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어린이는 예술가! 싱가포르 아트 그라운드 총괄 프로듀서 루안느 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5월 6일 8:00 오전

BEHIND THE MUSIC SCENE 19 세계의 공연기획자를 만나다

 

싱가포르 아트그라운드 총괄 프로듀서

루안느 포

 

 

루안느 포(Luanne Poh)는 맥쿼리 대학에서 예술을, 싱가포르 국립 교육원에서 특별 교육을 전공했다. 2006년부터 싱가포르 에스플레네이드의 프로듀서로 재직했고, 2016년부터 현재까지 아트그라운드의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

어린이와 예술가의 만남을 도모하고, 영감과 창조력을 성장시키는 공간. 아이들은 예술과 함께 자란다

 


 

연재 | 세계의 공연기획자를 만나다

01 아라벨라 아츠 대표 스테파나 아틀라스 02 브라보! 베일 뮤직 페스티벌 대표 케이틀린 머리 03 루체른 페스티벌 대표 미하엘 헤플리거 04 브레겐츠 페스티벌 대표 미하엘 디엠 05 엘프 필하모니 대표 크리스토프 리벤 조이터 06 콘세르트허바우 대표 사이먼 레이닝크 07 에스플러네이드 대표 이본 텀 08 서구룡문화지구 대표 베티 펑 09 대만 국립가오슝아트센터 대표 치엔 웬핀 10 도쿄 산토리홀 대표 쓰쓰미 쓰요시 11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 대표 올리비에 레마리 12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 대표 미하엘 아디크 13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경영감독 루카스 크레파츠 14 아스펜 음악 페스티벌&스쿨 대표 앨런 플레처 15 도쿄 신국립극장 대표 제니야 마사미 16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대표 안드레아스 슐츠 17 싱가포르 차이니즈 오케스트라 대표 테렌스 호 18 위그모어홀 대표 존 길훌리 19 아트그라운드 총괄 프로듀서 루안느 포

 

싱가포르의 하천항을 따라 쭉 걷다 보면 관광객들 사이에서 유명한 카페 멜바(Cafe Melba)가 위치한 굿맨 아츠센터(Goodman Arts Centre)가 있다. 바로 그 뒤에 소박하게 자리 잡은 아트그라운드(The Art Ground)가 이번 기사의 주인공이다. 안에 들어서면 알록달록한 인테리어와 큼직한 놀이기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이 단순한 놀이기구가 아니라 예술작품들이라는 점이다.

이곳에 설치된 예술작품들은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오감으로 체험하는 것은 어린이들을 진정한 예술의 세계로 인도한다. 더불어 예술품과 함께하는 공간 인테리어를 어린이들에게 일임해 말 그대로 ‘어린이에 의한, 어린이를 위한’ 공간의 정체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싱가포르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문화예술정책을 실천한다. 아시아의 예술중심지로 거듭나려는 싱가포르 정부의 의지가 문화예술을 위한 인프라 구축으로 이어졌다. 현재 싱가포르에는 에스플레네이드·싱가포르 아트 뮤지엄·국립 미술관·예술과학 박물관 등의 예술기관뿐만 아니라 플레이엄과 아트그라운드 등 아동을 위한 예술공간이 설립되어 있다.

아트그라운드는 2016년 설립된 곳으로 싱가포르 최초의 다분야 어린이 예술센터다. 상주직원·예술가·예술감독이 함께 참여해 신생아부터 만 9세까지의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 및 운영하고 있다. 소통의 매개체가 되기 위한 노력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교육 프로그램 운영은 물론, 예술가를 교육자로 육성하는 인큐베이션 플랫폼, 예술가와의 대화, 싱가포르 내 기관 진출이나 해외 진출 등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뿐만 아니라 근처 굿맨 아츠센터의 입주예술가와 협업도 유치하는 한편, 성인과 어린이 모두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한다. 예술의 생명력이 살아 넘치는 아트그라운드에서 루안느 포 총괄 프로듀서(Executive Director)를 만났다.

 

마음껏 만지고 뛰어노는 공연장

 

싱가포르 아트그라운드(The Art Ground, 이하 TAG)의 설립 이유는 무엇인가?

이곳에 오기 전 에스플레네이드(Esplanade)에서 일하면서 가족 단위 관객들이 공연장을 불편하게 느끼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아마 공연장의 규모가 주는 위압감이나 낯섦이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공연장에서 즐기는 문화생활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TAG다. 어린이들이 공연장 문화에 익숙해지는 디딤돌 역할을 해주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는 공연장이다.

설계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어린이들이 본능적으로 호기심을 갖고 공간에 뛰어 들 수 있을까’였다. 그 고민의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화이트박스(whitebox)다. 이곳을 우리의 심장이자 영혼이라 칭하고 있다(웃음). 보통 극장은 검은 벽으로 만드는데, 어린이들은 어둠에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낀다. 공간에서 친숙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벽을 하얗게 만들었다. 또, 백스테이지가 없어서 예술가들이 준비하는 모든 과정을 어린이들이 직접 볼 수 있다. 모든 공간은 꾸준히 어린이들에게 최대한 자연스러운 피드백을 받아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닌, 아이들이 느낀 그대로의 피드백이다.

화이트박스

공간 구성에서 가장 신경 쓰는 점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안전이다. 공간 내에서는 성인의 개입이 제한적이므로 안전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미끄럼틀에 계단이 없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인데, 언덕을 스스로 타고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다면 다시 내려올 수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설계했다. 스스로 신체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놀이해야 아이들이 자신의 안전을 가늠할 수 있다. 더불어 이 공간은 아이들이 주인이다. 스스로 어떻게 놀지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사물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여지를 주는 공간 구성이 필수적이다. 공간에 구멍을 하나 만들더라도, 아이들이 구멍을 통과할 수도 있고 밑으로 지나가며 놀 수도 있는 식으로 구성하는 것은 연령대에 따라 혹은 사고하는 방식에 따라 다른 놀이를 창조해 내는 데 도움이 된다.

 

 

프로그램은 ‘충분히’ 즐거워야 한다

 

TAG는 신생아부터 만 9세 미만의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장이다. 아동의 발달 특성을 생각하면 꽤 범위가 넓은데,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구성에도 고민이 많을 것 같다.

신체적 연령으로 프로그램을 구분한다면 0~8개월, 6~12개월, 18개월~2세, 3~5세, 4~7세, 7세 이상으로 운영하고 있다. 발달 연령은 아동의 경험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가’가 보다 더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프로그램 운영의 대원칙은 아이들이 잘 참여할 수 있고 내용이 충분히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 프로그램과 학교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어떤 차이점이 있나?

두 프로그램은 진행 방식부터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 가족 프로그램에서 부모와 어린이들이 함께 생각하고 대답할 수 있는 개방형 질문이 많이 사용된다면, 학교 프로그램에서는 원활한 진행과 뚜렷한 학습 목표 달성을 위한 단답형 질문이 조금 더 많은 편이다. 특히 학교 프로그램은 싱가포르 정부에서 만든 ‘자연스러운 초기 학습자 프레임 워크(Naturally Early Learners Framework)’의 시각과, 공연예술의 학습 목표를 기반으로 설계하고 있다. 예술가들이 작품을 만들 때도 이를 연계해 어떤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한다.

프로그램의 공통 키워드를 굳이 꼽자면 ‘융합’이 아닐까 싶다. 장르를 혼합한 프로그램 설계를 선호하는 이유가 있나?

어린이들은 아직 ‘장르’를 명확하게 구분해 예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장르 융합 프로그램에 대한 아이들의 피드백도 좀 더 좋은 편이다. 만약 그림그리기와 노래가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구성하면 어린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더 흥미 있는 장르에 집중하며 몰입한다. 이는 어린이의 현재 관심사가 무엇인지 관찰할 소중한 기회다.

장애아동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어떤 것들이 있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프로그램을 별도로 마련하기보다는 개별적으로 적합한 프로그램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흰 텐트와 흰 쿠션을 소재로 한 공연 프로그램에 참여한 6세 남자 어린이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처음에는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어린이가 어느새 일어나 리본을 갖고 춤을 추고 웃으며 45분을 너무나 행복하게 보내기에 ‘원래 밝은 성격의 친구구나’ 싶었다. 나중에 함께 방문했던 교사들이 말하길, “평소에는 교실에서 움직이지도 않을뿐더러 주변에 관심이 없는 아이”였다는 것이다. 예술이 가진 힘이 이렇게 위대하다.

 

어린이를 예비 예술가로 만들기

 

TAG에서는 예술교육자 인큐베이팅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예술가들을 교육자로 양성하는 아이디어 자체가 몹시 흥미롭다.

‘어린이만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열망은 TAG 탄생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각 예술 장르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라운드 브레이커스(Ground Breakers)’를 만들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에 선정되면 1년 동안 리허설 공간 지원 및 약 500만 원의 제작비를 지원한다. 작품공개를 위한 리허설이 3분기로 나누어 진행되며, 분기별 6~10회 정도다. 이때 어린이 가족이나 업계 종사자에게 피드백을 받는 리허설도 2회씩 포함되어 있는데 자연스럽게 홍보도 되고 다양한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볼 수 있어 아티스트들도 좋아한다.

안타깝게도 현재 싱가포르에는 어린이를 위한 예술창작 단체가 없다. 그라운드 브레이커스가 꾸준히 운영된다면 이후 어린이를 위한 창작에 예술가들이 더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하고 있다.

‘그라운드 브레이커스’ 선발 과정에 어린이들이 직접 참여한다고 들었다. 어린이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린이들의 시선을 이해하고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가’인데, 이 부분은 성인의 시선에서 판단하기 어렵다. 총 15명의 어린이가 오디션 과정에 평가자로 참여한다. 예술단체가 7분 동안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아이들이 자유롭게 피드백한다. 보통 ‘주제가 재미있었는지’ ‘열심히 만든 것 같은지’ ‘아티스트들과 원활한 소통할 수 있었는지’가 평가 항목이 된다. 글씨를 읽지 못하는 유아들은 평가표에 얼굴 모양 표정을 선택하게 해두었고, 직접 그림을 그려 평가할 수 있게도 한다. 평가에 참여한 어린이 중에는 단체에 직접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 이 피드백은 모든 참가단체에게 공유해 작품 제작의 아이디어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라운드 브레이커스 예술가들의 해외 진출이나 타 기관 연계에도 적극적이라고 들었다.

작품 및 저작권은 오롯이 그들의 소유고, 우리는 그들이 날개를 펼칠 수 있게 도울 뿐이다. 작품 쇼케이스 시 관계자들이 많이 오는 편이다. 특히 에스플레네이드의 경우 그라운드 브레이커스 아티스트들의 공연을 발전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하고 벤치마킹해 별도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도서관이나 박물관의 경우 관심 있는 단체를 기관에 초청해 주시기도 한다.

 

결국, 모두를 위한 공간

 

아트그라운드 공간

어린이 전용 공간이라 운영에도 여러 제약이 있을 것 같은데.

프로그램 간 균형을 맞추기가 가장 어렵다. 재원 조성과 직결되는 문제라 더 고민이 많다. TAG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간을 목표로 하지만, 운영을 지속하려면 티켓 판매를 통한 재원조성을 안 할 수는 없다. 입장권을 받는 프로그램과 무료 프로그램 간의 비율을 맞추는 게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소외계층을 위한 프로그램도 더 확대하고 싶지만, 현실적인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운영하는 7년 동안 티켓 수입을 최소화해 많은 어린이가 함께할 수 있도록 운영하려고 노력했다.

운영하며 뿌듯했던 순간들도 많을 것 같은데.

가족들이 함께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이들이 즐겁게 노는 동안 양육자들이 쉴 수도 있고, 함께 놀 수도 있다. 어린이들에게도 자유가 주어지고 어른들에게도 자유가 주어지는 공간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동등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라 자부한다.

한 해 예산이 어떻게 되나? 정부 보조도 있다고 들었다.

약 10억 원이다. 정부 보조는 50% 미만이고 나머지는 티켓 수익으로 충당한다.

10년 후 TAG는 어떻게 성장해 있을까.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하다.

TAG의 차기 목표는 지역 아티스트 간 네트워크 구축이다. 아티스트들이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가치관만큼이나 네트워크 안에서의 소통도 중요하다. 그래서 쇼케이스를 할 때마다 다른 아티스트들도 초대해 서로의 작품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10년 뒤에는 TAG가 없이도 예술가들이 독자적으로 살아남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공간이 더 중요해지길 바라는 대신, 이곳이 없이도 예술가와 어린이의 소통이 당연해지기를 바란다는 말에서 TAG의 설립 목적을 곱씹게 된다. 그는 이곳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어린이와 예술가의 만남, 그 속에서 얻게 되는 예술적 영감과 창조력에 있다는 것을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피카소의 말처럼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지만, 어린이가 일상에서 예술적 창조력을 발현할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반면 어른들은 끊임없이 어린이들에게 창의적이기를 요구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과정이 있어야만 결과가 있다는 진리, 경험해야만 표현할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를 잊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트그라운드는 어린이들에게 그리고 예술가들에게 경험할 기회, 과정을 충실히 수행할 토양(Ground)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박선민(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아트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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