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그리고80’

인간으로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월 1일 12:00 오전

우리는 세상을 얼마나 느끼며 살고 있을까. 주어진 생에 절절히 감사하며 살고 있을까. ‘19그리고80’은 빠르고 각박한 세상에서 생명의 가치와 사랑을 오롯이 누리며 살아가는 80세 할머니 모드와 그녀와의 특별한 만남으로 인생의 참의미를 깨달은 19세 청년 해롤드의 영원히 변치 않는 이야기다.

지난해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배우 박정자가 10여 년 전부터 시작한 ‘박정자의 아름다운 프로젝트’인 ‘19그리고80’은 2003년 초연된 이래, 2004·2006년에 이어 2008년에는 뮤지컬로 올려졌다. 이후 4년 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온 다섯 번째 무대는 한국 연극의 상징적인 공간인 명동 삼일로창고극장에서 2012년 12월 14일부터 30일까지 관객을 맞이했다.
박정자의 ‘19그리고80’은 모드 역을 제외하고선 연출과 무대, 배우들이 매번 새롭다. 특히 해롤드 역은 매번 박정자가 고심하며 섭외에 공을 기울이는 배역이다. 이번에도 ‘5대 해롤드’를 캐스팅하는 일은 순탄치 않았다. 극중 해롤드는 열아홉 살이지만 지금까지 배역을 거쳐 간 배우들을 보면 20대 후반이거나 30대 초반이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배우 박정자는 “열아홉 살은 완전하지 않은, 앞이 보이지 않는 인생인지라 그 나이만큼 소화하기 어려운 배역”이라고 이야기했다. 신선하면서도 마냥 신선하기만 하면 곤란한(?) 해롤드 역에 간택된 배우는 지난해 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10월, 국립극단의 배우 양성 프로그램 ‘차세대 연극인 스튜디오’가 선보인 ‘손님’에 출연했던 조의진이다. 직접 만나본 배우 조의진은 세상 모든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해롤드의 순진무구함을 닮아 있는 모습이었다.
‘19그리고80’에서 모드와 해롤드의 나이 차는 61년, 각 배역을 맡은 배우 박정자와 조의진의 나이 차는 41년이다. 그 수를 헤아리다 보니 모드와 해롤드가 바라본 세상이 오늘을 살아가는 두 배우가 느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들이 생각하고 빚어내는 ‘19그리고80’의 빛깔은 어떠할지, 또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건넬지 더욱 궁금해졌다. 생명과 죽음, 젊음과 늙음, 사랑에 관한 가치를 보물 상자처럼 담아낸 ‘19그리고80’의 키워드들을 두 배우와 함께 꺼내며, 진솔하게 나눈 이야기를 옮겨본다.

생명과 죽음
열아홉 살이 되기까지 어림잡아 열다섯 번의 자살 시도를 해왔던 해롤드. 그의 취미는 장례식장과 폐차장을 찾는 것이다. 여든 살의 모드는 동물원과 꽃집을 찾아다니며,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발견하는 데 기쁨을 느낀다. 게다가 스모그에 죽어가는 길가의 나무를 뽑아다가 산기슭에 다시 심고, 동물원의 더러운 우리에 갇힌 바다표범을 바다에 풀어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무슨 이유에선지 장례식장을 자주 찾곤 한다. 끊임없이 생명을 살리려고 하는 모드와 어떻게든 죽으려 하지만 정작 죽음을 두려워하는 해롤드는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장소인, 장례식장에서 서로를 처음 만난다.
조의진 살아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기에 해롤드는 어리기도 하고, 불충분한 것이 많은 나이죠. 물론 모드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에요.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늘 생명에 관한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해왔어요. 생명이 제 역할을 해낼 수 있게 돕는 것 말이죠. 저도 모드 같이 바다표범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나무가 온전히 숨 쉴 수 있는 곳에 뿌리를 내려주는 일을 생각하는 대로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하지만 생각만 할 때가 많죠. 중요성을 알면서도 정작 실천에 옮기기 힘든 일이라는 걸 매번 느껴요.
박정자 맞는 말이야. 난 ‘19그리고80’ 무대에 오르면서 모드를 내 롤모델로 삼았어. 스스로 돌아보니 연극배우로 50년을 사는 동안 가진 게 없더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명성에 비해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거의 없다는 의미야. 난 연극배우로 살아온 시간만큼 가난해. 아마 화려한 사람이었다면 모드 할머니 역을 소화하기 힘들었을 거야. 지닌 것이 없으면 없을수록 모드의 모습에 부합하는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모드처럼 무소유·무공해를 추구하는 거지. 또 80세 생일에 모든 것을 정리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니 그토록 가벼울 수 있는 거야. 나도 참 그렇게 살고 싶어. 80세가 되면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드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 있을지 궁금해.
조의진 모드의 삶이 가벼울 수 있는 건 죽음이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우리가 죽음을 항상 가까이에 두고 산다고 생각하거든요. 언제든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을 수 있다고,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라고 인식하면서 살려고 노력해요. 그러면 매순간 충실할 수 있고, 제 삶이 좀 풍부해지는 느낌이 들죠. 그래서 가끔은 민감하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해요. 하지만 그걸 극복하면서 성장하게 되더라고요.
박정자 그래서 모드가 얘기하잖아.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기 시작하는 거야. 죽음이 뭐 그리 이상할 게 있어. 죽음은 놀라운 일이 아냐. 죽음은 삶의 일부지. 죽음은 변화일 뿐야! 죽음은 삶으로부터 크게 한 발을 내딛는 일이지.” 이 대사를 하면서 난 위로를 많이 받아. 내 나이쯤 되면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자주 보게 돼. 사실 오늘도 장례식장에 다녀왔어. 한 달 전에 봤던 사람인데, 갑자기 폐렴에 걸려서 보름 넘게 앓다가 세상을 떠난 거야. 그런데 그게 놀랍다기보다는 그 사람이 죽는 복을 타고났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오랫동안 아프지 않고 적당한 나이에, 주변 사람들 괴롭히지 않고, 고통 없이 사뿐하게 떠나는 거… 난 그게 축복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래도 극중에서 모드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니까, 연기를 하면서도 마음 한 편은 무겁지.
조의진 죽음이 있다는 것 자체는 삶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 존재만으로 삶에 대한 시야가 더 확장된다고 할까요. 해롤드 입장에서 죽음은 좁게는 어머니에 대한 반항심이지만, 넓게는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에요. 그리고 모드와의 만남을 통해서는 죽음이 삶의 방향을 전진하게 만들고, 살아있음을 진정으로 느끼게 하는 과정이 되는 거죠.

젊음과 늙음
재미도, 의욕도 없이 살아가던 해롤드의 지루한 일상은 모드와의 만남으로 하나 둘씩 변해간다. 젊은이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험을 즐기는 모드와 동행하면서, 해롤드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잃었던 웃음을 되찾는다. 모드의 80세 생일 전날 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모드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고, 그 모습에 해롤드는 당황한다. “그래 너는 아직 어려, 이런 것들이 주는 감회를 알기에는. 난 아름다움을 보고 울어. 사람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해. 그건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지. 나의 사랑하는 해롤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이 되는 걸 두렵게 느끼지 않는 거야!”

박정자 모드의 말을 듣고 있으면 인간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
조의진 단순하게 인간이 된다는 것은 본성에 가까워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해롤드는 규범이나 규칙에 얽매여 살아왔지만, 모드를 통해 그 모든 걸 다 벗어던져요.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게 됐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에요. 본성에 가까워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다 보면 진정으로 인간이 되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고 믿어요. 다른 한 편으로는 제대로 울고 웃기만 해도 치유를 경험하니까요.
박정자 맞아. 나에게 있어 인간이 되어가는 것, 또 힐링을 경험하는 순간은 연극배우로 살아가는 시간 그 자체야. 무대와 작품, 배역을 통해서 배우의 길을 걸어가는 것 말이지. 지금까지 내가 선택한 것 중 가장 탁월한 것이 연극배우로서의 삶이라고 생각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도 나이가 들면서는 공포가 많이 생겼어. 내가 실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말이야. 스스로 채찍질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그 모든 시간이 나에겐 온전한 치유의 순간이지. 힐링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거라고 생각해.
조의진 전 아직 힐링의 방법을 찾고 있어요. 선배님과 대화를 나누니 저에겐 살면서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박정자 벌써 버리기엔 이르지. 실컷 가졌다가 버려야지, 지금부터 버리면 어떡하니(웃음).
조의진 인간으로, 배우로 살면서 자꾸 채우려고 하는 것보다 쓸데없는 것은 버리고 비우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무대에서든 삶에서든 자유로워지겠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필요한, 사랑
“세상엔 더 이상의 담은 필요 없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더 많은 다리를 만드는 일이야.” 집과 학교, 사회에서의 소외를 자처하고, 모든 문제를 피하려고만 하는 해롤드에게 모드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에 관해 이야기한다. 마음 속 담을 허물고 다리를 내리고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며 소통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큰 기쁨인지 말이다.

박정자 벌써 ‘19그리고80’의 다섯 번째 무대를 올리게 됐어. 무엇보다도 이 공연은 내 마음의 담을 헐기 위한 작업이야.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 스스로와 소통하기 위한 통로이지. 사랑과 죽음에 관해 공연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생각해. ‘나는 얼마나 갇혀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에 관해서 말이야. 내가 나를 넘어선다는 건 굉장히 어려워. 그래서 이런 작품들이 필요한 거지. 배우는 연극을 하면서 마음의 때를 다 씻어내야 하는데도, 때는 계속 끼기 마련이거든….
조의진 전 연극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중이에요. 지금보다 더 어릴 적에는 해롤드처럼 옥죄어져 있는 모습으로 살았어요. 다른 사람들과 잘 소통하지도 않았죠. 그러다가 학교 수업에서 우연히 연극을 하게 되면서 성격이 변했어요. 자기주장이 생기고 개성도 좀 강해지고요. 무대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도 알아가고, 자기표현 욕구도 생기게 됐어요. 지금도 그 과정이고요. 연극 덕분에 제 마음 속 다리를 내려놓고 소통하면서 담을 허무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박정자 그래서 연기는 인간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연극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자기를 조금씩 드러내고, 하고픈 말도 늘어나니까. 연극이라는 건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니까. 관객 입장에서는 더 말할 나위 없고. 극 속에 등장하는 인간에 공감하면서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존재가 관객이잖아. 그래서 나는 우리 공연에 오는 사람들이 ‘아, 그래!’ 하고 가슴으로 느껴줬으면 해. 모드가 들고 있는 꽃다발의 한 송이 한 송이 꽃이 모두 다른 것처럼, 자신이 유일무이한 하나의 개체라는 것과 그 가치를 말이지.
조의진 관객이든 배우든, 사람이 하나의 존재로 서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존감을 세우는 게 필요하겠죠. 그렇지만 각자가 온전히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존재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극중 해롤드는 본래 하나의 개체였지만 모드가 그를 인정해줬을 때 개체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처럼 말이죠. 나 자신에 앞서 내가 누군가를 하나의 개체로 먼저 인정한다면, 자연스레 그 사람들도 나를 하나의 개체로 봐주고… 그렇게 하다 보면 모드가 말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글 김선영(sykim@) 사진 박진호(Studio B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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