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최정상의 연주, 뜨거운 감동
한 지휘자가 악단을 완전히 장악해 개성 있는 사운드를 내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지휘자들의 이전투구는 이제 일상화된 지 오래다. 음악 외적으로 홍역을 앓고 있는 서울시향도 예외는 아니다. 정명훈이 있고 없고는 적어도 음악적 부분에 있어 현재 서울시향에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빈 필이 지휘자에 따라 달라지는가? 음악감독이 콘서트 횟수 면에서 가장 많이 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조차 샤이와 객원지휘자 사이에 확연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1월 16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서울시향 마스터피스 시리즈. 곡목 변경을 요구한 몇몇 외국인 지휘자 덕에 최수열 부지휘자가 공연을 맡게 된 것은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 젊은 우리 지휘자의 가능성을 보았고 서울시향의 저력도 확인하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 먼저 최수열은 모차르트의 협주곡 23번에서 피아니스트 김다솔을 아낌없이 배려했다. 김다솔은 모차르트의 노래하는 심성을 낭랑한 피아니즘으로 일궜다. 다만 시대를 변혁시키고자 한 ‘혁명가 모차르트’의 치열함과 광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2악장은 슬펐으되 질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뒤돌아서서 우는 모차르트처럼 서울시향 현악기군의 질감은 두텁고 묵직했다.
후반부, 말러 교향곡 6번 연주를 위해 120명 가까운 단원 앞으로 최수열이 나왔을 때 객석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낄 법한 젊은이에게 격려의 박수를 먼저 보냈다. 1악장 도입부, 군대의 행진곡은 비틀거렸다. 악기 간 밸런스가 자주 깨졌다. 목관의 코랄이 나오고부터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이어지는 알마의 주제부터는 노래하는 현악기가 도드라졌다. 최수열은 난삽한 음표로 가득한 교향곡을 지독스럽게 일관된 템포로 하나하나 점령해갔다. 디오니소스적 면이 우위에 있는 말러에게 아폴론적인 이성을 강요하는 격일까. 어쩌면 자신보다 더 말러를 꿰뚫고 있을 단원들을 최대한 자유롭게 하면서도 자신이 지정한 ‘선과 면’을 적절히 섞어가며 타협하는 놀라운 면을 가지고 있었다. 비팅은 시종일관 명료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냉정하고 처량한 곡 가운데 그나마 목가적인 3악장, 최수열과 서울시향은 달지도 쓰지도 않게 담담하게 풀어 나갔다. 한편으로 맥 빠질 수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사유하는 휴식을 제공했다.
4악장은 악단의 응집된 사운드가 고스란히 폭발했다. 비참한 파국을 최대한 표현했다. 특히 팀파니 수석 장클로드 장장브르는 전곡 내내 발군의 실력을 뽐냈다. 다비드 게리에의 트럼펫 또한 같은 악기군 주자들과 일관된 호흡으로 곡의 완성도를 높였다. 홍웨이 황이 이끄는 비올라군은 무대 오른쪽에서 더욱 효과적인 사운드를 뿜어냈다. 시각적으로도 오싹한 전율을 느끼게 하며 나무 해머를 내려친 에드워드 최는 마치 저승사자와도 같았다. 떡메에 밀가루를 뿌려놓아 죽은 자가 하늘로 솟구치듯 하얀 먼지가 피어올랐다. 두 번째 타격보다 코다에서의 세 번째 타격이 더 섬뜩했다. 비극은 무겁게 종언을 고했지만 객석은 환호성이 메아리쳤다.
서울시향의 당면 과제는 성급하게 상임 지휘자를 찾을 게 아니라 능력 있는 단원의 이탈을 막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오케스트라는 악장을 중심으로 단원들이 이끌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시향의 수준은 이미 아시아 최정상이다. 올해 예정된 정명훈 지휘 공연은 10회 남짓이었다. 그보다 훨씬 많은 공연을 서울시향은 치러야 한다. ‘정명훈의 서울시향’이 아니라 ‘서울시향의 서울시향’이 되어야 한다. 지난해에도 객원지휘자가 이끈 공연이 더 감동적인 경우도 있었다. 이제 우리는 정명훈에서 벗어나 서울시향 자체를 바라보아야 한다.
사진 서울시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