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조연에서, 오페라의 주역으로. 소프라노 여지원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9월 18일 9:00 오전

COVER STORY

 

A Life in Opera

소프라노 여지원

 

오페라 ‘지오반나 다르크'(2016) ©Stefan Hoderath

‘소프라노 비토리아 여(Vittoria Yeo)의 풍성한 소리는 캐릭터를 더욱 굳건한 여성으로 만든다’. 해외 오페라의 비평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문장이다. 비토리아 여. 소프라노 여지원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오페라의 주역으로 활발히 활동 중인 그가 오는 10월 오랜만에 국내 무대에 오른다. 예술의전당은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 ‘노르마’의 프로덕션에 여지원을 주역으로 내세웠다. 그간 쌓아온 여지원의 궤적은 노르마의 간절한 아리아를 타고 관객의 마음에 자리 잡을 준비를 마쳤다

총괄 허서현 기자 사진 예술의전당

 

INTERVIEW ‘노르마’의 주역으로 금의환향하다 _허서현
FOCUS 출연작 ‘노르마’ 들여다보기 _홍예원
ABOUT ‘노르마’의 탄생지,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는? _한정호

 


 

INTERVIEW

 

잘츠부르크의 디바 여지원

‘노르마’의 주역으로 금의환향하다

 

지난달에는 정조를 지키는 초초 상(‘나비부인’)이었는데, 바로 그 전달에는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는 데스데모나(‘오텔로’)였다. 그의 삶이 오페라인지, 아니면 오페라 속 주인공들의 삶이 그의 삶인지 뚜렷이 구분되진 않는다. 그렇게, 그는 온몸으로 주인공의 삶을 살고, 자신의 삶을 무대 위로 올리고 있다. 이탈리아 극장 전역에서 주역으로 활약하는 소프라노 ‘비토리아 여(Vittoria Yeo, 여지원의 활동명)’의 삶이다.

살펴보면 그의 삶도 오페라 속 그들만큼이나 극적이다. 명문대 출신도 아닌 무명의 성악가는 어느 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프리마 돈나로, 그리고 오페라 디바로 거듭나 고국 무대에 주역으로 금의환향했다! 영화 속 성공한 주인공의 엔딩 장면으로 적격이다. 기립박수 속에서 막을 내리면 여지없는 해피엔딩.

그러나 여지원은 말한다. “어떤 위치에 올랐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2015년, 행운처럼 찾아온 리카르도 무티와의 만남은 마치 그를 단숨에 성공의 반열에 올린 것 같지만 그 순간을 ‘진짜 기회’로 만든 것은 여지원이 쌓아온 실패의 시간이었다. “백 번도 넘게 떨어져 봤던” 그리고 “알맞은 발성법을 몰라 긴 시행착오를 겪은” 그 끈질김. 멀리서 보기에는 화려한 행운 같아 보였던 순간들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여지원의 진짜 인생 이야기를 시작한다.

 

TAKE 1. 꿈꾸기

 

2017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오페라 ‘아이다’ ©SF/MonikaRittershaus

인생을 이끈 단 하나의 다짐

어린 시절의 여지원은 그저 예체능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은 아이었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 피아노를 배우면서 음악을 처음 접했다. 물론 노래하는 건 언제나 좋았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다른 사람이 내 노래를 들으며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지만 본능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합창부 활동을 하고, 성당에서는 성가대 활동을 한 것이 여지원의 학창 시절 노래 경력의 전부다. 여타 음악가들의 이력에 등장하는 학교나 스승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도 노래에 대한 관심은 이어져, 성악으로 입시를 치러 서경대 성악과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도 여지원은 노래 실력이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다. 아무리 연습을 하고, 고민을 해도 노래를 잘 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웠다.

“내 안에 있는, 꺼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벽 같은 것에 막혀서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답답한 기분이었죠.” 그러다 학교에서 처음으로 오페라 배역을 맡았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속 백작의 시종인 케루비노. 대단한 무대는 아니었지만, 여지원에겐 큰 사건이었다. 오페라는 가만히 서서 노래만 부르는 것과는 달랐다. 내가 맡은 역할의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일. 공연을 올리는 과정은 정말 힘이 들었지만, 여지원은 이 오페라라는 장르에 단숨에 매료됐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을 사로잡은 이 생각. ‘와, 진짜로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다!’

 

‘딱 3년’이라는 독한 마음으로 오른 유학길

대학 졸업 후,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다. 성공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는, 심지어 성악가로서의 가능성조차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때였다. 유학을 떠나는 날, 여지원이 마음속으로 정한 시간은 ‘딱 3년’이었다. ‘3년이 지나고서도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독한 다짐을, 그는 비행기에 함께 실었다.

“유학을 떠나며 가진 꿈은 단 하나, 제가 가진 진짜 목소리를 찾는 것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데, 그때는 그 꿈을 위해 모험을 걸었던 거죠. 저를 믿고 응원해주신 부모님이 안 계셨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더 공부해보고 싶다, 조금만 더 믿고 지켜봐 달라’고 말씀드리며 유학을 왔죠.”

그러나 인생은 그녀를 세차게 흔들려는 작정이라도 한 것일까. 굳게 먹은 마음이 무색하게 유학을 떠나온 3년간 시행착오만 겪었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목소리에 적합하지 않은 레퍼토리들을 부른 이유가 컸다.

 

스승 라이나 카바이반스카와 함께

목소리 찾기와 스승 닮기

대개 발성의 원리란 다르지 않지만, 이를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르다. 성악가는 자기 몸이 악기이기에, 각자 악기에 맞는 호흡과 발성을 찾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악에는 드물지만, 성악에서 간혹 ‘대기만성형’ 스타가 나오는 이유다.

“내게 맞는 발성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점차 소리내는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소리에 맞는 새로운 레퍼토리를 공부하자 두려움도 점점 사라졌고요. 잘못된 습관을 고치면서 테크닉을 쌓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자유로워졌습니다. 자유가 찾아오니 호흡과 감정을 싣기도 훨씬 수월해지고, 발음 전달력도 좋아졌죠.”

이탈리아에서 여지원은 파르마 음악원, 시에나 아카데미를 거쳐 공부를 이어갔다. 이후 모데나 음악원에서 만난 소프라노 라이나 카바이반스카(1934~)는 여지원의 참 스승이자 롤모델이 되주었다. 불가리아 출생의 카바이반스카는 20세기를 풍미한 소프라노로, 베르디와 푸치니의 오페라 다수 작품에서 기념비적인 명연을 선사해왔다. 그리고 스승이 가진 ‘최고의 프리마 돈나’로서의 경험은 제자인 여지원에게 고스란히 전수됐다.

“살면서 진심으로 나를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죠. 제게는 카바이반스카 선생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무대 위에서의 선생님은 정말 당당하시죠.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넘치는 카리스마로 관객의 사랑을 듬뿍 받으셨으니까요. 그 오페라 가수로서의 삶을 따르고 싶은 것은 물론이고, 무대 밖의 모습까지 닮고 싶을 만큼 진솔한 분이세요. 엄마처럼 저를 이해해주시고, 때론 선배 가수로서 따끔한 충고도 잃지 않으시죠. 오페라 가수라는 화려함 뒤에 얼마나 많은 준비와 희생이 필요한지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가수로서의 기본적인 호흡은 물론, 연기를 위한 감정과 눈빛 하나까지 세심하게 알려주신 분이에요.”

 

TAKE 2. 데뷔 ‘못’ 하기

 

오페라 ‘맥베스’(2013)

무명(無名)이라는 행운

국내 한 일간지의 통계에 따르면 공인된 국제 콩쿠르 125개 중, 한국인 입상자가 한 번이라도 있었던 곳은 96개다(비록 2017년 기준일지라도 지금도 크게 수치가 변한 점은 없다). 계산하자면 전 세계 콩쿠르 중 77%에, ‘경쟁에서 승리한’ 한국인 연주자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이다. 미디어는 너나할 것 없이 부지런히 우승 소식을 실어 나른다. ‘최연소’일수록, 그 타이틀은 더 자극적이다. 이 과정의 반작용으로 ‘연주자로서 인정받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콩쿠르 우승’이라는 인식이, 꿈을 키우는 많은 음악학도들의 마음에 자리 잡는다.

그러나 실상은 어떤가. 다수의 어린 콩쿠르 위너는 다음 단계에서 방황을 겪는다. 아직 많은 레퍼토리를 소화한 충분한 경험이 없는상태에서 밀려드는 지나친 관심은 부작용을 낳는다. 본의 아니게 ‘유명(有名)’ 연주자가 되어, 연주자로서의 성장 과정에서 겪는 자연스러운 좌충우돌로 마음고생을 겪는다. 평가를 받으며 성장이라도 했다면 다행인 경우다. ‘콩쿠르 위너’의 이미지로써만 소비된 채 버려진다면, 우리가 목메고 있는 콩쿠르 유명세는 과연 누구에게 득인가. 최근 이러한 시류에 비춰보면, 연주자에게는 오히려 무명(無名)으로 성장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행운이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든다.

특히, 오페라 가수를 꿈꾸고 있는 성악가들에게는 무르익을 날을 기다릴 인내가 필요하다. 소프라노 여지원의 여러 날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오페라 ‘투란도트’(2020)

오페라 ‘나비부인’(2016)

다시 일어서기 위해, 넘어진 나날들

무대 곁을 서성거리며 갖는 동경, ‘행인 1’이 되어 무대에 첫 발을 디딜 설렘, “거울 앞에 서서 내 손짓이 무대 위 그들과 무엇이 다른지 뜯어보고 또 뜯어보는” 성찰은 모두 ‘무명이라는 이름’으로만 겪을 수 있는 시간이다.

“무대 경험이 많을수록 유리할뿐더러, 무대에 올라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오페라 경험을 위해 학창 시절 스태프로도 참여하곤 했습니다. 소품부터 조명까지 무대 뒤의 여러 일을 담당하면서 공연이 어떻게 준비되는지 배웠죠. 동시에 무대 위 여러 오페라 가수들을 바라보며 꿈도 키웠고요.”

여지원의 커리어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나 콩쿠르 우승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는, 남들과는 다른 길을 개척한 셈이지만 그 과정은 그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넘어져도 계속 일어나는 힘이 여지원을 지탱했다. “백 번을 떨어져도 다시 도전하는 것”. 그가 걸어온 길에 남은 기록이다.

“무대 공포증이 심했어요. 그걸 극복하려 음악과 배역에 더 집중했죠. 사실, 언제나 ‘노래를 잘 하는 학생’은 아니었으니까, 오디션을 보든, 콩쿠르에 나가든 좋은 결과를 받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물론, 좋은 결과가 없는데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발전을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해 ‘어떻게 해야 더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백 번도 넘게 떨어져 봤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언제나 결과보다는 나만의 작은 목표, 내가 알 수 있는 성장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성공을 했다든가 어느 위치에 올랐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가기 위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묵묵히 걷던 여지원이 길 위에서 만난 또 하나의 행운,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1941~)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2016년 공연이 끝나고 지휘자 무티와

무티와 함께, 잘츠부르크 입성

2013년, 여지원은 라벤나 페스티벌에서 ‘맥베스’의 레이디 맥베스 역으로 무대에 오른다. 이 페스티벌의 연출과 제작을 맡은 이는 크리스티나 무티, ‘마에스트로 무티’의 부인이었다. 페스티벌이 끝나고 1년 후,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편이 네 노래를 들어보고 싶어 해”. 놀란 마음에 어떤 오디션인지도 모른 채 제안을 수락했고, 여지원은 그렇게 201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베르디 ‘에르나니’의 주인공 돈나 엘비라로 데뷔했다. 마에스트로가 직접 캐스팅한 ‘처음 보는 동양 여성’. 그해 여지원의 무대에는 무수한 언론의 관심이 쏟아졌다.

“연주 몇 달 전부터 여러 번 마에스트로 무티를 만나 개인 리허설을 했어요. 드디어 다가온 공연 최종 리허설 날, 제가 엄청 긴장을 했었나 봐요. 그럴 만도 했죠. 눈앞에는 마에스트로 무티가, 옆에는 제게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유명 오페라 가수들이 나타났으니까요. 주눅 들어 노래를 하고 있는 절 보더니, 마에스트로가 쉬는 시간에 살짝 부르시더군요. 혼나는 줄 알고 잔뜩 긴장했는데, 예상과 달리 온화한 미소와 함께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며 “네 노래에는 남들에겐 없는 특별함이 있다. 그게 바로 널 선택한 이유니까, 스스로를 믿고 노래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오페라 ‘아이다’(2023)

오페라 ‘라 보엠’(2021)

성공에는 가속도가 붙었다

‘에르나니’는 대성공이었다. 2017년,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의 아이다 역으로 다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섰으니 대성공은 물론 오페라 주역으로서의 자격을 증명하고도 남은 셈이다. 한국인 소프라노 주역은 페스티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18년에는 무티의 지휘로 베르디 ‘레퀴엠’ 무대에도 함께 섰다. 2015년 잘츠부르크 데뷔 이후 꿈꿨던 레퍼토리를 3년 만에 이룬 것이다.

꿈꾸던 무대에 서는 일은, 한 번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속도가 붙었다. 2019년에는 독일 바덴바덴 페스티벌 무대에도 올랐다. 그 사이 그녀가 맡은 오페라 롤은 다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맥베스’의 레이디 맥베스, ‘일 트로바토레’의 레오노라, ‘지오반나 다르크’의 지오반나 등 다수의 베르디 작품의 주역은 물론, 푸치니 ‘나비 부인’의 초초 상, ‘노르마’의 노르마 역까지 섭렵했다. 이탈리아 극장에는 연일, ‘비토리아 여’의 이름이 올랐다.

“현실적으로, 검은 머리의 동양인에게 주어지는 배역이 제한될 수 있다는 한계는 있죠. 게다가 조금만 발음이 틀리거나 가사를 실수하면, 아예 뜻도 모르고 노래하는 사람처럼 의심을 당할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평가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죠. 결국에는 연주 활동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고요. 앞으로도 저는 더 많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노래하고 싶어요. 베르디만 해도 오페라를 총 26편 남겼는데, 그 중 제가 해본 작품은 10편 남짓이거든요. 도니체티, 푸치니의 작품까지 생각하면 아직 못해본 작품이 너무 많아요!”

 

TAKE 3. 오페라 비하인드

 

오페라 ‘지오반나 다르크’(2021)

연출가의 뾰족한 요구도 수용하는 포용력

잔 다르크의 이야기를 다룬 베르디 오페라 ‘지오반나 다르크’는 2016년 특별한 연출로 공연됐다. 오페라가 공연된 극장은 17세기에 건축된 이탈리아 파르마의 파르네세 극장으로, 내부가 나무로만 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으로 잘 알려진 영화감독 피터 그리너웨이(1942~)가 연출을 맡았고, 극장의 아름다움을 살려 객석 한가운데 무대를 설치해 신선함을 선사했다. 주인공 지오반나 역을 맡은 그는 까다로운 연출가의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

“연출가가 두 명의 발레리나와 함께 무용수처럼 움직여주길 바랐어요. 가수는 몸을 이용해야 하는데,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으니 노래할 때 애를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여지원의 노래에 대한 호평에는 언제나 인물의 뛰어난 감정 표현에 대한 묘사가 뒤따른다. ‘지오반나 다르크’에서도 여지원의 잔 다르크는 ‘풍부한 표현을 입어 강한 영웅’으로 재탄생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오페라라는 종합예술의 장 위에서

‘극+음악’으로서의 오페라는 여지원이 이 장르를 대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 중 하나다.

“베르디(1813~1901) 음악을 노래할 때 꼭 필요한 것은 ‘극적인 표현’이에요. 베르디는 ‘극을 위한 음악’을 정말 천재적으로 작곡해놨습니다. 실제로 그가 초연 가수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이에 대한 당부가 잘 나와있어요. ‘아름다운’ 노래가 아닌 ‘표현을 위한’ 노래를 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했죠. 베르디 악보 속의 셈여림과 빠르기 등 여러 음악 기호들은 단순히 음악적 효과를 위한 장치를 넘어 대사와 감정 표현을 도와주는 열쇠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맞을 거예요.” 오페라라는 장르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이탈리아 관객에게 오페라는 ‘노래하는 연극’이다. 오페라 가수가 연기하고 노래하는 대사를 들으며, 그들은 연극을 감상하듯 오페라를 즐긴다. 그가 아리아뿐 아니라 극의 진행이 이루어지는 레치타티보 파트까지 중요시하는 이유다.

“저는 악보에 충실한 가수예요. 대본과 악보를 통해 작곡가의 의도를 이해하며 그에 따른 배역의 감정을 이해하고 납득하려 하죠. 오페라 가수는, 연기자로서 공연에 흐름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발전시키며, 노래와 연기로 이를 표현해야 합니다. 사실, 감정은 남녀노소 누구나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제가 감정에 진심을 담을수록, 관객들이 더 공감하게 되더라고요.”

 

지휘자 무티와 ‘맥베스’ 공연(2016, 콘서트 버전)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2017)

공연이 없을 때는 집순이?

숙소와 극장을 오가며 늘 긴장 속에 사는 것, 오페라 가수인 여지원의 일상이다. 그래서인지 공연이 없을 때는 ‘집순이’가 된다. 집에는 남편이 있고, 이것저것 공부를 하기에도 좋다.

“지금은 이탈리아 북부의 피아첸차라는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어요. 공연이 없으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을 좋아해요. 그동안 공연 하느라 바빠서 못 해먹은 한국 음식을 차려 먹기도 하고,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도 가지고요.”

여지원은 2005년 한국을 떠나 유학길에 오른 이후, 줄곧 이탈리아에서 생활해왔다. 이탈리아는 지역마다의 개성이 뚜렷하지만, 거주하는 사람들은 낙천적이고 친절하다. 무엇보다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이다. 여러 문화를 만들어낸, 개성이 뚜렷하고 낙천적인 이탈리아 사람들과의 생활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외국에서 활동하다보면, 정말 다양한 굴곡들을 마주하게 되죠. 그때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조언에 귀 기울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지내다보니 지금까지 왔네요. 앞으로도,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열심히, 건강하게, 즐겁게 노래하며 지내길 바랄 뿐이죠.”

 

LAST SCENE. 끝이 아닌 엔딩

오페라 ‘노르마’(2019) ©SilviaLelli

벨 칸토, 그리고 ‘노르마’
오는 10월, 예술의전당 전관 개관 30주년 기념 오페라 ‘노르마’는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 2016년 선보인 프로덕션이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오페라 극장에서 관심과 러브콜을 받은 예술가들이 서울(10.26~29/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만난다. 여지원도 오랜만에 고국 무대에 설 예정. 연출을 맞은 알렉스 오예, 지휘자 로베르토 아바도와는 이미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다. 다른 프로덕션(연출 크리스티나 무티, 지휘 알렉산드로 베니니)이지만 2019년, 오페라 ‘노르마’의 노르마 역을 소화하기도 했다.

“벨리니의 오페라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먼저 떠오르죠. 자주 공연되는 베르디나 푸치니에 비해서는 공연 시간이 길어 선뜻 접근하기 쉽지 않다는 생각도 들고요. 저도 처음엔 그런 선입견이 있었는데, 실제로 작품을 공부하며 벨리니의 음악 안에 더 많은 극적인 요소를 찾게 되었습니다. 힘 있고 웅장한 합창, 사랑과 배신 등에 따른 세밀한 감정변화의 효과적 표현에서 훌륭한 대본임을 느꼈습니다. 사실 벨리니의 선율은 그 음역대가 무척 넓고, 아질리타(빠르게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창법)같은 매우 어려운 기법들을 요구하죠.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아함이라는 큰 틀 안에서 조화롭게 구성된다는 점이 관객에게 매력적인 부분일 것 같아요.”

사실, 여지원의 금의환향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7년 4월, 롯데콘서트홀에서 무티/경기필하모닉과 함께 ‘베르디 콘서트’를 선보인 바 있고, 그보다 앞서 2014년에는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서 ‘투란도트’의 류 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기회가 적어, 더욱 소중한 고국 공연

그에게는 이탈리아의 극장이 더 익숙하지만, 내 나라 한국에서의 연주는 또 다른 의미의 감회다.

“유럽에 거점을 두고 있어서인지, 아쉽게도 한국 공연의 기회가 적어지더라고요. 한국 연주는 너무 기쁘고 설레요. 이탈리아에서 배우고 경험한 것을 한국 관객에게 보여드릴 수 있어 기대됩니다. 이번에 함께할 지휘자, 연출자와 다른 작품들로 재밌게 작업했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 ‘노르마’는 더 기대가 됩니다.”

여사제 ‘노르마’로서의 아리아가 끝나면 그는 또 ‘피가로의 결혼’, ‘나비부인’, ‘오텔로’ 속의 여러 여인의 얼굴로 부지런히 살아갈 예정이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아직 노래하지 못한 수많은 여인들이 남아있다. 무대 위 오페라 가수의 표정과 호흡을 통해 다시 살아날 인생들의 이야기. 그 속에 오늘도 여지원이 있다.

“내년에 있을 프로덕션 중에서는, 로마에서 있을 ‘오텔로’의 데스데모나를 기대하고 있어요. 몇 달 전 이 배역으로 데뷔를 했는데, 제 목소리와도 잘 어울리고 연기에도 잘 맞아 배역에 많은 애정이 생겼거든요. 베르디와 셰익스피어라는 두 천재 예술가의 손을 거친 작품이 제 목소리로 연기될 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실 특별한 계획을 세우는 편은 아니에요. 삶은 늘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더라고요.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고, 늘 그랬듯 앞으로도 지금처럼 노래하며 살아가려고요.”

허서현 기자 사진 예술의전당

 

Performance information

예술의전당 전관 개관 30주년 기념 오페라 ‘노르마’

10월 26~2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알렉스 오예(연출)/로베르토 아바도(지휘)/여지원·데시레 랑카토레(노르마 역), 테레사 이에르볼리노·김정미(아달지사 역), 마시모 조르다노·이라클리 카히제(폴리오네 역)/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노이 오페라 코러스 외

 

‘여지원’의 오페라 지식 ‘지원’하기

오페라는 여러 예술이 한데 모인 종합예술이다. 성악가는 이 모든 것을 체화한 채 무대에 오른다. 노래는 물론 음악, 역사, 연출, 연극적 지식 등을 간과할 수 없다. 로열 오페라하우스가 제작한 ‘노르마’ 공연을 앞두고 있는 그녀에게 이탈리아 오페라, 벨 칸토 창법, 작품에 관해 물었다. 독자들의 지식을 ‘지원’하고자, 여지원이 오래 쌓아온 지식의 창고를 열었다.

 

본고장에서 경험한 성악가로서 ‘벨 칸토’ 창법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부분이 있을까요?

말 그대로는 ‘아름다운 노래’로 해석되잖아요. 사실 노래를 ‘아름답게’ 하려면 테크닉이 필요합니다. 안정된 호흡, 그 위에 저음부터 고음까지 균일한 소리를 내며 숨을 고르게 쓰는 것이죠. 특히, 벨 칸토 시대의 노래들은 보통 느리고 아름다운 멜로디의 아리아 이후, 기교가 많고 빠른 카발레타가 따라옵니다. 이 부분은 가수의 기교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한 의도로 작곡되었고요. 여기까지 무리 없이 부르려면 오랜 훈련을 거친 올바른 테크닉이 필요해요.

베르디 오페라의 여주인공은 대부분 ‘드라마티코 소프라노’에 적합하다고 하잖아요.

글쎄요, 우선 제 목소리는 리리코 소프라노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극적인 표현을 잘 할 수 있는 성격, 테크닉을 가지고 있고요. 종종 많은 음악 애호가들이나 음악학자들이 목소리의 카테고리를 나누곤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분류법을 선호하진 않는 편이에요. 성악가 입장에서는 오히려 모호한 기준의 카테고리에 따라 자기 목소리를 일부 레퍼토리에만 한정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거든요.

오페라 연출에서는 간혹 원작의 시대나 배경을 바꾸는 파격적 시도가 적용됩니다. 이에 대해 성악가로서 어떻게 받아들이는 편이세요?

사실 이탈리아의 관객들은 타 유럽의 극장에 비해 좀 더 전통적인 해석의 연출을 선호하긴 해요. 하지만 요즘은 새로운 시도를 하는 젊은 연출자들이 많이 주목받는 추세죠. 요즘 관객의 이해와 몰입을 돕기 위한 연출의 시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새로운 시도 안에서도 지켜져야 할 것들은 있죠. 다 바꾸더라도, 결국 대본과 음악은 바꿀 수 없으니까요. 연출과 지휘자, 오페라 가수가 함께 작곡가의 의도를 일관된 방향으로 잘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노르마’ 속 여사제 노르마는 종교적 신념과 개인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고국의 정신적 지도자이면서 적국의 장군을 사랑하는 나약한 인간이고, 아이 둘을 가진 엄마기도 하죠. 마지막에는 결국 희생을 택하는 모습까지…. 다각적 관점에서 접근 가능한 인물인 것 같은데, 그 중 가장 이입되는 모습이 있다면요? ‘만약 내가 노르마였다면, 이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는 것도 있나요?

배역을 준비할 때는 모든 감정을 이해하고 납득하려고 합니다. 특히 마지막 희생을 택하며, 아버지인 오로베소에게 아이들을 맡기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제가 노르마였다면…. 적국 장군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지 않을까요? 사랑의 감정이 생기는 순간은 막을 수 없겠지만, 책임감이 강한 터라 정말 그 사람과 사랑에 빠져 결실을 이루는 관계까지 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거든요. 제 선택대로라면 ‘노르마’ 이야기 진행이 안 되겠네요. 그래도 정말 만약, 극 중 노르마와 같은 결말에 도달한다면, 저도 노르마처럼 같이 희생하기를 택할 것 같아요.

 

여지원(1980~) 한국에서 태어나 서경대를 졸업, 이탈리아에서 파르마 음악원, 모데나 음악원 비엔니오 과정을 마쳤다. 201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무티 지휘의 ‘에르나니’의 엘비라 역으로 국제 데뷔했고, 2017년에도 ‘아이다’의 아이다 역을 맡아 한국인 최초 타이틀 롤로 노래했다. 이탈리아 주요 극장에서 베르디·푸치니 오페라 주역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FOCUS

 

오페라 ‘노르마’ 들여다보기

신의 율법과 인간의 사랑 사이 비극

 

 

로시니, 도니체티와 함께 벨 칸토 오페라의 대가로 손꼽히는 빈첸초 벨리니(1801~1835)의 오페라 ‘노르마’는 알렉산드로 수메의 극에 기초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펠리체 로마니(1788~1865)가 결말과 일부 장면을 수정해 대본을 완성했다. 1831년 12월 26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여사제 노르마의 사랑과 배신, 질투와 분노를 아우르는 비극을 그린다.

1964년 파리 오페라 ‘노르마’ 무대에 선 마리아 칼라스

1958년 마리아 칼라스의 ‘정결한 여신이여’ 무대 영상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로마의 지배를 받는 갈리아 지방의 드루이드 족은 독립 전쟁을 준비한다. 한편, 드루이드 족의 대사제 ‘노르마’는 조국을 점령한 로마 장군 ‘폴리오네’와 사랑하는 사이로, 비밀리에 두 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폴리오네는 노르마를 따르는 젊은 여사제 ‘아달지사’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를 알게 된 노르마는 폴리오네에게 복수하기 위해 로마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신성을 모독한 여사제를 화형 제물로 바치겠다고 선언한다. 폴리오네는 아달지사의 이름이 불릴까 초조해하지만, 노르마는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외치며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그녀의 진실한 사랑에 감동한 폴리오네도 함께 죽음을 택한다.

34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10편의 오페라를 남긴 벨리니는 “나의 모든 작품을 다 잃는다 해도 ‘노르마’만큼은 지키고 싶다”라며 작품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표했다. 하지만 노르마 역의 소프라노에게 고난도 가창력을 요구하는 어려움으로 20세기 전까지 이 작품은 거의 잊히다시피 했다. 이후,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1923~1977)가 노르마 역을 맡으며 작품 해석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노르마’는 그를 최고의 디바로 만들었다. 특히, 칼라스가 불러 유명해진 아리아 ‘정결한 여신이여(Casta Diva)’는 달에게 바치는 기도로, “아, 사랑하는 이여, 나에게 돌아와요. 사랑의 고요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다면, 내 가슴은 삶의 여명을 찾을 테고, 조국과 하늘은 모두 당신 안에, 당신 안에 있겠죠”라는 가사처럼 사랑과 조국, 종교 사이에서 갈등하는 노르마의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다.

홍예원 기자 사진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

 

 

MINI INTERVIEW | 연출가 알렉스 오예

사회적 규범에 갇힌 노르마

오늘날의 시선으로 새롭게 바라보다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의 2016년 시즌 개막작으로 초연되어 주목받은 오페라 ‘노르마’가 10월 26일부터 29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펼쳐진다.

이번 프로덕션의 연출을 맡은 알렉스 오예(1960~)는 현대적 요소와 광신적이고, 기이한 분위기를 융합해 벨리니의 작품을 재해석하고, 노르마의 복잡한 심리와 그가 지키려 했던 정체성을 보다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그는 “개인적 상황과 사회적 제약, 관습의 차이로 희생양이 된 여성의 딜레마, 이데올로기와 종교 사이의 갈등” 등 작품 제작에 영향을 받은 요소들을 언급하며, 이번 작품을 “개인의 자유에 호소하면서 편협성을 고발하는 오페라”라고 설명했다.

 

오페라 ‘노르마’의 특징은 무엇인가.

다양한 요소를 지닌 낭만적인 작품이다. 비극적인 사랑, 켈트 족의 숲, 고대 사원, 전사, 배신, 죽음, 폭력적이고 피에 굶주린 신, 자식을 죽이려는 어머니, 딸을 저주하는 아버지, 마지막으로 연인들이 불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화형식까지 초현실적이며 비극적인 요소가 모두 담겨있다.

노르마를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나. 개인적으로 그녀를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는가?

극의 초반, 노르마는 ‘대사제’라는 높은 지위 덕분에 세상의 정상에 서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낮은 심연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노르마의 죄는 과연 무엇인가. 사랑에 빠진 것? 엄마가 된 것? 둘 다 중대한 죄는 아니다. 노르마에게 죄가 있다면 신의 품 안에서만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종교에 중독된 사회에서 행복해지려고 노력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노르마를 조국과 종교에 반한 반역자로 보지만, 사실 그녀야말로 어려움을 딛고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닐까.

영국 로열 오페라 ‘노르마’(2016) ©ROH/Bill CooperCooper

한국에서 ‘노르마’ 실황은 쉽게 접하기 어렵다. 기원전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인 만큼 관객이 낯설게 여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당시의 종교 및 시대적 상황이 작품의 이야기 구성에 어떻게 작용했다고 생각하는가.

신에 대한 경외감, 순결, 고해성사 등의 요소가 드루이드 족, 여사제, 참회자 등을 통해 작품에 녹아들어 있다. 작품에서 종교는 사회를 하나로 엮는 접착제이자 기지(旣知)의 세계를 질서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한편, 규범에서 벗어난 사람을 억압하는 수단으로도 쓰인다. 이는 맹목적이고 끔찍한 권력의 도구다. 결국, 통제받는 딸이자 배신당한 연인, 절망에 빠진 어머니로 그려지는 노르마는 당시의 종교적 규범에 희생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대극인 ‘노르마’를 현대적 요소와 기이한 분위기를 융합해 재해석했다. 어떤 관점으로 각각의 요소를 구상했는지 궁금하다.

작품을 구상하며 현대의 사회적 선입견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선입견은 작품에 등장하는 각각의 상징을 중심으로 모인다. 예를 들어 작품 속 십자가는 종교적 의미가 아닌, 광신적인 군사 조직의 깃발과 현수막에 등장하는 십자가를 의미한다. 또한, 관객이 노르마에게 닥친 비극에 최대한 공감할 수 있도록 무대 위에 친밀하고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현대적으로 구현해 극적 대비를 강조했다.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번 작품은 현실적인(심지어 초현실적인) 배경에서 펼쳐지지만, 이는 특정 시대의 현실을 반영한다기보다, 과거 유럽에 비극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던 차별과 광신주의, 폭력으로의 회귀에 대한 실질적인 두려움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이다. 노르마가 처한 비극적인 운명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고자 한다.

정리 홍예원 기자 사진 예술의전당

 


ABOUT

 

화제의 ‘노르마’를 선보일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는?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 ©SHUTTERSTOCK

꿈의 무대에 오른 한국 성악가들부터,

위기 속에서 기회를 만들어가는 세계 오페라의 메카를 살펴본다

 

런던의 중심 코번트 가든에 위치한 로열 오페라하우스(ROH)는 로열 오페라와 로열 발레단의 본거지로, 오페라와 발레를 번갈아 올리는 레퍼토리 시스템을 취한다. 1732년 개관해 건립 초기에는 헨델이 이곳을 근거지로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를 제작해 헨델 작품은 지금도 극장의 정체성을 이룬다. 연극 전용과 다용도 공연장으로 성격이 오가는 동안 1808년과 1856년, 두 차례의 화재를 겪었지만 재건했다. 현재 로열 오페라하우스는 1859년 지어진 세 번째 건물로, 양차 세계대전 동안 풍화를 겪었으나, 영국예술위원회의 보조금 교부와 복권 기금 사용의 영국 예술정책의 거대 변화에 맞춰 부분 개조와 리노베이션을 단행했다.

20세기 중반 로열 오페라가 세계적 거점으로 자리 잡은 건 같은 기간 로열 오페라하우스 음악감독으로 재임한 라파엘 쿠벨릭(1955 ~1958), 게오르그 솔티(1961~1971), 콜린 데이비스(1971~1986)의 역량에 기인한다. 마리아 칼라스·브리기트 닐슨·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한스 호터·티토 곱비 같은 불세출의 스타들이 EMI, 데카 등 런던 소재 레이블과 계약하면서, 로열 오페라에서 공연하고 스튜디오에서 앨범을 남겼다. 1950년대, 이들을 단시간에 미국과 유럽에서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수송할 제트기가 1950년대 도입된 것도 로열 오페라의 캐스팅이 빛난 배경이다.

1980년대부터 20여 년간 로열 오페라는 좌충우돌했다. 1987년부터 2002년까지 감독한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약점을 보였고, 1980년대 마가릿 대처 내각은 오페라를 고급문화로 규정해 지원을 축소했다. 음악적, 재정적 무능을 치유할 해결사로 로열 오페라는 도산 위기의 아메리칸 발레시어터를 건져냈던 컨설팅 전문가 마이클 카이저(1953~)를 1998년 로열 오페라 감독으로 초빙했다. 카이저는 로열 오페라의 관행부터 바꿨다. 전막 종료 후 관객들의 꽃다발 투척을 금지시켰고, 정부가 지원금을 늘려주면 청소년 교육에 쓰겠다고 인터뷰하면서 여론을 움직였다. ‘뉴욕타임즈’가 그를 ‘미스터 반등(Turnaround)’으로 칭하며 개혁에 힘을 실었다.

21세기 로열 오페라의 본격적인 반등은 카이저의 후임, 토니 홀(1951~)이 이뤘다. 홀은 1996년부터 5년 간 BBC 보도본부장을 수행한 경험을 자산으로 로열 오페라의 의사 결정 구조에 메스를 가했다. 인턴부터 부서장까지 시즌 프로그래밍 회의에 참가시켰고, 결론을 낼 때까지 토론을 장려하는 리더십은 BBC 경험을 응용했다. 140자 분량 트위터에 복수의 사용자가 오페라 대본을 작성하고 교정하는 실험 역시 홀의 업적이다. 로열 오페라 감독, 음악감독, 캐스팅감독, 행정감독이 각자 권위를 인정하며 시즌 프로그램을 완성하는 지금의 집단 지성도 그렇게 무르익었다.

 

로열의 문을 두드린 한국 성악가들

조수미

테너 김건우

소프라노 조수미는 1991·1992년 ‘호프만의 이야기’ 올랭피아로 로열 오페라에 등장했고, 1993년 ‘마술피리’ 밤의 여왕으로 당대 최고의 콜로라투라 역량을 런던에서도 입증했다. 정명훈은 1997년 ‘오텔로’로 입성했지만, 같은 시기 런던 심포니와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스레 로열 오페라와는 멀어졌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입지를 다진 소프라노 홍혜경은 2005년 ‘투란도트’의 류 역으로 로열 오페라를 섭렵했고, 이듬해 ‘라 보엠’의 미미로 런던에 돌아왔다. 2007년 테너 김우경이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2008년 테너 김재형이 ‘돈 카를로’ 타이틀롤, 2013년 테너 이용훈이 ‘토스카’의 카바라도시로 로열 오페라에 첫 선을 보였다. 베이스 연광철은 2009년 ‘로엔그린’의 하인리히 왕으로 현지 평단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베이스 박종민은 2014년 ‘라 보엠’의 콜리네 역으로 코벤트 가든을 노크했다.

 

2019년 ‘피가로의 결혼’에서 카운터테너 김강민(케루비노 역)

2022년 ‘삼손과 델릴라’에서 테너 백석종(삼손 역)

2001년부터 로열 오페라가 시행하는 신인 가수 육성 프로그램인 ‘제트 파커 영 아티스트’에 한국인 가수들(소프라노 이하영·이해기, 테너 박지민·김지현, 바리톤 임창한, 베이스 김지훈, 베이스바리톤 길병민)이 선발되면서 계약 기간 2년 동안, 단역부터 조역, 준주역, 주역에 오르는 계단식 성장을 밟는 사례가 늘었다. 2016년 ‘외투’ 단역으로 출발한 테너 김정훈은 2018년 ‘니시다의 천사’의 주역 레오네 역할을 따냈다. 테너 김건우 역시 2017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단역으로 시작해 2019년 ‘연대의 딸’ 주역 토니오로 발돋움했다. 김정훈, 김건우 모두 제트 파커 영 아티스트 출신으로 현재 런던을 거점으로 유럽 대륙을 오가며 활동한다.

2015년 ‘카르멘’에서 테너 이용훈(돈 호세 역)

2007년 ‘라 보엠’에서 소프라노 홍혜경(미미 역)과 테너 김우경(로돌포 역)

비(非) 제트 파커 영 아티스트들의 활약도 주목할 만 하다. 2016년 베이스바리톤 심인성이 ‘오이디페’에 출연했고, 2017년 테너 박성규가 김재형을 대신해 ‘투란도트’ 칼라프로 데뷔했다. 2019년 카운터테너 김강민은 로열 오페라하우스 ‘피가로의 결혼’ 제작 사상 첫 남성 케루비노에 캐스팅되어 화제를 모았고, 2022년 테너 백석종이 ‘삼손과 델릴라’의 삼손 역으로 호평받으며 꾸준히 재초청됐다. 작곡가 진은숙의 ‘거울 뒤의 앨리스’는 당초 2018/19 시즌 로열 오페라 초연이 추진됐지만 결국 무산됐다.

 

전통과 역사가 흔들리기도

로열 오페라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와 코로나로 2020년대 들어 줄곧 신음했다. 연일 작품을 올리는 레퍼토리 시스템이 정착한 로열 오페라는 건강이 좋지 않은 성악가를 유럽 대륙에서 바로 대체하지 못하면서 ‘디보’ ‘디바’ 부재의 시기를 걷고 있다.

브렉시트 전까지 로열 오페라는, 오전 10시에 당일 저녁 출연할 새로운 주역을 찾으라는 캐스팅 감독의 지시가 떨어지면 이탈리아, 독일에서 비행기를 타고 런던에 도착해 간단히 입을 풀고 실전에 투입할 풍부한 인재풀과 대응 능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EU 탈퇴와 함께 이런 시스템이 붕괴됐다. 이탈리아 오페라, 바그너 오페라 대체자를 영국에서만 찾을 때 공연의 질은 게오르그 솔티나 콜린 데이비스 감독 시절, 대타들이 일군 퍼포먼스와 비교가 어렵다.

2020년 7월 비정규직을 전원 해고하고, 이듬해 8월 정규직 인력의 25퍼센트를 정리한 로열 오페라하우스는 재무적으론 코로나 이전의 수준을 회복했다. 그러나 구성원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지난 7월 로열 오페라하우스 오케스트라 노조는 코로나 19 이전에 받던 급여를 주지 않으면 시즌 중 파업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부터 2026년까지 영국의 예술 기금에서 로열 오페라하우스 용도의 보조금은 연간 290만 파운드(약 50억) 삭감될 예정이다.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가 연간 1,260만 파운드(약 215억)의 지원금이 끊기면서 런던에서 맨체스터로 본거지를 옮길 위기에 처한 것도 그런 이유다. 한정된 재원에서 로열 오페라하우스만큼은 살려보려는 영국 예술 위원회의 고육책이 가져온 후폭풍이다. 코로나 위기를 통해 군소 단체를 배려해 공적 자금을 기계적으로 배분하는 관행은 벗어났지만, 결국 ‘로열 오페라하우스는 부자들의 놀이터’라는 고정 관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를 위험이 크다. 로열 오페라 공연 실황을 영국 격오지에 방영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해도 오페라 확산을 제대로 달성하긴 어렵다.

 

최고의 ‘별점’을 따내는 ‘별’들의 격전지

쇼나 욘체바

골다 슐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들이 오르는 극장의 공연은 계속된다. 로열 오페라 2023/24 시즌은 2002년부터 로열 오페라하우스 음악감독으로 재임한 안토니오 파파노(1959~)의 마지막 계약 기간이다. 2024년 가을, 런던 심포니 음악감독으로 떠나는 파파노의 송별회 성격을 띤 초대형 갈라가 내년 5월 열린다. 파파노는 배리 코스키 연출 ‘라인의 황금’, 요나스 카우프만-손드라 라드바놉스키 라인업의 ‘안드레아 셰니에’, 지음(知音)처럼 우정을 나누며 절묘한 호흡을 맞춰온 연출가 크리스토프 로이 버전의 ‘엘렉트라’를 지휘한다. 특히 ‘엘렉트라’에는 시대를 대표하는 드라마틱 소프라노 니나 슈템메, 카리타 마틸라가 동반 출연한다. 팬데믹 기간 황폐해진 재정을 회복하는 차원으로 나선 2024년 6월 일본투어(리골레토, 투란도트) 지휘봉도 파파노가 잡는다.

전석 매진과 정론지 평론 별점 5개를 한꺼번에 끌어낼 초대형 소프라노 부재가 아쉬운 상황에서도 로열 오페라는 스타성이 출중한 디바를 전진 배치했다.

소냐 욘체바가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 나딘 시에라가 ‘사랑의 묘약’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프리티 옌데가 ‘리골레토’, 아스믹 그리고리안이 ‘나비부인’, 아이글 아흐메시나가 ‘카르멘’ 주역으로 나선다. 1992년 로열 오페라 ‘라 보엠’에서 커플 연기를 하면서 결국 결혼에 골인했던 로베르토 알라냐와 안젤라 게오르규가 이제는 남남이 되어 이번 시즌 각각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팔리아치’ 더블빌과 ‘라 보엠’에 따로 출연한다. 알라냐의 상대역은 세 번째 부인 알렉산드라 쿠르작이 맡는다.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

정치적 공정을 배려한 캐스팅도 눈에 띤다. ‘코지 판 투테’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소프라노 골다 슐츠를 피오드딜리지에, 유색인 편견을 심화하는 ‘화이트 워싱’ 비판에 대한 답변으로 ‘토스카’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엔젤 블루를 기용했다. 헨델 연구는 오라토리오 ‘예프타’로 계속되고 테너 앨런 클레이튼, 소프라노 제니퍼 프란스, 메조 소프라노 알리스 쿠트로 이어지는 당대 최고의 실력파 영국 가수들이 총출연한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도 웨일즈 출신 노장 바리톤 브린 터펠이 나온다.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