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6~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가슴에 스며든 불멸의 무용가
드라마 발레의 정수를 만끽한 무대였다.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간판 작품은 강수진으로 인해 더욱 빛났고, 안무가 존 크랭코는 무용가 강수진에 의해 더욱 존재감을 높였다. 강수진의 타티아나는 드라마 발레가 갖는 가치를 높여주었고, 슈투트가르트 발레는 강수진 덕에 발레단 이미지를 더욱 고양시켰다. 관객들은 한 편의 명작 드라마 발레를 눈과 귀, 가슴으로 음미하는 호사를 누렸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적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비극적인 인물 오네긴과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시골 영주의 딸 타티아나. ‘오네긴’은 여자의 일방적인 연모와 이를 외면하는 남자의 비정함을 담는다. 강수진의 타티아나는 슬픔과 절망감, 기쁨과 회환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연기력, 주인공의 심리를 담아내는 섬세한 감정과 춤, 그리고 파트너십까지 일품이었다. 음악을 타고 흐르는 제이슨 라일리와의 호흡은 깃털 같은 가벼움으로, 때론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로 결코 쉽지 않은 존 크랭코의 안무를 육신으로 녹여냈다. 세 차례의 파드되에서 보여준 강수진과 라일리의 앙상블과 감정의 교감은 춤이 얼마나 사람의 감성을 깊은 곳까지 터치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존 크랭코는 네 명의 주요 인물의 모호한 거리감을 없애고, 인물 간의 구체적인 갈등에 초점을 맞췄다. 올가·타티아나·오네긴이 함께 추는 3인무, 올가·오네긴의 2인무를 군무진의 커플 댄스와 접목시켜 렌스키의 질투를 끌어내는 등 인물들의 갈등을 자연스럽게 춤과 접목시킨 연출력은 그가 왜 드라마 발레의 거장인지를 보여준다.
올가 역을 맡은 강효정과 타티아나 역 강수진이 조합된 캐스팅은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향후 행보를 예측케 하며, 한국 발레무용가들이 세계무대에서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1997년 홍콩에서 마르시아 아이데(타티아나)와 리처드 크레건(오네긴)의 ‘오네긴’을 본 적이 있다. 오래전 아이데는 타티아나를 통해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예술감독까지 올랐다. 이번 강수진의 타티아나는 평자가 1996년 슈투트가르트에서 본 강수진의 타티아나와 1997년 아이데의 타티아나를 분명 넘어섰다. 1998년 7월 ‘뉴욕 타임스’지가 격찬한 강수진의 줄리엣, 그해 10월 관객들의 환호가 수십 번에 걸친 커튼콜로 이어지며 그녀에게 브누아 드 라 당스(최고무용수상)를 선사한 마르그리트에 이어, 이번 공연에서 강수진은 타티아나로 정점을 찍었다. 강수진이 창조한 타티아나는 가슴에 묻으며 그 사랑을 이루고자 한 동양적인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1965년 4월 13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초연한 ‘오네긴’은 50년을 넘어서면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강수진에게 ‘불멸의 무용가’란 칭호를 선사하는 명연으로 기록될 것이다. 차이콥스키 음악을 사용한 쿠르트 하인츠 슈톨체의 편곡과 위르겐 로제가 제작한 무대와 의상은 이 작품과 잘 어울린다. 지휘자 제임스 터글이 이끈 코리안심포니의 연주도 드라마 발레의 흐름을 쫓는 데 일조했다.
강수진과 슈투트가르트 발레는 ‘로미오와 줄리엣’ ‘카멜리아 레이디’ ‘오네긴’까지 몇 차례 내한했지만, 모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했다. 작품의 규모에 비해 극장이 너무 커서 주요 배역들의 감정은 관객들과 소통하기 어려웠다. 이번 공연의 성공은 흥행에 연연하지 않고, 스토리텔링이 있는 드라마 발레의 감상을 위한 최적의 공연장을 선택한 주최 측의 노력도 일조했다.
사진 크레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