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마태 수난곡’으로 유럽 투어 중인 필리프 헤레베헤를 벨기에 브루게에서 만났다. 리허설에서 그는 프랑스와 독일어, 영어와 플라망어를 자유로이 오가며 완벽을 위해 끝없이 오케스트라와 솔리스트를 담금질했다. 그의 이름에, 무한소수로 이어지는 황금비율을 상징하는 ‘파이(phi)’가 들어가는 건 운명이었을까. 내한을 앞둔 필리프 헤레베헤가 전하는 그의 이야기.
왜 의사가 아니라 음악가가 됐느냐고 묻는 건 우문이다
어머니는 상당한 수준의 피아니스트였다. 나는 만 3세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나날들의 맨 첫 장부터, 피아노 소리가 내 주변에 있었다. 아마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음악을 들었을 것이다. 겐트 음악원에서 계속 피아노를 배웠다. 가톨릭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들어가면서 의무적으로 매일 미사를 드리는 것이 일과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미사가 있었고 거기엔 당연히 합창단의 성가와 찬양이 포함됐다. 팔레스트리나와 바흐의 음악이 주를 이뤘다. 여덟 살부터 이 합창단에 속해 노래를 시작했다. 나는 학교와 겐트 음악원을 동시에 다녔다. 열두 살부터 학교 합창단의 지휘를 맡았다. 전 학년이 다 참여하는 합창단이었는데, 악보 보는 눈이 빠르고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들 내 말을 따랐다. 열세 살부터 매일 지휘자로서 미사에 참석했다. 합창단에 속해 노래하는 것보다 스스로 음악을 이끌어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소리가 나쁜 편도 아니었지만, 노래보다 지휘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열세 살의 나는, 바흐의 칸타타를 지휘하면서 어떠한 ‘영원’을 본 것 같다. 이걸 하면서 평생 늙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물론, 음악을 직업으로서 택할 거라 예상치 못했다.
음악에 대한 사회적인 상황이나 분위기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1950년대 후반ㆍ196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바로크 음악을 연주하는 전문 연주단체는 전무했다. 바로크 음악은 비전공자들의 취미 정도로만 인식이 됐고, 실제로 내가 듣고 자란 바흐 ‘마태 수난곡’은 모두 아마추어 연주 단체에 의한 것이었다. 낮에는 변호사ㆍ의사ㆍ교수ㆍ연구원 등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저녁에 모여서 바흐를 노래하고 오랜 연습을 거쳐 무대에 올리는, 질적으로는 아주 뛰어나지 않더라도 중간 이상은 하는, 무엇보다 음악을 향한 대단한 열정과 뜨거움이 느껴지는 연주였다. 아마추어들이 모여서 ‘마태 수난곡’을 공연하는 건 당시에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 구스타프 말러가 빈의 오케스트라(빈 필)를 이끌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오케스트라 절반 이상은 다른 직업을 가진 아마추어였다. 사회적으로 인텔리 혹은 부르주아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저녁에는 극장에 와서 연주를 했다. 그러니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지금과 같지 않았고, 말러는 그 시대에 이해받기에 너무 앞서나갔던 존재였다. 과거 부르주아들에게 뛰어난 수준의 악기 연주는 덕목처럼 요구되는 사항이었다. 높은 수준의 음악 교육이 음악원(컨서버토리)을 통해 모두에게 허용된 건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내 아버지는 벨기에의 자그마한 도시인 겐트에서 주로 왕진을 가는 가정의학전문의였다. 아버지 세대에게도 음악을 꽤 높은 수준까지 배우는 것이 의무사항이었다. 여자들에게는 악기 대신 발레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했다. 내 여동생들 모두가 발레를 꽤 오래 배웠다. 내가 음악원에 계속 다니면서, 피아노와 지휘, 하프시코드, 작곡 이론 등을 배울 수 있었던 건 첫째 내가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이고, 나아가 부모님의 생각 저변에 음악을 배우는 것이 정신적 고양을 가능하게 한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음악을 하기에 정신적 혹은 물질적 지원이 가능한 환경에서 태어나는 건 아니다.
물론 전업 음악가가 되리라는 기대는 누구도 하지 않았다. 열여섯 살 즈음, 조숙했던 나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었고,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정신과 전문의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목표였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깊이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건 목표가 아니었다. 열여섯의 나는 음악원에서 꽤나 재능 있는 학생이었지만, 세계적인 연주자가 되어 세상을 누비는 일이 내 몫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건 다른 이들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자기현시적인 사람이 아니다.
정신과 전문의가 되려면 일반 의대공부를 마쳐야 했기 때문에 의대에 진학했고, 공부를 마쳤다. 스물여섯에는 이미 의대 공부를 마치고 병원에서 실습도 했고, 때로 몸이 안 좋은 아버지를 대신해 왕진 가방을 들고 진료를 가기도 했다. 그렇게 꿈꿨던 의대 공부를 마쳤고, 정신의학공부를 했지만 막상 발을 담그고 나서 이건 내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보기 전에 가졌던 모든 기대가 환상에 가까웠고, 계속 해야 할 의미를 찾지 못했다.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 정당성을 찾을 수 없는 행위를 지속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의대 공부의 한 편에서 음악원에 계속 다니고 있었고, 피아노 대신 하프시코드와 작곡, 지휘를 배우며 이미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를 창립해 지휘를 하고 있었다. 막연히 우리가 모여서 음악을 하면 재미있겠다라는 소박한 기대와는 달리,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놀라울 만큼 열광적이었다. 창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럽 여기저기로 연주 여행을 가게 됐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지휘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니는 데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다. 낮에는 정신과 전문의로 일하고,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악보를 읽으며 음악을 떠올렸다. 남는 시간에 지휘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단순하고 소박한 바람이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사로서의 일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가 주목받으면서 음악이 결국 내 삶의 전부가 되었다.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났고 나는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내리면서 지금까지 왔다. 음악이 내 삶에서 부재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함량의 차이가 있었을 뿐, 나는 늘 음악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에게 왜 의사가 아니라 음악가가 됐느냐고 묻는 것은 일종의 우문이다. 나는 음악을 내려놓거나 중단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정신과 전문의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기 전에 이미 지휘를 시작했으며, 바흐의 칸타타에 몸과 마음이 경도된 상태였고, 기억할 수 있는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음악이 내 곁에 있었다.
헨델은 별로 마음이 가지 않는 작곡가. 오히려 퍼셀을 선호한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와 구스타브 레온하르트를 내 음악의 스승으로 만나게 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만약 그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휘자를 꿈꾸는 걸 포기했거나 혹은 그 꿈은 좀더 느리게 이뤄졌을 것이다. 당시의 고음악 분야는 손바닥만큼 규모가 작았다. 나는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를 이끌면서 겨우 이십대 후반에 이미 많은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덕분에 거장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기꺼이 스승이 됐고,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당시는 이제 막 발아하고 있는, 고음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모두 동료가 되어 연대하고, 음악적 교류를 하면서 더 나은 음악을 위해 함께 응원하고 도와주는 분위기였다. 그런 연대 의식 속에서 서로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누고자 했기에, 음악원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깊은 음악적 자산을 짧은 시간 안에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유행처럼 바로크 음악은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 역시 고음악 열풍의 첫 세대를 이끄는 주자로서 각광받았다. 1970ㆍ80년대를 거치면서 바로크 연주 단체들이 전문적으로 생겨났고, 음악원에도 고음악 학부가 창설됐으며, 바로크 전문 연주자들이 생겨났다. 샹젤리제 오케스트라에 있는 몇몇 첼리스트들은 아너르 빌스마의 제자인데, 그들이 단 한 번도 모던 첼로는 연주해본 적 없다면 이해가 되겠는가. 아르모니아 문디에서는 100여 장에 달하는 바로크 레퍼토리 음반들을 출시했고, 나는 레이블을 대표하는 지휘자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아주 순식간에, 연달아 이뤄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고음악 전문 지휘자가 아니다. 그저 지휘자이고, 나의 레퍼토리 중에 바로크 음악이 있을 뿐, 모든 바로크 작품을 다 지휘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헨델은 별로 마음이 가지 않는 작곡가이다. 오히려 퍼셀을 선호한다. 라모 역시 거의 연주하지 않는다. 훌륭한 작곡가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작품을 연주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곡의 구성이나 작곡 기법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또한 여러 층의 레이어가 없는 작품은 지휘자로서 도전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명백하고,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작품들이 고음악 중엔 꽤 있다, 지휘자로서 재발견해내거나 재해석해낼 여지가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면에 슈만과 브람스를 연주하는 건 또 다른 도전이 된다. 브루크너와 베베른 역시 마음 깊이 좋아하는 작곡가들이다.
가수들의 목소리에서, 나는 그들의 과거를 본다
의사로서의 경험이 짧았지만 (그래서 확언하기 힘들지만), 음악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긴박한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피와 살과 육체가 압도하는 세계가 의사로서 마주한 세계였다면, 내가 동경하는 음악은 높고 숭고한 정신들이 존재하는 추상의 세계이니 오히려 반대 지점에 있다. 하지만 생사를 다투는 순간들을 눈앞에서 목도한 것은 지휘자로서 큰 음악적 자산이 되었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지휘든 연주든 자신이 살아온 것을 다시 무대 위에 쏟아내는 과정 아닌가.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의 목소리에서 나는 그들의 과거를 단번에 본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읽고 듣고 보고 자랐는지가 바로 전달된다. 생사를 다투는 긴박함, 혹은 그 앞에 놓인 인간의 운명과 무력함, 불안과 슬픔과 고통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봤기 때문에, 그 감정들을 곡을 해석하면서 다시 환기시킬 수 있다. 브뤼셀에서 곧 연주할 바흐의 ‘마태 수난곡’은 지금까지 300회 넘게 공연을 올렸다. 처음 연주한 것이 스물세 살 때인데 나는 이제 예순을 훌쩍 넘겼다. 그 첫 순간의 설레는 마음과 흥분이 아직도 기억난다. ‘처음’에만 가질 수 있는 감정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300번 넘게 반복하면서, 조금씩 더 완벽에, 내 이상향에 가까워지고 있다. 오늘의 연주는 늘 어제보다 낫다. 그걸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으므로, 그러기를 절실히 바란다. 근래 들어 아주 뛰어난 가수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행운이다. 합창단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모두 뛰어난 솔리스트들과 무대에 서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감정적으로 좀더 예리하고 아티큘레이션이 정확한 공연을 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 비유해보자. 만약 우리가 그의 작품을 읽는다면, 예순의 독자는 더 많은 것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스무 살에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면 우리가 잡아낼 수 있는 건, 그가 경험한 인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순 살이 되어 인생을 다 살아내고, 희로애락에 대해, 사랑과 이별과 아픔에 대해서도 다 살아낸 이후라면 한 문장 한 문장이 다르게 다가온다. 내 음악 역시 60대가 읽는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깊이를 가지기 바란다. 기술적으로 완전 무결하기를, 음악적으로 좀더 울림이 있기를, 더 깊고 순수하고 불순물이 없는 오로지 음악만이 남은 공연이기를 지향하고, 또 간절히 바란다.
더불어, 젊고 재능이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수들을 찾아내는 것도 아주 중요한 작업이다. 나는 일 년에 400명 넘게 오디션을 보며, 새로운 목소리를 찾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내가 이끄는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는 사실 합창단이 아닌 솔리스트들의 집합체라고 해야 맞다. 거의 세계일주를 하면서 살아왔지만, 지금까지 공항과 극장과 도시만 본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시에 가는 것은 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배우는 기회가 된다. 유럽 청중 나이는 평균 60세 정도 되는데, 한국에서는 20ㆍ30대들이 클래식 음악을 들으러 공연장을 찾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음악에 대해 미리 공부하고 준비된 상태로 오는 것이 느껴져 또 놀라웠다. 2006년, 내한 당시 공연이 끝나고 길게 줄을 서서 나를 기다리던 청중이 짤막하게나마 나에게 말을 걸어왔는데,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공연의 흥분과 감동이 묻어나는 얼굴로, 대륙의 끝에서 내 음악을 들으며 오랫동안 내 연주를 직접 듣기를 기다려왔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데 마음속에 불이 반짝 켜지는 것 같았다. 보통 유럽의 청중은 내 또래이거나 더 나이가 많다. 객석을 바라보면 온통 은회색이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온통 검은색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클래식 음악의 미래는 아시아에 있다고 본다. 일본 시장도 그렇고, 한국이나 중국 역시 놀라울 정도다.
현대사회의 지휘자는 CEO가 되는 것과 같다
다시 태어나도 음악을 할 것인가…. 음악 아니라 다른 걸 고르라면 작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작가는 오롯이 홀로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해나간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기자나 법률가도 흥미로울 것 같고, 정치나 경제에도 관심이 많다. 나는 ‘음악만 아는 지휘자’가 아니다. 누군가는 음악만 알고 생각하기에도 인생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특히나 현대사회에서 지휘자가 되기란 최고경영자(CEO)가 되는 것과 같다.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ㆍ샹젤리제 오케스트라ㆍ로열 플레미시 오케스트라까지, 음악가와 음악가가 아닌 사람들까지 포함해 나를 믿고 따르며 내가 하는 음악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300명이 넘는다. 그들의 헌신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는 책임 역시 내 몫이다.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단체이고, 라 샤펠 로얄은 샹젤리제 오케스트라로 거듭났다. 나는 지휘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외교관이기도 하고 행정가이기도 하다. 정치인들과도 만나 예산에 대한 이야기와 지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메세나를 위해 기업인들을 만나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 투어를 위해 하루에 100명이 넘는 인원이 유럽의 도시를 순회한다. 유럽의 경제위기가 오케스트라의 예산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일각에서는 이걸 ‘예술의 위기’라고도 부른다. 이럴 때일수록, 지휘자의 음악 외적인 역량이 중요하다. 정치인과 기업인들을 만나고 그들을 설득시키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위해 넉넉한 예산과 지원을 약속 받으려면 음악만 아는 지휘자여선 안 된다. 식솔을 300명이나 거느린 가장인 셈이다. 그에 따른 책임감을 가지고 이런 음악 외적인 활동 역시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나는 때로 직장 상사이기도 하고, 행정적인 면에서 수장이기도 하며, 무대 위에서 음악적으로도 그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는 지휘자이지만, 공연이 끝난 뒤 혹은 리허설에서는 격 없이 대화를 나누는 친구이기도 하다. 마치 한 가족의 가장과도 같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리허설과 연주, 투어까지 삶과 음악을 나누고 길 위에서 여정을 함께하고 있으니까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가족이다. 투어 일정이 빡빡하고 같은 곡이지만 매번 다른 홀에서, 다른 청중과 만나기 때문에 공연은 그 자체로서 더더욱 발전해나간다. 늘 완벽에 가까워지고자 최선을 다하고, 서로가 꿈꾸던 이상적인 지점에서 음악으로 만나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적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 2012년 브루크너 전곡 연주는 아주 깊고 진한, 여러 개의 레이어가 겹쳐진 세계로의 여행인데 우리는 힘들고도 쉽지 않은 그 도전을 함께 해냈다. 운이 좋았고, 지금까지 행운과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의 노력이 더해져서 지금의 자리에 왔다. 음악가로서 내 휘하에 이만 한 수준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음반 레이블까지 있으니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음악적으로는 끝이 없는 것 같다. 바흐ㆍ모차르트ㆍ멘델스존ㆍ브람스ㆍ리게티… 모두 다 음악이고 나는 그냥 음악을 하는 지휘자일 뿐, 나에게 고음악 전문 지휘자라고 하는 건 일종의 분류에 불과하다. 실제로 나의 레퍼토리는 더 폭이 넓다. 물론 바흐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겠지. 미사 중에 바흐의 칸타타를 지휘하는 열두 살 소년이 이 세계와 우주의 일면을 우연히 마주했던 그 시절로부터 굉장히 멀리 온 것도 같고, 겨우 한두 발짝 떼었는데 벌써 이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양면적인 감정이 든다.
아르모니아 문디와의 협력관계를 마치고, 자체 레이블인 파이(phi)를 통해 이미 아홉 장의 음반을 냈다. 내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레퍼토리를 녹음하고, 원하는 완성도가 담긴 음반을 낼 수 있어서 여러모로 애착이 간다. 아무래도 음반사와 함께 작업을 하다 보면 그만큼 제약이 따른다. 원하는 레퍼토리를 못 하게 되거나, 시기를 미룬다거나,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제작 여건이거나…. 가장 자유롭기 위해 음악을 하는데 오히려 음악으로 인해 발목이 묶이는 상황에 처한다. 그래서 아르모니아 문디를 나와 파이를 만들었다. 내 이름의 첫 글자들이기도 하고, 고대 그리스 문자의 Φ(피)이기도 하다. 또 수학의 황금 비율과 자기장, 전기장을 나타내는 약어이기도 하다. 내가 만들어내는 음악이 가장 완벽한 비율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였다.
자유와 완벽과 순수, 음악으로 내가 닿고자 하는 지점이고 지금까지 부지런히 달려와서 이제는 거의 손에 닿을 듯하다. 앞으로 허락된 시간 동안 더 완벽하고 순수한 음악을 위해 우리의 여정을 계속할 것이다. 이제는 이렇게 연주를 마치면 한동안은 서 있기가 힘들 만큼 체력이 예전 같지 않지만 투어와 레코딩 모두 더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음악을 통해 청중 역시 내가 잠시 닿은 완벽과 순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 절대 자유를 느끼리라. 앞으로의 바람은 단지 그것뿐이다.
*3월 20일 브루게 콘세르트헤보 콘서트홀에서 펼쳐진 바흐 ‘마태 수난곡’에 포디엄은 따로 없었다. 무대와 지휘자의 경계가 없어서인지 필리프 헤레베헤는 공연 도중 오케스트라에 아주 가까이 다가서면서 음악을 이끌어나갔다. 그의 손짓을 따라 경건하고 숭고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헤레베헤는 오는 5월 31일과 6월 1ㆍ2일, 샹젤리제 오케스트라ㆍ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를 이끌고 내한해 두 개의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5월 31일 경기도 용인 포은아트홀에서는 모차르트 교향곡 38번 ‘프라하’ K504ㆍ40번 K550ㆍ41번 K551 ‘주피터’를, 6월 1ㆍ2일 LG아트센터에서는 모차르트 교향곡 41번과 레퀴엠을 선보인다. 모차르트 레퀴엠의 독창자로는 임선혜ㆍ크리스티나 함마르스트룀ㆍ벤저민 휼렛ㆍ요하네스 바이서가 나선다.
글 김나희(파리 통신원) 사진 Michiel Hendryck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