순회 공연
15·16차 참여

신영옥 | 소프라노
리틀엔젤스 세계 순회 공연
6·7·9·11차 참여

황정음 | 배우
리틀엔젤스 단원 활동
1993~2000년

박한별 | 배우
리틀엔젤스 단원 활동
1992~2000년

 

 

 

 

 

 

 

 

김운미 | 한국무용가
창단 멤버,리틀엔젤스
세계 순회 공연 1차 참여

 

곽은아 | 가야금연주자
리틀엔젤스 세계 순회 공연
10·13·15차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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