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기도의 선율
‘2015 세종 체임버 시리즈 4’ 양성원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 연주회
12월 2일 오후 8시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한 해를 떠나보내고, 또다시 한 해를 맞이하며 듣는 음악 중 베토벤만큼 어울리는 음악이 있을까? 2015년 첼리스트 양성원에게 베토벤은 그의 영혼을 담아야 했던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베토벤 첼로 소나타와 변주곡 전곡까지 그의 연주 여행은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뇌가 담겨 있는 베토벤의 내면을 조용히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12월 2일은 ‘2015 세종 체임버 시리즈’ 네 번째 공연이었고, 그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의 마지막 날이었다. 올 한 해 진행해온 베토벤 연주 여행이 끝나는 날이기도 했다.
오랜 음악친구이자 파트너인 피아니스트 엔리코 파체와 함께 무대에 선 그는 전날 연주한 베토벤 첼로 소나타 1·3번에 이어 베토벤 2·4·5번, 그리고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사랑을 느끼는 남자들은’ 주제에 의한 7개의 변주곡을 연주했다.
연주 전에 있었던 양성원의 해설처럼 그들은 무대에서 때로는 시처럼, 때로는 투쟁처럼, 때로는 기도처럼 베토벤의 음악을 어루만졌다. 베토벤은 많은 악기 중에서도 특히 첼로의 선율로 자신의 아픈 내면을 이야기한 작곡가였다. 특히 첼로 소나타 4번과 5번은 피아노와 독주 악기의 편성으로는 작곡가의 마지막 작품들이다.
양성원은 자신의 손끝으로 베토벤이 혹독한 삶에 맞서 갈등하고 투쟁하는 과정을 첼로 선율 속에 담아 고스란히 전했다. 소나타 5번 2악장에서 첼로와 피아노의 대화는 깊은 내면을 성찰한 기도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기도는 3악장 푸가로 이어지며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했다. 깊은 절망에서 벗어나 결국 승리를 쟁취했던 베토벤. 한 해 동안 양성원이 그려온 베토벤의 얼굴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연주가 끝나고 공연장을 나서자 2015년의 첫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광화문 광장은 송년을 밝히는 크리스마스 불빛으로 가득했다. 문득 광장 한복판 현판의 시구(詩句) 한 소절이 눈에 들어왔다.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 ‘끝과 마지막’이었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 힘겨운 나날들 너는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따뜻한 희망이 첫 눈처럼 온 세상을 조용히 덮고 있었다. 국지연
눈 오는 밤, 차이콥스키
손열음 협연, 요엘 레비/KBS교향악단 ‘윈터 드림’
12월 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눈이 펑펑 왔다. 올겨울 첫눈이었다. 추웠다. 거리는 바빴다. 많은 이가 들떠 있었다. 상대적으로 축 가라앉았다. 쓸쓸했다. 센티멘털하기보다는 잠잠했다. 꾹꾹 눌러 걸어 예술의전당에 도착해 콘서트홀의 중간 어디쯤 자리를 찾아 앉았다. 주변은 번잡했고, 나는 피로했다.
차이콥스키는 외로웠다. 차이콥스키만 외로웠던 건 아니다. 모두가 외롭다. 문화평론가 김갑수는 이렇게 말했다. 고독이 주는 자위적 쾌락. 그 쾌락을 자양분 삼아 그럭저럭 살아들 간다고. 그러니 반복되는 구절은 차이콥스키만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KBS교향악단의 연주는 살아 숨 쉬었다. 정말 좋았다. 가슴이 뜨거워졌고 덕분에 온기를 머금고 따뜻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음악의 힘이다. 인터뷰 때마다 자주 듣던 말, 말보다 큰 위로를 전하고 싶다고. 심드렁하게 듣던 문장이 그대로 가슴에 와 꽂혔다. 위로다.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에서는 각 악기가 내는 하나하나의 소리가 동그랗고 예뻤다. 생동감이 넘쳤다. 특히 관악주자들의 섬세한 호흡은 꿈꾸듯 환상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 꿈은 피아노 협주곡 1번에서도 깨지 않았다. 손열음은 이 곡을 연주할 때 상상력을 발휘하면 설득력을 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손에 잡힐 듯한 이미지 구현이 중요하다고. 그녀의 연주는 다채롭고 짜릿했다. 교향곡 4번은 꿈 그 자체였다. 극도로 쇠약해진 작곡가는 운명에 취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꿈꿨다. 소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얼마나 치열했던가. 작곡가의 바람, 그 열망에 동반된 감정 변화를 요엘 레비는 하나의 지점까지 쭉 끌어올렸다. 흐트러지는 순간이 없었다. 태어난 지 100년이 훌쩍 넘은 음악이 생명을 얻었다. 앙코르곡으로 연주한 ‘백조의 호수’까지 KBS교향악단은 그야말로 완벽한 겨울밤을 선물했다.
작곡가가 살을 깎듯 고통 속에 토해낸 선율에 미적 쾌감을 느끼는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동시에 감격스러운 순간을 선사한 요엘 레비와 KBS교향악단을 오래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김호경
‘힘(力)’의 미학
피아니스트 알렉세이 볼로딘 독주회
12월 10일 금호아트홀
자리는 J열의 19번. 금호아트홀에서 보던 여느 공연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자리였다. 하지만 이날 피아노 소리는 다르게 들렸다. 마치 3D 영화처럼, 소리가 바로 눈앞에서 손에 잡힐 듯했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 피아노도, 마이크 위치도 같았다. 달라진 건 연주자뿐이었다. 알렉세이 볼로딘이 첫 곡 메트너 ‘회상 소나타’에 이어 프로코피예프를 연주할 무렵,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듯 격정적인 소나타 3번을 들으며 수첩에 하나의 글자를 힘주어 적었다. ‘힘(力)’.
알렉세이 볼로딘은 1977년 레닌그라드 태생으로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과 이탈리아 레이크 코모 피아노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2003년 게저 언더 콩쿠르 우승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2014/2015 시즌에는 마린스키 극장의 상주 음악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지난 2012년에는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크리스티안 루트비히/광주시향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한 바 있다.
두 번째 내한이자 그의 첫 독주회인 이날 공연의 1부에서는 메트너 ‘회상 소나타’로 시작해 프로코피예프 피아노를 위한 10개의 소품 Op.12 중 세 곡과 소나타 3번,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을, 2부에서는 쇼팽 ‘환상 폴로네즈’와 슈만 ‘카니발’을 선보였다.
쇼팽 ‘환상 폴로네즈’에서 들려준 서정과 슈만 ‘카니발’ 중 ‘쇼팽’의 한없이 여린 음색도 가슴을 울렸지만, 강렬한 대비를 통해 이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볼로딘의 ‘힘’이었다. 역동적이고 기운 넘치는 그의 피아니즘은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3번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후기 소나타에 비해 낭만주의의 영향과 조성감이 남아 있는 단악장의 작품에서, 볼로딘은 강렬한 타건과 비르투오시티를 바탕으로 ‘피아노는 타악기다’라는 프로코피예프의 철학을 충실하게 드러냈다. 연신 땀을 흘리며 거침없이 건반을 두들기는 그의 모습은 흡사 록 밴드의 드러머 같았다.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 역시 호연이었다. 오케스트라 작품을 피아노로 편곡한 이 곡에서, 볼로딘은 극적인 다이내믹의 대비를 통해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악기를 실감나게 표현했다. 그의 피아노는 때로는 첼레스타로, 때로는 육중한 팀파니로 변모하여 환상적인 색채를 연출해냈다.
마지막 곡이 끝나고,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에 볼로딘은 쇼팽 마주르카를 비롯한 세 곡의 앙코르로 화답했다.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가며 볼로딘은 앙코르곡마저 불태웠고, 무대의 열기에 어떤 관객은 손부채질을 하기도 했다. 뜨겁고, 뜨거운 연주였다. 임형준
찬란한 순간의 음악
‘예술의전당 스페셜 스테이지’ 협연 임지영, 뤼사오자/서울시향
12월 1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조건 가야 하는 공연이라고 생각했다. 2015년 5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로 1위를 차지한 임지영의 브람스를 들을 수 있는 자리 아닌가. 임지영은 브람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 Op.77로 권위를 자랑하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1위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녀는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을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조기 입학하며 김남윤에게 사사했다. 해외 유학 경험 없이 국내에서만 탄탄한 실기 교육을 받은 바이올리니스트이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 소식은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 낭보였다.
역시 티켓은 전석 매진됐고, 합창석까지 청중으로 가득 찼다. 이번 공연은 예술의전당이 올해 처음 기획한 ‘스페셜 스테이지’의 일환이다. 해외 콩쿠르에서 두각을 나타낸 젊은 음악가를 초청하자는 뜻으로 기획됐다. 프랑스 브장송 콩쿠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키릴 콘드라신 콩쿠르, 이탈리아 페드로티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력을 지닌 대만 지휘자 뤼사오자가 서울시향과 함께했다.
임지영의 브람스는 황홀했다. 그녀가 뽑아내는 폭넓은 색채에 탄성이 일었다. 고음부의 찬연한 비브라토와 폭넓은 활 컨트롤에서 탄탄한 기본기가 여실히 드러났다. 당당함과 애절함을 표현하는 음색은 드라마틱했다. 2악장에선 부드럽고 차분하게 자신의 서정성을 담아냈다. 3악장은 첫 프레이징이 곡 전체의 인상을 결정하는데, 도입부를 다소 급하게 들어간 느낌이었다. 하지만 바로 민첩성을 되찾아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케스트라를 타고 흐르는 독주 바이올린 소리는 명쾌했다. 춤추듯 움직이는 활은 생기 있는 에너지를 전했고, 중간 중간 음을 잡는 모습도 안정감 있게 느껴졌다. 폭넓게 곡을 펼쳐가는 ‘건강한’ 소리에 청중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뤼사오자/서울시향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을 선보였다. 뤼사오자는 여유롭게, 매순간 악보에 충실했다. 굵은 선 속에 애절함과 부드러움을 넘나들며 연주하는 서울시향의 연주도 발군이었다. 특히 클라리넷과 호른을 필두로 한 관악기의 연주는 매우 안정감 있었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도 호연이었으나, 이번 공연에서 빛을 발한 건 임지영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임지영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2년 더 공부한 뒤, 해외 유학길에 오를 계획이라고 한다. 그녀가 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레퍼토리를 넓히고 내성을 쌓아,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굵직하게 자리매김하는 연주자가 되길 바란다.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스물한 살의 임지영을 기대한다. 장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