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목소리’ 5년, ‘댄싱 컬처’ 7년. 유형종이 ‘객석’에 연재한 세월만 해도
무려 12년이다. 유형종의 오랜 독자들을 위해 드디어 그 ‘사람’의 정체를 밝힌다
“선생님, 발레 튀튀를 품에 안고 환히 웃는 거, 아니면 DVD에 둘러싸여 환히 웃는 거. 둘 중 어떤 게 좋으세요?” 전화로 이렇게 물으며 기자는 속으로 ‘튀튀, 튀튀!’를 외쳤다. 유형종은 1초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DVD가 낫지. 무지크바움으로 와요.”
며칠 뒤 벽처럼 빼곡히 쌓인 DVD를 배경 삼아 유형종은 발레 DVD 몇 장을 품에 안고 카메라 앞에서 환히 웃었다. 튀튀 안고 저리 웃었다가는 큰일날 뻔했겠다 싶어,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뽀글뽀글 파마 머리, 만화에서나 볼 법한 미소, 행복 그 자체의 모습. 11년 전 내가 ‘객석’에 입사하여 처음 만났던 ‘유형종 필자’의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말끔한 셔츠, 그 위로 단단히 묶은 넥타이, 단정히 옆으로 빗어 넘긴 ‘생’머리, 말끔하지만 그만큼 예리한 모습으로 그는 우리 기자들을 불러 불고기를 넉넉히 사줬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선배 기자가 귀띔해줬다. 유 선생님은 증권회사에 다닌다고.
“근데 선생님, 머리는 언제부터 그렇게 하셨어요?” “파마? 회사 관두고 바로요.”
2006년, 20년 회사 생활을 접은 유형종은 머리카락을 볶음과 동시에 ‘오페라·발레 칼럼니스트이자 해설가’라는 부업을 전업으로 전환시켰다. 2001년 8명이 공동으로 세워 운영해온 클래식 음악 강의 공간이자 감상실 ‘무지크바움’을 책임지게 된 것도 이 즈음이다. 1995년 대학 후배의 권유로 ‘객석’에 처음 글을 쓰게 되며 이 ‘업계’에 들어선 지 11년 만이었다.
유형종의 이름 앞에는 오랫동안 ‘오페라 칼럼니스트’라는 수식이 붙어왔다. 그는 2002년 3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본지에 ‘불멸의 목소리’를 연재했다. 말 그대로 영원불멸의 성악가들을 소개하는 칼럼으로 훗날 단행본으로 출판돼 꽤 인기를 끌었다. ‘불멸의 목소리’ 연재가 끝난 직후인 2007년 1월부터 2014년 1월호까지, 무려 7년에 걸쳐서는 ‘댄싱 컬처’를 연재했다. 매달 현대 발레 작품을 하나씩 소개하고, 그 작품에서 여러 갈래를 뽑아 역사·사회·문화·인물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 칼럼이다. 만 7년 하고 1개월의 기간 중 휴재는 단 두 번으로, 총 83회 연재됐다.
미국에서 건너온 원판 두 개로 시작된 인연
‘댄싱 컬처’ 대장정의 마무리를 자축하는 인터뷰지만, 그럼에도 유형종과의 대화는 발레에 앞서 ‘오페라’로 시작된다. 그가 오페라를 듣기 시작한 건 “남들이 다 하는 건 안 하는” 타고난 기질 때문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애들이 다 팝송을 듣기 시작했어요. 대신 난 오페라를 들었죠. 집에 전축이 있어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접하기도 했고요.”
유형종이 어쩌다 오페라와 발레에 빠졌는지 이야기하기 전, 그 집안 내력을 살펴야 한다. 유형종의 부친은 1918년 함흥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젊어서는 니혼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멋쟁이 한량이었다. 당연히 여러 예술 장르에 관심이 높았다. 도쿄 유학 시절엔 비록 취미지만 유명한 선생님께 제대로 발레를 배웠는데, 우리나라 발레 초창기를 견인한 임성남의 이력보다도 앞선 셈이다. 아버지는 귀국 후 영화감독으로 잠깐 일하다가 여러 사람들을 이끄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아 영화 편집자로 나섰다.
“내가 1974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그 이전엔 아버지 작업장에 가보고 그랬어요. 지금 오페라·발레 DVD를 즐겨 보는 게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오히려 아버지가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렸으니까요. 그때도 최고는 오로지 음악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린 시절의 후회가 딱 둘인데, 하나는 아버지의 영화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두지 않은 것, 그리고 만화가게 못 가본 것. 정말이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어머니께서 만화가게는 불량하니 가지 말라 하셨거든요.”
어머니는 서울대 도서관 사서로 일하셨다. 유형종이 오페라와 인연을 맺게 된 데는 어머니의 덕이 크다.
“와그너 교수라고, 우리나라 족보학을 연구한 하버드대 교수가 있어요. 어머니가 서울대 사서로 계실 때 그분에게 우리말을 가르쳐드렸대요. 근데 와그너 교수가 원판, 그러니까 1940년대 미국에서 나온 LP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랬나 봐요. 그래서 나 어렸을 때 우리 집에 토스카니니 지휘의 ‘라 보엠’ ‘아이다’ 전곡반, 메뉴인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원판이 있었어요.”
오페라와 인연을 맺은 유형종은 중학교에 들어가 오페라·교향곡 등 라이선스 전집류를 모으며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었다. 오페라를 듣는 것뿐 아니라 부르는 것도 좋아해서 교회의 성가 대회에 나가면 늘 일등을 차지했다. 어느 날은 어머니께 성악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아들이 노래 부를 때마다 칭찬해주시던 어머니. 답변은 예상외였다. 노래를 하려면 정말 타고나야 한다고, 형종이 너는 앞에 나서서 노래할 성격은 못 되고 또 몸도 약하지 않느냐고.
“그 말씀을 들은 후부터 노래하겠다는 소리를 안 했고, 어머니 앞에서 노래도 부르지 않았어요. 음대 간다는 생각을 그때 접었어요. 어머니는 우리 막내 윤종이가 나중에 글 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일찍이 정해두셨기에(동생 유윤종은 훗날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가 되었다), 맏이인 나는 돈을 벌어야겠다, 상대에 가는 게 내 운명이다라고 스스로 생각했어요.”
그렇게 유형종은 ‘숫자’와 인연을 맺는다. 1987년 대우증권에 입사해 재무관리부장까지 올랐고, 2000년 한국신용평가정보로 직장을 옮겨 경영지원본부장·전략사업본부장으로 6년간 일했다.
“그 일도 내 적성에 아주 잘 맞았어요. 지금도 숫자에 강해요. 다른 건 다 잘 잊는데 숫자는 안 그래요. 대우증권을 관둔 건 대우사태가 나서…. 나는 13년간 기획·재무 쪽에만 있었으니 사실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거잖아요. 사장이 바뀌면서, 지점으로 처음 나갔어요. 그러다 6개월 만에 본사로 들어왔는데 그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동료가 전화를 해서 “너 다시 본사 발령 난다더라” 이러는 거예요. 그러고는 오후에 정말 발령이 났어요. 그때 느낀 건, 내가 더 이상 회사에서 주류가 아니구나. 나는 회사 돌아가는 걸 모르는데 딴 사람은 아는구나. 그런 저런 일로 첫 직장에서 정을 뗄 때가 됐구나 싶었어요.”
취미가 직업이 된 남자
대우사태, IMF, 젊음을 다 바친 직장을 떠날 때가 됐음을 깨달은 순간…. 앞길이 혼탁하여 흔들흔들 할 때도 유형종은 음악을 들었을까.
“그럼요. 난 다른 취미가 전혀 없어요. 골프도, 등산도, 음주가무도 다 싫어요. 내가 의지할 것은 음악 듣기밖에 없어요.”
취미를 직업으로 삼게 된 후, 유형종은 집에서 음악을 듣지 않는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서 밤 12시에 귀가하다 보니 이제는 이곳 무지크바움에서 음악을 듣는다.
“프리랜서가 되면 나 혼자 호젓하게 차 몰고 산성 한 바퀴 뺑 돌고, 뭐 그럴 줄 알았는데. 영혼은 자유롭지만 몸은 아니에요. 내일 당장 강의해야 할 자료를 오늘 만들어야 하고…. 사람들이 나한테 왜 해외로 좋은 공연 보러 안 가느냐 물어보는데, 그럼 내 강의는 쉬어야 하잖아요. 게다가 강의를 하게 된 다음부터 나 혼자 보고 나 혼자 좋은 건 큰 의미가 없어요. 사람들과 같이 보면서 “어때요? 좋죠?” 하고 묻고 그 반응을 접하는 게 이제 내 보람이니까.”
클래식 음악·오페라·발레에 대한 글을 쓰고, 해설을 하고, 강의 공간을 운영하며 애호가 집단을 이끄는 유형종. 그의 한 마디에 공연과 음반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꽤 크다. 해당 장르의 시장 크기를 감안했을 때 결코 작지 않은 크기다. 유형종에게 ‘권위’에 대해, 권위의 위기감에 대해 물었다.
“위기감 같은 건 별로 느끼지 않아요. 이유는 간단해요. 내가 무조건 최고여야 한다, 절대 권위여야 한다… 그런 욕심이 없어요. 우리 어머니의 교훈이 ‘욕심부리지 마라’예요. 나는 욕심을 부리면 불행해지고 아니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어요. 항상 말하지만, 나는 평론가가 아니라 해설 쓰고 강의하는 ‘해설자’예요. 평론가는 되기도 싫어요. 평론가라면 우리 공연계 돌아가는 거 다 꿰뚫고 해법 같은 것도 제시해야 하는데, 난 그런 데 관심이 없어요. 대신 좋은 공연과 영상을 보고 사람들에게 추천하죠. 거기에 굉장한 권위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안 합니다.”
유형종은 개인적인 ‘호불호’를 기준으로 작품을 선정하고 널리 알린다.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하는데 그는 별로인 경우도 있다. 바흐 ‘마태수난곡’과 베토벤 ‘합창 교향곡’이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연민의 감동이 가장 크게 와 닿아요. 인간의 위대한 면보다 나약한 면을 건드리는 작품을 좋아해요. 바그너보다 베르디를 좋아하는 것도 그래서예요. 베르디는 온통 연민이거든요. 바그너는 뭐랄까, 내면의 열등감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포장하죠. 선악 구분이 확실한데, 선은 점점 선해져서 거룩해지고 악은 점점 악해져서 때려 죽일 존재가 돼요. 그런 점이 나에겐 비현실적으로 다가와요. 사람들이 보통 ‘위대하다, 고결하다, 철학적이다’라고 말하는 작품이 내게 큰 감동을 주진 않아요.”
발레는 에로스다!
유형종의 강의 중 낮 시간대를 택하는 이들은 대부분 주부들이다. 집에서 남편에게 잔뜩 스트레스를 받는 어느 부인, 오늘은 오페라 얘기와 아리아나 실컷 들으며 스트레스를 풀자는 마음으로 감상실에 들어섰다고 치자. 그런데 유형종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하필 사랑하는 남자를 대신해 제 아버지가 보낸 자객의 칼에 죽고(‘리골레토’의 질다), 남성 권력의 희생양이 되어 집안이 강요한 원치 않는 첫날밤을 치르고 결국 미쳐 죽어가다면(‘람메르무어의 루치아’). 혹 떼러 왔다 혹 붙이는 심정일 것이다. 강의 듣다 말고 “이의 있습니다. 질다라는 여자 이야기, 그게 말이 되나요?”라고 항의한 당찬 여성은 없었을까.
“나 역시 질다는 이해 못하지만, 그런 항의를 들은 적도 없어요. 여성 관객의 항의를 받은 건 오히려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강의였어요. 이 작품에 담긴 에로스가 굉장히 강하잖아요. 에로스는 삶의 환희라는 맥락의 이야기, 이졸데에게 접근하는 트리스탄의 심리 같은 걸 설명했죠. 강의 끝난 후 ‘오늘 대단히 불쾌했습니다’라는 문자를 받았어요. 외부 강의여서 누가 보냈는지는 알 수 없고요.”
사실 유형종이 에로티시즘을 힘주어 언급하는 건 오페라보다 발레 작품을 소개할 때다. 그가 발레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안에 에로스가 있고, 건강한 에로스는 인생의 활력을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 믿기 때문이다.
“발레에 눈을 뜬 건 1984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선 누레예프를 보고 나서예요. 그때 누레예프는 이미 40대 중반을 넘겨 무용수로는 퇴행기에 있었는데, 내 눈엔 신이 춤 추는 듯했어요. 이후 내가 발레를 즐겨 본다는 걸 안 친구가 어느 날은 한마디 하더군요. “남자 자식이 말이야, 여자가 짧은 치마 입고 다리 번쩍번쩍 올리는 걸 어떻게 보냐.” 그런 말을 들은 게 내가 직장 다닐 때, 젊을 때예요. 사실 그 녀석 말에 나도 깜짝 놀랐어요. 우린 그때 ‘에로스’와 에로 비디오의 ‘에로’를 구분하지 못했던 거죠. 에로티시즘은 삶의 동기이자 활력이라 프로이트의 말을 이해한 후부터, 내가 발레를 좋아하는 건 그 안의 에로스 때문이라고 확실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러한 당당한 소신으로, 유형종은 토요일 오전마다 무지크바움에 모여 발레 영상을 감상하고 공부하는 모임을 475회째 진행 중이다.
발레 애호가 그룹을 이끄는 길라잡이로서 그가 국립발레단 신임 예술감독 강수진에게 바라는 점은 무엇일까.
“당연히 새로운 레퍼토리를 들여오는 거죠. 그러나 그 중심엔 언제나 고전 발레가 있어야 합니다. 강수진 씨가 오랫동안 춤을 췄던 슈투트가르트 발레는 (러시아 황실 발레 스타일의) 정통 고전 발레를 올리지 않는 단체라서 강수진 씨 본인도 고전을 해본 지 오래됐을 듯해요. 슈투트가르트 발레는 독일의 많은 발레단 중 하나이니 현대 발레에 강점은 둔 자신만의 색을 갖는 게 맞지만, 우리나라 국립발레단은 고전을 기본에 깔고 거기에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죠. 20·21세기 만들어진 현대 발레들이 고전 발레의 매너리즘을 어느 정도 해소해줬지만, 그럼에도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건 역시 고전입니다. 현대 발레는 드라마가 강해서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대신 계속 보면 질리는 면이 없지 않죠. 반면 고전 발레는 인간 육체의 ‘최고’를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기에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아요. 볼 때마다 새롭고 놀랍죠.”
인간 육체의 최고 기량 혹은 경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전 발레는 무용 예술로서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이 말에 기자는 문득 궁금해졌다. 인간 육체의 최고를 보여주는 김연아의 스케이팅과 발레의 차이는 뭔가.
“주니어 시절엔 김연아가 아사다에게 좀 밀렸는데, 발레를 배우고 수준이 확 높아졌어요. 브라이언 오서가 김연아를 처음 만나 한 일이 이블린 하트라는 캐나다 발레 코치에게 데려간 겁니다. 나는 피겨를 즐겨 보진 않지만 김연아는 얼음 위에서 발레를 하고 다른 선수들은 운동을 하고 있다는 건 바로 알겠더군요. 김연아는 스포츠 선수이지만 또 예술가라고 생각해요. (반대로 발레 무용수를 보면서 예술적이라고 느끼지 않은 적도 있는지 묻자) 자연스럽지 않을 때가 있죠. 좀더 근원적으로 들어가보자면, 안무가가 순수한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 때 그런 결과가 나오는 듯해요. 진심을 담아 만들었는지, 돈을 벌기 위해 일정에 쫓겨 만들었는지… 이제 작품을 보면 그 정도는 판별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아까 내가 ‘연민’이 담긴 작품을 좋아한다고 얘기했죠. 연민을 작품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기본적인 인간성, 인간애가 있다는 거잖아요. 난 그런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유명해지고 싶어서가 아닌 진심으로 하는 사람들 그리고 작업들. 거기서 예술인지 아닌지가 판별됩니다.”
글 박용완 기자(spirate@gaeksuk.com)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