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 부흐빈더 피아노 독주회 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7월 1일 9:00 오전

EDITOR’S NOTE choice 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노련함과 신선함이 돋보인 내한공연

 

노장의 너그러움과 유연함

돌프 부흐빈더 피아노 독주회

6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국내 관객은 루돌프 부흐빈더(1946~)의 베토벤 연주에 친숙하다. 2017년과 2018년 내한 당시 베토벤 사이클을 열었고, 지난해에는 베토벤 소나타와 디아벨리 변주곡을 연주하며 변하지 않는 해석으로 그의 건재함을 확인시켰다. 이번 내한의 2부에서도 베토벤의 소나타 10번과 23번 ‘열정’이 안배되어 베토벤 초기 작품의 철저한 원칙주의와 중기 작품의 유연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뜻깊은 건 그동안 내한에서 듣기 어려웠던 슈베르트의 즉흥곡 D935와 브람스의 인테르메조 Op.119를 만나볼 수 있어서였다.

즉흥곡과 인테르메조는 기존의 템포보다 빠르게 전개됐다. 부흐빈더는 작품의 분위기와 감상에 젖기보다 빠르게 음악을 읽어가며 작품의 구조와 형식에 초점을 둔 듯했다. 한 가지를 얻으면 반드시 내줘야 하는 법. 이러한 해석으로 화성이 공명하는 동안 느낄 수 있는 작품의 뉘앙스나 분위기는 놓치게 되었지만, ‘인테르메조’와 ‘즉흥곡’을 독립적인 한 작품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건 그간 세월이 빚은 작은 것에 욕심 부리지 않는 노장의 너그러움일 것이다. 70대 중반인 그에게 젊은 연주자들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무리는 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에게 작품 해석이 ‘엔진’이고, 악보가 ‘내비게이션’이라면, 그의 1부 연주는 ‘453마력의 V12엔진’과 ‘고성능 내비게이션’을 장착한 기름 없는 롤스로이스 팬텀 같았다. 서두른 템포로 인해 무너진 스케일이나 곳곳에 빠진 화음, 페달을 밟아 무마시킨 음 등은 아쉬움을 남겼다.

글 임원빈 기자 / 사진 빈체로

 

인상적인 가벼움

에리 피셔/서울시향(협연 안드레이 코로베이니코프)

6월 10·1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프로그램 구성상 미카엘 자렐(1958~)의 ‘그림자들’(한국 초연)과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사이에 위치한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적당한 신선함과 재치를 담당했다(10일 관람).

음악과 법학을 동시에 공부했다는 피아니스트 안드레이 코로베이니코프(1986~)는 그 독특하고도 대단한 이력답게 어디로 튈지 모를 협주곡의 아이디어 또한 손쉽게 이해한 듯했다. 그의 등장에서는 큰 체구와 손에서 나올 위압적 연주를 기대했으나, 오히려 감상의 만족은 작품의 개성을 살리는 센스 있는 연주 쪽에 있었다. 그의 연주는 ‘프로코피예프라는 작곡가 초기는 이렇게 다양하고 신선한 아이디어에 관심이 있었구나’ 하는 감상에 닿게 했다. 재즈를 떠올리게 하는 즉흥성이 느껴지기도 했다. 오케스트라와의 덩치 싸움에서는 밀린다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아쉬움을 덜어낼 만큼의 인상적인 가벼움과 높은 테크닉적 완성도가 만족감을 주는 연주였다. 청바지의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객석에 앉아 2부를 감상하는 연주자의 태도는 그가 선보인 연주 스타일에 대한 수긍에 도움을 줬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다프니스와 클로에’였다. 3년간 서울시향 수석객원 지휘자를 역임한 티에리 피셔에 국립합창단까지 합세해 선보인 50여 분간의 라벨. 그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음향적으로 관객을 압도한 것은 사실이나 현실을 잊게 만드는 판타지의 세계로 입장하기에는 연주의 몰입도가 떨어지는 구간이 존재했다. 기자는 10일 공연을 관람했는데, 규모에 대한 감탄과 한 번 더 리허설을 거쳤을 11일 공연에 대한 궁금증을 동시에 가지며 공연장을 떠났다.

글 허서현 기자 / 사진 서울시향

 

실내악의 다른 말은 ‘우정’

 

비온 뒤 땅은 굳는다

칼라치 스트링 콰르텟 ‘활의 춤’

6월 9일 금호아트홀

연세 향년 30세. 2016년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1985~2016)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곤 은연중에 칼라치 스트링 콰르텟(장유진·이한나·심준호, 이하 칼라치)이 공중분해될 거란 추측을 했던 것 같다. 칼라치는 2012년 3월, 고 권혁주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성 이전부터 금호솔로이스츠 무대를 통해 견고한 음악적 교감을 나눠왔다.

오랜만에 칼라치 스트링 콰르텟의 연주를 보러 갔다. 이들은 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계속하는 것이야말로 권혁주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권혁주 죽음 이후 칼라치는 아직도 새 멤버를 영입하지 않고 객원 단원(박규민)과 함께하고 있었다. ‘활의 춤’이라 명명한 이번 공연에서는 글리에르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8개 소품 Op.39와 프로코피예프 현악 4중주 2번 ‘카바디니안’이 특히 인상 깊었다. 첫 곡으로 우크라이나 출신의 작곡가 글리에르(1875~1956)의 소품을 소개했다. 현재 음악가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애도하고 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태생 작곡가의 실내악 작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음을 표했다. 이어진 프로코피예프의 ‘카바디니안’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만들어졌다. 전쟁을 피해 머물렀던 카바르디노발카르 공화국에서 작곡가는 이 곡을 썼다. 활기찬 일상에 갑자기 닥쳐온 전쟁의 절규, 다시금 찾아온 평화를 이들은 밀접한 호흡으로 그려냈다.

복받치는 슬픔에 웅크리기만 한다면 무엇이 변하리. 활의 바람에 슬픔을 실어 보내는 이들을 통해 삶을 엿본다. 비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글 장혜선 기자 / 사진 금호문화재단

 

비움과 채움의 균형

박규희·박종성 ‘아미고’

6월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하모니카와 기타는 소박한 추억이 깃든 악기다. 자라나면서 한 번쯤은 가까이해봤을 악기. 클래식 기타리스트 박규희와 하모니카 연주자 박종성의 듀오 리사이틀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꽉 찬 객석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련한 향수를 되짚어보고 싶은 이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클래식 기타와 하모니카는 대중의 ‘반려악기’로서 오랜 기간 널리 사랑받아왔지만, 작은 음량 때문에 살롱 음악회에 적합한 악기로 인식돼 그동안 콘서트홀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었다. 두 연주자는 데뷔 이후 오랜 기간 음악적 동료로 우정을 쌓아왔다. 지난해 처음 성사된 이들의 살롱 콘서트는 4회 전석 매진됐으며, 이후 지속적인 러브콜에 힘입어 마침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까지 진출한 것이다. 기타와 하모니카를 위한 곡이 없기에 레퍼토리는 대부분 박종성의 편곡에 의해 무대에 올랐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시네마 천국’이나 김광진의 ‘편지’처럼 진한 추억이 담긴 곡을 하모니카와 기타 조합으로 듣는 신선함이 있었다.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알함브라 궁전의 노을’로 편곡한 박종성의 센스도 엿보였다.

콘서트홀은 마치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떠오르듯 다감한 분위기가 돌았다. 박종성은 유희열 버금가는 따뜻한 진행 솜씨를 보였다. 오랜 시간 감정적 공감대를 쌓아온 이들의 연주는 ‘친구(Amigo)’라는 공연명과 잘 어우러졌다. 큰 홀을 채우는 한 음 한 음을 듣다 보면 이들의 ‘비움’과 ‘채움’의 밸런스에 놀라게 된다.

글 장혜선 기자 / 사진 뮤직앤아트컴퍼니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반복, 반복, 반복

연극 ‘웰킨’

6월 7~25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핼리혜성’은 약 75.3년을 주기로 지구에 접근하는 혜성이다. 머나먼 우주에서 찾아온 혜성을 우리는 ‘악당’이라 여겼다. 꼬리에 독가스를 품고 있다는 소문은 생존 위협을 줬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핼리혜성은 진짜 이 땅의 나쁜 악당일까? 핼리혜성은 이 극을 관통하는 주제를 은유한다. 작품을 보기 전에는 21세기에 마주한 18세기 여성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설득력을 줄지 궁금해진다. 때는 1759년, 마을에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마을은 뒤집힌다. 임신 중인 21세 여성 샐리(김별)가 용의자로 지목된다. 덕분에 사형은 유예되고 출신이 다른 12명의 여성이 다락방에 모인다. 빨래를 널 때를 제외하곤 하늘을 볼 수 없는, 집안일에 매몰된 이 땅의 여성들. 무엇이 ‘공정’인지에 대한 이들의 치열한 토론을 듣다 보면, 21세기 여성의 모습과 별다를 게 없다. 특별한 주기로 찾아오는 핼리혜성의 유해성에 대해선 그리도 관심이 많으면서, 왜 오랜 시간 동안 여성들의 노동과 계급 문제에 대해선 외면해온 걸까. 혜성이 인간을 덮칠 확률보다, 인간이 인간을 찌를 확률이 더 클 텐데.

글 장혜선 기자 / 사진 두산아트센터

 

그의 주변은 그를 만든다

뮤지컬 ‘마타하리’

5월 28일~8월 15일 샤롯데씨어터

 

스트립쇼, 매춘, 여성 스파이. 2016년 초연된 ‘마타하리’의 여성상은 지난 6년간 사회 담론을 겪은 관객에게 분명 유쾌하지 않다. 세 번째 무대를 올리는 제작진이 이를 모를 턱이 없다. 이번 ‘마타’에는 그 고민이 담겨 있다(필자는 6월 2일 공연을 관람했다). 너무 많은 지점을 손댈 수는 없다. 재연까지 이루어진 큰 줄기의 내용과 넘버는 작품이 가진 특색이다. 그들은 마타(옥주현)를 통해서가 아닌, 마타의 주변을 더해 서사성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찾았다. 크게 세 가지다. 먼저 마타의 심정을 대변하는 무용수를 두었다. 첩보 활동으로 두려움에 떨던 마타가 사형 판결 앞에서는 너무나 덤덤했다. 그러나 마타의 심정이 담긴 춤은 판결로 무너지는 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둘째, ‘안나(최나래)’와 강해진 유대도 눈에 들어온다. 사랑만이 마타를 지탱하지 않으며, 마타의 이중성을 모두 이해하는 친우의 지지가 삶의 일부임이 드러났다. 셋째, 마타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아르망(이홍기)’ 또한 중요하다. 그가 마타를 기억함으로, 마지막 마타의 희생의 가치가 더욱 강해졌다. 공연의 끝, 관객의 머릿속엔 제목처럼 ‘마타하리’, 그 이름이 선명히 남는다.

글 이의정 기자 / 사진 EMK뮤지컬컴퍼니

 

‘고집쟁이’는 엄마?

국립발레단 ‘고집쟁이딸’

6.8~11일 국립극장 해오름

딸 ‘리즈(박슬기)’는, 엄마 ‘시몬(배민순)’의 반대를 무릅쓰고 ‘콜라스(허서명)’와의 결혼을 꿈꾼다. 사랑에 빠져 혼란스러운 감정을 충실히 표현하며, 엄마의 사랑을 존중하면서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캐릭터가 이야기 속에 살아있다(기자가 관람한 회차는 6월 7일, 전막 프레스 콜). 동화 속 삽화 같은 무대는 의도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그 색채가 뚜렷했다. ‘희극’이라는 장치에 새어 나오는 웃음은 가정의 울타리 안, 귀여운 투정이 자아내는 따뜻한 온도의 미소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는, 사랑을 나누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마련이다. 그 대상을 찾을 만큼 딸이 자랐다는 것을 인정 못 하는 것은 오히려 시몬이다. ‘고집쟁이는 딸이 아니라 엄마 아니야?’라는 동료 기자의 우스갯소리에 무릎이 탁 쳐진다. 남성 무용수가 연기하는 여성 시몬,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부유한 집 아들 ‘알랭(선호현)’의 모습은 풍자적 감상도 가능하게 한다. 애슈턴의 안무 스타일이 이 감상에 힘을 싣는다. 마임을 곁들인 능청스러운 솔리스트들의 표정 연기 또한 서사의 풍성함을 도왔다.

글 허서현 기자 / 사진 국립발레단

 

전시장에서 마주친 음악

 

허밍 속 그날의 선명한 선율

안리 살라 ‘붉은색 없는 1395’

4월 8일~8월 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장을 들어서면,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 1악장의 2주제가 울려 퍼진다. 영상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 전시관의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마치 공연장 전실에서 음악회를 엿듣는 기분마저 든다.

이윽고 곡의 도입부를 한 여성이 허밍한다. 그 소리를 따라 들어가면, 알바니아 태생의 안리 살라(1974~)의 다큐멘터리 ‘붉은색 없는 1395’를 만날 수 있다. 안리 살라를 포함해 ‘너나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아크람 자타리·임윤경·뮌 등 13명의 국내외 작가가 참여했다. 작가들은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것을 작품으로 남김으로써 이 시대에 또 다른 기억 속으로 그들의 기억을 밀어 넣는다. 누군가에게 기억은 일상의 경험이고, 종교적 차별이고 또는 역사의 파편이다. 살라는 이념의 충돌로 역사가 소용돌이치던 유럽에서 성장기를 거쳤다. 작품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하려는 세력과 독립을 반대하는 세력의 갈등으로 빚어진 보스니아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독립을 반대한 세르비아 민병대가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해 민간인을 대상으로 무차별 저격을 벌였고, 이를 피하고자 무채색만 입고 다녔다.

교향곡은 영상의 전체적 구조를 이룬다. 영상 속 주인공인 한 여인은 긴장한 채 걸음을 재촉하며 곡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바순의 선율을 허밍 한다. 저격수의 총격이 멈추기를 기다리는 건널목의 사람들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을 리허설하는 악단(벤저민 메이어스/사라예보 필)이 교차하며 등장한다. 마치 음악 속 각 악기의 선율을 대변하듯 사람들의 걸음걸이, 여인의 뜀박질하고 난 뒤의 숨 고르는 장면이 음악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특히 넓은 교차로를 가로지르기 위해 달릴 때, 제2주제 선율을 길게 늘여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표현한 부분은 인상 깊었다. 음악은 완결되지 않지 않지만 ‘몹시 슬픔’의 뜻을 안고 있는 작품과 세르비아 민병대의 저격으로 목숨을 잃은 1만여 명의 사라예보 시민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작품의 목적만큼은 선명해 보였다.

글 임원빈 기자 /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비인간성 불쾌함

AI 사운드 프로젝트 ‘기계즉흥곡’

5월 20~29일 파라다이스 아트스페이스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에 마주친 ‘기계즉흥곡’(이재형·박정민)은 불쾌함을 줬다. 기계즉흥곡(Machine Impromptu)은 인공지능 예술에 자연의 우연성을 적용하는 프로젝트. ‘오선이 그려진 어항’에 담긴 ‘음표로서의 물고기’는 움직임이 스캐닝 되어 실시간 변화하는 악보를 만들어 낸다. 물고기의 위치가 만들어 내는 음계는 피아노를 통해 자동 연주되고 이에 어울리는 화음이 인공지능 시스템을 통해 연동되어 음악을 만든다. 이를 ‘자연, 인간, 기계의 조화’라고 단순히 묶기엔 무책임하다. 언제 물을 갈아줬는지도 모르겠는 더럽고 좁은 수조에 갇혀 인간을 위해 헤엄치는 물고기는 불쌍하고, 규칙 없이 쏟아지는 단선율 멜로디는 따분하다. 인공지능 예술이 주는 비인간성을 표현한 것이라면 성공이다.

글·사진 장혜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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