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적이고 따스한 목소리를 지닌 바리톤 토마스 햄슨이 첫 내한 공연을 갖는다
오페라에서 바리톤은 ‘나쁜 놈’인 경우가 많다. 테너와 소프라노 사이에 끼어들어 삼각관계를 형성하다 보니 악인 역할이 많은 것이다. 물론 주인공의 부친이나 오빠, 친구로 설정된 경우도 있지만 역시 그 전형적인 역할은 방해자다. 오죽하면 오페라 광으로 유명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 버나드 쇼가 “오페라란 테너와 소프라노가 침대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바리톤이 방해하는 바람에 그렇게 못하는 이야기”라고 정의했을까? 대신 바리톤은 테너에 비해 냉정하게 상황을 관찰하고 승리하는 법을 아는 역이다. 테너보다 대개 연령도 조금 높고, 재산이나 권력도 있다. 육체적으로도 더 강건하게 묘사된 경우가 많다. 남성성을 상징하는 성부는 테너가 아니라 바리톤인 것이다. 그런데 토마스 햄슨(Thomas Hampson)은 ‘부드러운 바리톤’이다. 인상이 그렇고, 노래하는 스타일이 그러하며, 어울리는 배역은 전형적인 악역의 캐릭터로부터 꽤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아름다운 음성의 바리톤 토마스 햄슨이 드디어 첫 내한 공연을 갖는다. 사실 2008년 가을에 첫 내한 공연이 이루어질 뻔하다가 무산된 바 있다. 소속 음반사를 옮기는 과정에서 아시아 투어 전체가 취소되었다는데, 때문에 환갑을 막 넘긴 나이의 햄슨을 만나게 됐으니 전성기가 지났을 것이라고 아쉬워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큰 소리로 노래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가사의 깊은 이해에서 출발하는 지극히 지적이고 정감 넘치는 노래를 들려주는 데다 요즘도 꽉 짜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스타 바리톤이니 여전히 훌륭한 노래를 들려주리라 확신한다. 게다가 그는 현재 자신의 목소리에 가장 잘 어울리고 한창 열성을 쏟고 있는 곡들을 직접 골라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미국 바리톤의 명예를 회복하다
토마스 햄슨은 1955년 6월,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나 워싱턴 주에서 성장한 전후(戰後) 세대로서 미국 바리톤의 계보를 잇는 대표 주자가 되었다. 20세기 들어 유럽을 따라잡는 데 열심이던 미국 성악계는 훌륭한 바리톤을 계속 배출했는데, 이 기회에 계보를 정리해보자. 첫 주자로는 로렌스 티벳(Lawrence Tibbett, 1896~1960)이 꼽힌다. 그는 ‘미국의 오페라 가수들’이란 두터운 책자의 표지를 장식할 정도로 기념비적인 존재로서, 열성적인 음성과 변화무쌍한 표현력의 명가수이자 관객을 감동시키는 연기자였다. 미국 최초의 세계적 남성 가수로 꼽힌다. 그 뒤를 레너드 워런(Leonard Warren, 1911~1960)과 로버트 메릴(Robert Merrill, 1917~2004)이 이었다. 워런은 권위 넘치는 음성과 카리스마로 유명했다. 게다가 한창 활동할 나이에 ‘운명의 힘’을 공연하다가 무대에서 숨을 거두는 바람에 더욱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반면 메릴은 한층 관객 친화적이고 뮤지컬 출연도 했을 정도로 대중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신사 같은 음성과 매너, 치즈 케이크같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표현된다.
그다음은 코넬 맥닐(Cornell MacNeil, 1922~2011)이 이어받았다. 맥닐은 악역 바리톤의 전형에 어울리는 가수였다. 오래도록 활동한 덕에 오페라 전막 영상도 여럿 만날 수 있다. 그다음에 파바로티·프레니 등 이탈리아 명가수들과 동갑내기이며 그들의 중요한 파트너였던 셰릴 밀른즈(Sherrill Milnes, 1935~)가 등장한다. 밀른즈는 어떤 노래를 부르든 늘 최고 수준이었는데, 특히 뻔뻔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 연기가 너무 출중해 악당 캐릭터의 고약함을 다 용서해주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뒤를 잇는 대형 바리톤은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다. 앨런 타이터스(Alan Titus, 1945~), 데일 듀싱(Dale Duesing, 1947~)이 있지만 실력에 비해 명성은 높지 않았다. 그러다 햄슨이 다시금 미국 바리톤의 명예를 회복한 것이다. 햄슨보다 조금 늦게 로드니 길프리(Rodney Gilfry)가 각광받았고, 드웨인 크로프트(Dwayne Croft), 네이슨 건(Nathan Gunn) 등 이후 세대의 미국 바리톤도 세계무대에서 맹활약 중이다.
아르농쿠르와 번스타인의 선택을 받다
햄슨은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성악 공부를 병행했다. 졸업 후 음악을 선택했고 23세에 로테 레만 상을 받았다 하니, 정상적인 성장 경로를 밟은 셈이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할 때는 독일 바리톤 호르스트 군터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군터는 2013년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햄슨의 멘토 역할을 했다. 1980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오디션에 입상한 후에는 육성 프로그램 과정에서 독일의 전설적인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와 인연을 맺는다. 곧바로 유럽 무대에 진출한 햄슨은 뒤셀도르프 오페라에서 조역들을 소화한 후 1984년 취리히 오페라의 전속 가수가 된다. 당시 취리히 오페라에서는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와 연출가 장피에르 폰넬이 혁신적인 프로덕션을 연이어 만들어내는 중이었고, 이 극장에 주역으로 합류한 것 자체가 햄슨의 위상을 높여줘 런던 위그모어 홀에서 데뷔 리사이틀을 열었다. 2년 후 뉴욕의 타운 홀에서 열린 첫 미국 리사이틀에 대해 ‘뉴욕 타임스’지는 “멋지게 생겼고, 무대를 압도하는 존재감이 있다. 리사이틀 형식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활력 넘치는 극장 효과를 창조했다”고 극찬했다.
그의 성공 가도에는 두 지휘자가 결정적인 기여를 했는데,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취리히의 모차르트 사이클을 시작으로 풍부한 오페라 경험을 쌓게 해주었고,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와 함께 완성한 바흐 칸타타 전집 녹음에도 햄슨을 참여시켰다. 만년의 레너드 번스타인은 1986년부터 말러 콘서트에 햄슨을 초청했다. 몇몇 공연은 영상물로도 나왔고 무척 인상적인 말러 연주이니 꼭 들어볼 가치가 있다. 번스타인은 세상을 떠난 해인 1990년 2월과 3월에도 햄슨과 공연하며 자국의 젊은 바리톤을 배려해주었다. 미국 바리톤이라면 오페라에 매진하는 편이 유리했을텐데 리트라는 어려운 길에 깊이 들어선 것은 햄슨의 큰 모험이었다. 그렇지만 워낙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데다 도전을 즐기는 성품이고 학구적으로 모든 일에 임하는 완벽주의자의 면모 덕분에 최고의 리트 가수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에 단숨에 오를 수 있었다. 햄슨은 슈베르트·슈만·볼프·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리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리트의 명수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도 1995년의 인터뷰에서 햄슨을 “지금 유럽에서 활약하는 최고 가수”라고 칭찬했는데, 오페라보다 리트 연주에 대한 찬사다.
햄슨은 테시투라(좋은 소리를 내는 음역대)가 높은 편이어서 일단 ‘하이 바리톤’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또한 큰 성량이나 묵직한 중·저음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놀랄 만한 부드러움과 귀족적인 품격으로 정서적인 교감을 이루어낸다. 특히 테너처럼 높은 음역과 놀라운 테크닉의 메차 보체(약음)를 종횡무진 구사하는 솜씨와 그 미성에 놀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리릭 바리톤’의 전형이며 아직도 젊은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오페라에서는 이탈리아·프랑스·독일 레퍼토리는 물론 미국과 러시아 오페라까지 섭렵한다. 모차르트나 로시니를 부르던 젊은 시절에는 맑은 음색과 테크닉이 큰 도움이 되었지만, 베르디와 푸치니의 드라마틱한 배역을 소화하기에 그의 소리는 너무 깨끗하고 밝다. 그러나 프랑스 오페라에서는 단연 최고다. 구노, 마스네 오페라의 부드러운 바리톤을 표현하는 ‘바리톤 칸타테’의 영역에서 햄슨의 이지적이고 따스한 소리를 따라올 경쟁자는 거의 없다. 취약하던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도 악역보다 ‘시몬 보카네그라’나 ‘돈 카를로’의 로드리고처럼 내면 연기에 치중하는 역으로 호평을 얻었다.
햄슨은 미남인 데다 실력도 출중한 이탈리아 바리톤 루카 피사로니를 사위로 얻었다. 장인을 닮아 이탈리아 가수답지 않게 리트를 즐겨 부르고, 애견가란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는 사위와 함께 콘서트를 갖는 것도 요즘 햄슨의 즐거움이다.
미국 음악의 전도사
이번 내한 공연은 2015년 카네기홀의 공연을 재연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비롯해 쳄린스키, 말러, 힌데미트 등 독일 리트 중심이다. 반주는 피아니스트 볼프람 리거가 함께한다. 1부 마지막을 장식하는 찰스 아이브스부터 미국 색깔이 드러난다. 2부는 여류 작곡가 제니퍼 히그던의 곡, 미국의 국민시인 월터 휘트먼의 시에 의한 여러 미국 작곡가의 곡으로 짜였다.
미국 음악이야말로 현재 햄슨이 가장 집중하는 분야다. 햄슨은 1996년부터 미국 노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데, 이듬해에는 PBS 방송의 ‘토머스 햄슨: 미국이 노래하는 것을 듣다’란 프로그램에 공연자로서뿐 아니라 예술감독과 컨설턴트로 참여했다. 1998년에는 미국의 동료 가수들을 모아 런던의 바비컨 센터에서 미국 노래만으로 구성된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2003년에는 미국 의회도서관과 협력해 햄프송 재단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단체를 출범시켰는데, 표면적 취지는 전 세계 노래 예술을 육성한다는 것이지만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보면 아무래도 미국 노래의 전파에 중요한 비중을 두고 있다. 2009년 11월에는 미국 노래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수록한 인터넷 페이지 오픈을 주도했다. 물론 햄슨은 미국 작곡가가 쓴 현대 오페라 초연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이렇게 애국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2009년 그가 미국을 상징하는 뉴욕 필의 첫 번째 상주 음악가로 지정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그뿐 아니라 2010년에는 우리나라로 치면 예술원과 학술원을 합친 성격인 미국의 AAAC(the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니 예술가로서, 미국 시민으로서 가장 영예로운 경지에 올라 있다고 할 것이다.
이번 토마스 햄슨의 내한 공연은 한 뛰어난 바리톤의 노래를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음악을 세상에 알리는 문화대사’ 역할을 자임한 노신사의 모든 것을 만나는 것이요, 그에게 있어 ‘나의 음악’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한 분야의 진정한 어른이 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다.
사진 지니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