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향과 부천시향이 지난 8월에 나란히 유럽으로 투어를 떠났다. 세계무대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가고 있는 우리 오케스트라. 이들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1956년 미국 오케스트라로는 처음으로 철의 장막을 뚫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연주한 경력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보스턴 심포니처럼 해외 투어에 역사적 의미까지 찾지 않더라도 해외 투어 공연은 그 자체만으로 값진 경험이다. 해외 투어는 음반 레코딩과 더불어 오케스트라를 소개하는 프로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중요한 ‘스펙’이다. 순전히 자비를 들여서 한 게 아니면 어느 정도의 연주력을 인정받아야지 가능한 일이다.
물론 어느 레이블에서 무슨 곡을 녹음했는지, 어느 도시의 유명 홀에서 무슨 곡을 연주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해외 투어는 하루를 꼬박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서 그다음 날 연주해야 하는 강행군이지만, 교향악단의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연주 활동이다. 하루 종일 함께 있다시피 한 여행을 통해 단원들 사이에 단합심도 키울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에서 그들의 음악을 연주해 제대로 평가를 받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시베리아나 태평양을 건너 유럽이나 미국 땅에 도착하는 데만 12시간 이상 걸린다. 장거리 여행의 피로와 비싼 왕복 항공료를 감안한다면 15일 이상의 일정을 잡아야 한다. 현지에서 공연 횟수가 적을수록 손해다. 토론토 심포니는 이번 여름에 떠나는 유럽 투어에서 13일간 5개 도시에서 7회 공연을 한다.
최근 국내 교향악단의 해외 투어가 활발해지고 있다. 서울시향과 부천시향이 지난 8월에 나란히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 유럽으로 투어를 떠났다. 서울시향은 8월 21일 투르쿠(핀란드)에서 시작해 그라페네크(오스트리아)와 메라노(이탈리아)를 거쳐 27일 영국 BBC 프롬스에서 유럽 투어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협연 김선욱)과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협연 우웨이), 드뷔시 ‘바다’, 라벨 ‘라 발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등이다.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BBC 프롬스에 아시아 오케스트라가 오른 건 NHK 심포니(1972·2001)와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1990년) 이후 처음이다.
부천시향은 8월 31일 체코 프라하 스메나타홀을 시작으로 뮌헨 헤라클레스홀, 9월 4일 빈 무지크페라인에 선다. 지휘자 임헌정이 지휘봉을 잡고 전상직의 ‘관현악을 위한 크레도’(초연),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협연 클라라 주미 강),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들려준다. 서울시향은 4회 공연 모두 여름 페스티벌 무대이고, 부천시향은 시즌 오프를 맞아 프라하 심포니·뮌헨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빈 필하모닉의 무대에 선다. 이에 앞서 수원시향(지휘 김대진)은 2월 7일 빈 무지크페라인을 시작으로 부다페스트 이탈리아 문화원(2월 9일), 프라하 드보르자크홀(11일), 뮌헨 헤라클레스홀(12일) 공연을 다녀왔다. 9월에는 메라노 페스티벌의 폐막 공연에 참가하기 위해 다시 이탈리아로 떠난다. 김대진이 지휘와 협연을 맡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와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을 연주한다.
국내 교향악단의 해외 공연은 더 이상 빅뉴스나 자랑거리가 아니다. 해외 나들이 한 번쯤 다녀오지 않은 악단이 거의 없을 정도다. 유럽이나 미국 투어를 다녀온 사실 자체보다는 어떤 과정으로 초청을 받았고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가 더 중요하다.
1957년 첫 투어 시작, 최근 활발해져
국내 오케스트라 가운데 맨 처음으로 해외 나들이를 다녀온 것은 서울시향이다. 문화예술 사절단의 일원으로 1957년 사이공·타이베이·홍콩 등 동남아 투어를 다녀왔다. 당시는 항공기 여행은 엄두도 못 냈고, 해군 함정을 빌려 주로 항구도시에 닻을 내렸다. 인천항에서 출발해 12일 걸려 사이공에 도착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동남아는 전후 폐허의 잿더미를 털고 일어나던 한국에 비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선진국이었다. 서울시향은 그 후 일본(1965년), 동남아(1977년), 미국(1982·1986년), 유럽 16개 도시(1988년), 미국 애틀랜타(1996년), 중국(1997년), 미국과 중국(2004년)을 다녀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이 올림픽 홍보나 유엔총회장 연주 등 프로파간다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정부나 서울시에서 예산의 대부분을 지원했다. 하지만 예술감독 정명훈 취임 이후 일본(2011·2012년)과 유럽(2011·2014년), 북미(2012년) 투어는 대부분 현지 매니지먼트의 초청으로 음악제 참가 형식이라는 점에서 종전의 해외 나들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처음엔 지휘자 정명훈이라는 브랜드에 힘입어 해외 공연의 물꼬를 텄지만 이제는 서울시향 자체의 연주력을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KBS교향악단의 첫 해외 투어도 동남아 순회공연이었다. 1958년 사이공·방콕·마닐라·홍콩·타이베이·오키나와 등 6개 도시를 순회했다. 1979년에는 1월 14일부터 2월 14일까지 필라델피아·워싱턴·뉴욕 등 미국의 도시를 다녀왔다. 홍연택과 곽승이 지휘봉을 잡았고,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과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협연했다. 1984년에 다시 동남아를 다녀왔고, 이듬해 일본의 6개 도시를 투어했다. 첫 유럽 공연은 2005년 3월에 독일 본·비스바덴·루트비히스하펜 등 3개 도시를 돌았다. KBS교향악단은 내년에도 유럽 투어를 추진 중이다.
매년 10월 오사카와 도쿄에서 열리며, 일본오케스트라협회가 주관하는 ‘오케스트라 아시아 위크’ 초청으로 웬만한 국내 교향악단은 일본을 다녀왔다. 항공료, 숙박비, 연주비는 물론 단원들의 개인 식비까지 전액 일본 측에서 부담한다. 2002년 부천시향을 시작으로 수원시향·서울시향·대전시향·코리안심포니·부산시향·KBS교향악단·인천시향·대구시향·목포시향 등이 다녀왔다. 올해는 경기 필하모닉(지휘 성시연)이 참가한다.
부산시향은 2010년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카펠라 아카데믹에 섰고, 1993년 이후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아시아 프렌들리 콘서트’에 지속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수원시향은 1995년 미국과 유럽 투어를 다녀왔다. 2004년 독일에 이어 2009년에는 꿈의 무대인 뉴욕 카네기홀에도 섰다. 대전시향은 2004년 6월에 시애틀·필라델피아·볼티모어·뉴욕 등 미국 4개 도시에 이어, 2012년 12월에는 프라하·부다페스트·빈·뮌헨 공연을 다녀왔다. 프라하 공연에서는 드보르자크의 협주곡과 교향곡을 연주하는 자신감도 보였다. 인천시향도 1987년 대만과 싱가포르, 1990·2010·2012년 유럽 투어를 다녀왔다. 가와사키(부천시향)·후쿠오카(부산시향)·베이징(서울시향) 등 자매결연 도시와의 상호 방문 연주도 있다.
드넓은 세계로 날개를 펼치려면
하지만 서울시향 등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지방자치단체의 단체장이 시향의 외국 공연을 자신의 ‘문화적 업적’으로 삼기 위해 막대한 시 예산을 들인, 사실상 ‘무료 공연’이 대부분이다. 좀 더 나은 경우는 현지 사정에 밝은 한국계 매니지먼트사가 유럽의 시즌 오프, 즉 공연 비수기 때 현지 홀을 대관하고 청중은 현지 여행사를 통해 동원하는 공연이 대부분이다.
수원시향 음악감독 김대진은 “자체 경비나 기업 후원을 받아서 다녀오는 것도 처음엔 경험상 나쁘지 않지만 현지 매니저의 초청을 받아 음악제에 참가하는 쪽으로 발전해야 한다”며 “9월 메라노 페스티벌 폐막 연주는 해외 콩쿠르에서 동료 심사위원에게 전달한 CD를 현지 매니저가 듣고 초청한 케이스”라고 말했다.
장소 선정도 중요하다. 이탈리아에는 오케스트라 전용 홀이 없는 도시가 많다. 서울시향도 2010년 유럽 투어를 이탈리아에서 시작했는데, 볼로냐 만초니 극장은 콘서트홀로 개조됐지만, 베르가모 도니체티 극장은 오페라 극장이라 스태프가 무대 위로 악기를 옮기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아직 해외 공연의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교향악단이 속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음향이 뛰어난 선진국의 오케스트라 전용 홀에서 연주한 경험을 되살려 국내에서 더 좋은 연주를 들려주기 위한 것이다. 충분한 준비 기간 없이 급하게 대관하다 보면 좋은 홀을 빌리지 못할 수도 있다.
개런티와 항공료, 숙박비까지 받으면서 해외 투어를 다녀오려면 그에 합당한 연주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좋은 연주를 들려줘야 초청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마련이다. 해외에서 한 곡쯤은 한국을 대표할 만한 창작곡을 들려줘야 하는데 레퍼토리가 마땅치 않다. 아리랑 등 민요 편곡이나 사물놀이 협주곡이 고작인데,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관현악곡의 개발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서울시향이 상임 작곡가 진은숙의 피아노 협주곡과 생황 협주곡 ‘슈’를 해외 공연에서 연주하는 것은 매우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연주자 개인이든 단체든 간에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선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던 시절은 지났다. 어디서 연주했다는 기록은 대관료만 지불하면 얻을 수 있다. 빈 무지크페라인처럼 누구나 다 아는 음악 도시에서 최고의 공연장으로 손꼽히는 무대에 서는 것도 그 자체로 중요하고 값진 경험이지만, 유럽 안에서도 숨겨진 보석 같은 콘서트홀이 많다. 그런 도시와 인연을 맺는다면 개런티는 몰라도 항공료와 숙박비까지는 초청하는 측이 부담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생기지 않을까. 물론 사전 조율과 기획을 위한 충분한 준비 기간을 전제로 한 얘기다.
이에 더해 현지 언론의 리뷰 또한 중요한데, 우리의 연주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 전체 중 ‘깔끔하지 못한 앙상블’ 같은 따끔한 비판은 덮어두고 멀리서 온 손님에 대한 예의로 던진 칭찬 몇 마디만 스크랩해서 국내 홍보 자료로 활용하는 것을 보면 쓴웃음이 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