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난해 경기필만큼 아픔을 겪었던 오케스트라가 또 있었을까. 음악 이전에 철학을 공부한, 그야말로 인문학적인 식견까지도 탁월했던 상임지휘자가 일부 단원과의 마찰로 중도 하차하면서 우리 음악계 전체로서도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지난 2년 동안 경기필의 행보는 국내 오케스트라의 보수적인 행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파격적일 만큼 일취월장한 성장을 보여주었다. 공연 프로그램북 하나만 봐도 그렇다. 정해진 페이지 안에 끼워 맞추는 대부분 오케스트라의 그것과는 달리 ‘백과사전급’의 다양한 정보와 해설은 경기필의 아카데믹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지휘자 몰아내기’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떠나 그 손실이 너무도 컸다.
이 와중에 성시연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여성이고, 젊다. 더구나 그녀는 국내에서 지휘를 배우지 않아 소위 ‘인맥’조차 없었다. 온갖 텃세와 음악 외적으로 신경 쓸 곳이 수없이 산재한 악단을 과연 이끌 수 있을까? 해답은 역시 음악에 있었다.
3월 27일 성시연의 경기필 취임연주회가 열린 예술의전당. 화제와 관심이 집중된 탓인지 객석은 만원이었다. 말러 교향곡 2번은 경기필로서도 처음 시도하는 레퍼토리다.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격렬한 트레몰로(음이나 화음을 빨리 규칙적으로 떨리는 듯이 되풀이하는 주법)는 성시연의 지휘봉 끝에서 활활 타올랐다. 1주제의 ‘장송행진곡’은 두터웠지만 날렵했다. 성시연은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한 경력답게 탁월한 해석을 보였다. 오히려 오케스트라가 지휘자를 버겁게 따라오는 경우도 종종 발견되었다. 놀랍게도 성시연은 선과 선이 아니라 면과 면이 중첩되는 음악을 만들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진노의 날’ 모티브에서의 폭발적인 투티(연주에 참가하는 모든 주자가 동시에 연주)는 짧은 시간에 그가 얼마나 악단을 담금질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다소 빠른 템포로 9분대에 주파한 2악장은 질펀한 ‘렌틀러’(오스트리아의 느린 3박자 춤곡)의 여유가 아쉬웠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고향 칼리슈트의 선술집에서 어린 말러가 들었던 목가적이고 인간 냄새 나는 리듬과 가락에서는 잰걸음과 도시적인 뉘앙스가 풍겼다. 향후 성시연이 세상과 부딪혀가며 삶을 터득하면 자연스럽게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다. 3악장에서는 ‘죽음의 무도’의 음울함과 대척점에 있는 역설적인 면과의 절충을 무난하게 소화했다.
4악장 ‘원광(原光)’을 노래하는 메조소프라노 김선정은 완벽한 발음과 뛰어난 가창력으로 청중을 휘어잡았다. 또한 말러 교향곡의 독창자로서 단골로 초청받고 있는 소프라노 이명주는 5악장에서 더욱 깊어진 음악성으로 무장하고 감동을 안겼다. 5악장, 먼저 ‘분노의 절규’에서 귀를 찢는 굉음이 객석을 휩쓸고 지나갔다.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에서는 무대 왼쪽 문 밖에서 팡파르가 들린다는 설정은 좋았으나 테크닉적으로 매끈하게 이어지지 못했다. 또한 단원들이 자주 등퇴장을 반복하며 움직이는 통에 시각적으로 산만했다. 아직 전용홀이 없는 경기필이 대관한 공연장에서 급히 음향 효과를 찾느라 그런 것이어서 더욱 안타까웠다. ‘최후의 심판’에서 타악기군의 도약은 압권이었다. 합창단과 어우러지는 피날레는 파이프오르간이 없는 콘서트홀임에도 충분히 거대했다.
성시연 체제의 경기필은 매 공연 매진을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더 이상의 논란은 없어야 한다. 혹독한 리허설을 감내하며 지휘자를 따를 때 경기필은 재약진의 기회를 잡을 것이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경기도문화의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