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6~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앨런 길버트는 뉴욕 필하모닉 음악감독에 취임한 지 한 달 만인 2009년 10월 서울 무대를 찾았다. 제1바이올린 파트의 고참 단원으로 활약해온 일본인 어머니 덕분에 뉴욕 필 사운드가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눈빛 교환만으로도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려면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이 필요했으리라.
2월 6~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선 그는 뉴욕 필을 완전히 자신의 악기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쿠르트 마주어·로린 마젤에 비해 훨씬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무대에 활력과 에너지를 불어넣기 충분했다. 지휘자 앨런 길버트는 자신이 원하는 음악적 해석을 유연한 신호 언어로 단원들에게 전달했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동양인의 피 때문인지 그의 지휘 동작은 무술 도사의 권법(拳法)처럼 절도 있고 유연했다.
2009년 내한 공연 때는 베토벤·브람스·멘델스존·말러 등 독일 레퍼토리 일색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첫날은 유럽, 이튿날은 미국 레퍼토리로 꾸몄다. 서막을 연 베토벤의 ‘피델리오 서곡’은 이어서 연주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과 잘 어울리는 선곡이었고, 후반부에 들려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은 뉴욕 필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금관 파트의 탄탄한 앙상블을 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차이콥스키 교향곡에서는 뉴욕 필의 명물처럼 되어버린 호른 수석 필립 마이어스가 곡 중 솔로를 맡았다. 올해 66세로 뉴욕 필에 입단한 지 벌써 35년째다. 주빈 메타·쿠르트 마주어·로린 마젤 등 전임 지휘자들도 그의 활약 덕분에 어려운 호른 독주가 나오는 레퍼토리도 서슴없이 연주할 수 있었다. 트럼펫 연주를 방불케 하는 포르티시모로 관악 파트에 파이팅을 불어넣는 그의 연주는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하지만 2악장의 서정적인 멜로디에서 호흡이 모자란 탓인지 부드러운 연결과 섬세한 뉘앙스를 살리진 못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여느 교향악단의 호른 수석이 들려주는 독주 정도에 그쳤다.
뉴욕 필하모닉은 대부분의 미국 교향악단과 마찬가지로 정년이 따로 없다. 건강이 유지되고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평생 단원으로도 일할 수 있다. 뉴턴 맨스필드는 1961년부터 2011년까지 50년간 바이올린 파트 단원으로 근속했다. 25세에 입단했다고 치더라도 75세까지 현역으로 일한 셈이다. 이에 반해 빈 필이나 베를린 필은 65세가 되면 무조건 은퇴해야 한다. 흔히들 미국 교향악단이 유럽 오케스트라에 비해 더 젊은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특히 뉴욕 필하모닉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일 뿐만 아니라 유럽 교향악단에 견주어도 결코 역사가 짧지 않다. 베를린 필보다 40년 먼저 창단되었고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향악단보다 10년 정도 앞선다.
이번 공연은 올해 은퇴를 앞둔 65세의 악장 글렌 딕터로우, 트럼펫 수석 필립 스미스의 마지막 내한 무대라는 점에서도 감회가 깊었다. 올해 61세인 스미스는 1978년에 부수석으로 입단하여 1988년부터 수석 주자로 활약했다. 뉴욕 필의 연주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대목도 있었지만 젊은 지휘자의 영입으로 균형 감각을 찾아가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부럽기까지 했다. 국내 교향악단에서는 30년 넘게 단원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첫날 프로그램이 유럽 교향악단 못지않은 역사와 전통을 지닌 뉴욕 필의 원숙함을 자랑했다면, 둘째 날에 들려준 번스타인·거슈윈 등은 20세기 이후 미국 음악에 대한 해석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국 오케스트라의 자존심을 보여주었다.
파워보다는 섬세한 울림으로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깔끔한 연주를 들려준 김다솔, 현대적 감각을 가미해 자신이 직접 편곡한 카덴차로 재즈의 진수를 보여준 오조네 마코토의 피아노 협연도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무대였다.
글 이장직 객원전문기자(lully@)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