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악은 본래 콘서트를 위한 음악이 아니었다. 연주의 즐거움이나 소규모의 여흥을 즐기길 원하는 귀족적인 장르로, 특정한 공동체와 그에 속한 소수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음악은 변화했고 실내악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장르의 이름이 뜻하는 바에서 벗어났다. 비밀스러운 방이 아닌 공공연한 무대로 나아간 것이다. 그럼에도 실내악 본연의 성격은 남아 있었으니, 바로 공동체 의식이다. 연주자 사이를 오가는 암호 같은 제스처, 연주자와 관객 사이를 오가는 수많은 시선의 교차들, 그리고 훌륭한 후원자까지. 실내악을 보고 있노라면 공동체의 끈끈한 유대감이 느껴진다. 7월의 실내악 공연들에서는 이것을 바탕으로 생겨난 새로운 시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목관 5중주단의 무대로 꾸며진 제25회 이건음악회를 비롯해 서울시립교향악단 퍼커션 그룹의 ‘비바 퍼커션’과 실내악 공연 ‘숨겨진 보석’, KBS교향악단 체임버 뮤직 페스티벌 시리즈인 목관 스페셜까지, 이 공연들에서 연주된 작품들이 청중과 연주자 모두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20세기의 작품부터 푸치니와 베르디의 실내악 작품 등 잘 연주되지 않았던 작품들까지, 각각의 팀들은 영역을 확장해나가듯 적극적으로 새 작품들을 가지고 왔다. 연주되는 작품들의 시대적 중심축은 동시대에 가까워졌으며 프로그램 편성과 공연 기획 면에서 모험적인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7월 중에 만난 네 번의 무대는 국내 실내악 공연의 지형도가 점차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모험적인 공연들의 기저에는 실내악을 둘러싼 음악 공동체들-객석과 무대, 무대와 후원자 사이의 신뢰와 연대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든든한 후원자를 만났을 때
베를린 필 목관 5중주단의 제25회 이건음악회
올해로 25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건음악회’는 이건창호 주최로,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와 문화적으로 소외된 계층이 다양한 예술을 접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로 열려왔다. 7월 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낮 공연의 프로그램은 모차르트의 자동 연주 오르간을 위한 판타지 K608과 칼레비 아호의 목관 5중주, 리게티의 목관 5중주를 위한 6개의 바가텔, 카를 닐센의 목관 5중주로 모차르트를 제외하고 모두 20세기 작품이었다. 초반에 프로그램을 보며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넘어 그 스펙트럼을 더욱 넓히고자 하는 의도를 알 수 있었으나, 청중이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다.
걱정과는 달리 베를린 필 목관 5중주단의 훌륭한 연주와 홍승찬 교수의 유쾌한 작품 해설은 청중을 낯설지만 즐거운 음악 경험으로 이끌었다. 모차르트가 물 흐르듯 연주된 후, 아호의 작품이 연주되었을 때 객석에는 잠시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귀에 익숙한 달콤한 음향은 아니었지만 청중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아호의 작품에 큰 박수를 보냈고, 익살스러운 리게티의 작품과 서정적인 닐센의 작품에도 찬사를 보냈다. 이날 공연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은 리게티의 6개의 바가텔 연주였다. 연주자들은 완벽한 호흡과 재미난 제스처(바순 연주자는 벨에 구겨넣은 태극기를 약음기로 사용했다!)를 선보였고, 관객들은 웃음 띤 목소리로 크게 환호했다.
관객층을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동시대 음악을 주된 프로그램으로 공연을 만들었다는 것, 게다가 그 공연이 기업의 이름을 내걸고 만드는, 사회 환원적 공연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이는 분명 이건기업이 베를린 필 목관 5중주단의 연주력과 공연을 이끌어나가는 힘, 관객들의 열린 마음을 믿고 시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객석의 눈높이에 맞춘 연주자들
서울시립교향악단 퍼커션 그룹의 ‘비바 퍼커션!’
7월 9일 금호아트홀 무대에 오른 서울시향의 퍼커션 그룹은 청중이 어떤 공연을 보고 싶어 하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는 듯했다. 이날의 프로그램이 온통 동시대 음악 일색이었는데도 말이다. 존 케이지와 루 해리슨의 ‘이중 음악’, 티에리 드 메이의 ‘테이블 음악’, 스티브 라이히의 ‘드러밍’ 1부, 데이비드 프리드먼과 데이브 새뮤얼스의 ‘회전목마’, 크리스포터 라우스의 ‘쿠카 일리모쿠’, 에드워드 최의 ‘죽음의 바퀴’까지. 연주된 곡들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 ‘이중음악’(1941)일 정도로 상당히 최근 작품들이 이름을 올렸고,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날 무대와 객석의 상호작용은 굉장했다. 필자는 이제까지 금호아트홀에서 들어본 것 중 가장 큰 환호성을 들었고, 연주 도중에 박수가 터져 나오는 것까지 보았다.
연주된 곡들은 감상의 재미도, 연주의 재미도, 음악사적 의미도 모두 만족시키는 작품들이었다. 그럼에도 청중에게는 분명 낯설 터. 연주가 시작되기 전, 퍼커셔니스트 이건수는 악기와 작품에 대해 친근하게 설명했고, 사진을 무대 위 프로젝터에 띄워놓기도 했다. 비록 작품의 개념은 다소 낯설었지만, 청중은 비르투오소적이며 폭발적이고, 화려한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리듬의 교차와 중첩, 다양한 타악기들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혼합된 음색들은 관객들을 타악기의 매력에 푹 빠지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관객의 눈높이에 맞춘 이 공연에서 필자는 관객으로서 연대감을 직접적으로 느꼈다. 청중은 관찰자가 아니라 이 공연에 가담하는 ‘참여자’라는 것을. 공연을 보면서 가장 기분이 좋았던 순간은 연주하는 도중에 살짝 보이던 연주자의 미소, 연주가 끝난 뒤 환호하는 관객들의 웃음, 그리고 그 웃음에 다시 활짝 웃던 연주자들의 미소를 볼 때였다.
숨은 보물찾기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실내악 시리즈 ‘숨겨진 보석’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대작곡가로 불리는 푸치니·베르디·드뷔시·하차투리안의 작품 목록 한편에는 원석 같은 실내악 작품들이 있다. 푸치니의 현악 4중주 ‘국화’, 드뷔시의 피아노 3중주 1번, 하차투리안의 클라리넷·바이올린·피아노를 위한 트리오, 베르디의 현악 4중주는 존재를 알고 있기도, 실황 연주를 들어보기도 힘든 작품들이다. 7월 11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린 이날 공연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가치 있고 매력적인 실내악 작품들을 선보인다는 목적으로 꾸려졌다.
실내악에서 느낄 수 있는 섬세한 작곡가의 필치와 그 표현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야 빛나는 법. 낯선 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자들은 훌륭한 앙상블을 맞춰냈다. 이 작품들은 녹음도 다른 실내악 작품에 비해 현저히 적고, 그만큼 결이 고운 연주를 찾기도 어렵다. 원석 같은 작품들, 그리고 그 원석들을 보석으로 만드는 것은 연주자들의 몫이다. 어떤 연주자들이 함께 무대에 서느냐에 따라 연주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이날의 앙상블 조합은 아주 훌륭했다. 비장미가 아름다웠던 푸치니의 작품을 바이올리니스트 웨인 린은 내적인 표현을 더욱 깊게 만들었고, 악기들이 서로 겨루는 듯했던 하차투리안의 작품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덕우가 그 묘미를 잘 살렸다. 연주자들끼리 주고받는 시선들, 완벽한 타이밍을 위해 살짝 멈칫하는 활, 어려운 부분을 잘 맞춰나갔을 때 짓는 옅은 미소까지. 연주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언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 또한 이날의 큰 재미였다.
교향악적 실내악
KBS교향악단 체임버 뮤직 페스티벌-목관 스페셜
피아노 트리오, 현악 4중주, 피아노 5중주… 악기 수가 많아질수록 편성의 이름이 입에 잘 붙지 않는다. 그만큼 소편성 실내악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휘자가 없는 실내악의 특성상 악기가 많아지고, 구성이 복잡할수록 완벽한 앙상블을 맞추기가 힘들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실내악단 중 ‘현악 4중주단’이 가장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실내악과 실내악이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 중 하나는 편성으로, 보통 2~10개의 악기들로 이루어진 앙상블을 실내악이라고 한다. 7월 12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렸던 공연에서는 후멜의 목관 8중주를 위한 파르티타, 풀랑크의 피아노와 목관 5중주를 위한 6중주, 구노의 목관을 위한 작은 교향곡(9중주), 프랑세의 목관 10중주를 위한 9개 소품과 같이 상당히 규모가 큰 작품들이 연주되었다. 그래서인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여서 만든 앙상블과 연주자들은 교향악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첫 곡이었던 훔멜의 목관 8중주를 위한 파르티타는 고전적인 양식으로 그 구조가 투명하고도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문제는 8중주인 만큼 단순한 부분을 맞추기가 더 힘들다는 점. 연주자들의 가벼운 실수가 눈에 띄었고, 풀랑크의 작품에서도 연주자들은 다소 소극적인 해석을 보였다. 그러나 인터미션이 지나고 구노와 프랑세의 작품을 연주할 때는 그들의 기량과 연륜이 빛났다. 서로 함께한 오케스트라 작품이 셀 수 없이 많아서일까, 혹은 편성이 커질수록 작품의 구성 원리가 실내악보다는 오케스트라적인 어법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일까. 수년간의 합주 경험으로 다져진 서로의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도는 한음 한음마다 배어 있었다.
사진 이건창호·서울시립교향악단·KBS교향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