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회자된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지난해 해외 콩쿠르 입상 후 시간을 머금고 꽃망울을 터뜨린 그녀의 차분하고 단단한 행보
김봄소리는 고요하다. 조용히, 꾸준히,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 있다. 예원학교, 서울예고, 서울대, 서울대 대학원까지 순차적으로 국내에서 교육을 받은 그녀는 2013년 뮌헨 ARD 콩쿠르에 입상하며 큰 주목을 받았고, 1년 뒤 줄리아드 음악원에 입학했다. 지난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에 진출했고,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선 5위를 수상하는 성과를 보였다. 서두르지 않지만, 매우 단단한 발걸음이다.
언젠가 김봄소리가 연주하는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을 듣고 싱그러운 연주에 탄성을 지른 적이 있다. ‘모차르트’를 ‘모차르트답게’ 연주하는 모습은 깊은 감동이었다. 김봄소리는 자신이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고요하지만, 부단한 움직임. 아직 보여줄 것이 더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다. 천천히 피는 꽃은 늦된 꽃이 아니라 겸손한 꽃이며, 겸손한 꽃은 계절의 이치를 안다고 했다. 우리가 김봄소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해는 김봄소리에게 굉장히 바쁜 한 해였다. 5월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에 진출했고, 6월에 열린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선 5위의 성과를 보였다. 비슷한 시기에 두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은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기간이 너무 길어서 체력 소모가 컸다. 파이널을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는 못 나갈 것이라 예상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끝나고 체력적으로는 힘든데 정신적으로는 깨어난 느낌이었다. 큰 콩쿠르를 치른 뒤 결과에 연연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된 것이다. 고민 끝에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도전했다. 준비 시간이 없었으니 도전 자체가 큰 의미였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심사위원은 막심 벤게로프, 바딤 레핀 등 러시아 출신의 명성 높은 현역 바이올리니스트들이다. 러시아 연주자들에게 나의 러시아 작품 연주를 평가받고 싶었다. 짧은 준비 기간에 비해 좋은 결과를 얻었고, 심사위원들과의 친분도 생겼으니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끝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마무리 짓고, 2주 동안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나갈 세 곡을 익혀야 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현지에서 구한 악보를 2주 만에 다 외워야 하는 일정이었으니까. 차이콥스키 ‘메디테이션’, 바흐 ‘샤콘’ 등 한 번도 다뤄보지 않은 곡들이었다. ‘암보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하니, 오히려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프리스크리닝 오디션으로 50명의 참가자 중 1차에 올라갈 20명을 선발한다. 프리스크리닝 오디션을 치르고, 바로 벨기에로 넘어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갈라 콘서트를 한 뒤, 다음 날 다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참여했다. 주변에서 무리라며 만류했지만, 이상하게도 컨디션이 좋아서 스스로 놀랐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실황 음반에는 김봄소리가 연주한 미하엘 야렐의 현대곡 ‘…구름보다 가벼운…(…aussi peu que les nuages…)’이 트랙에 선정되기도 했다.
굉장히 놀랐다. 미하엘 야렐이 직접 선정한 것이라 더욱 영광이다.
한국 학생들에게는 해외 콩쿠르 출전이 화두다. 여러 콩쿠르를 참여하며 이러한 현황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악기를 잘하는 한국인이 많은 이유’에 대해선 고민해본 적이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한국은 인구수가 적지만, 그에 비해 악기를 잘하는 학생이 정말 많다. 콩쿠르에 지원하면 제일 먼저 연주 동영상을 심사한다. 실력이 없으면 콩쿠르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동등한 심사에서 한국인이 많이 선발된다는 점은 그만큼 악기를 잘하는 학생이 많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왜 악기를 잘할까’에 대한 답은 ‘문화적 차이’인 것 같다. 미국이나 유럽의 어린 학생들은 보통 취미로 악기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은 예중·예고에 입학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많은 양의 연습을 한다. 학생들이 경쟁에 익숙해지면서 잘하는 수가 늘어난 것 같다.
여러 콩쿠르를 참여하며 느낀 장점과 단점이 있으면 꼽아달라.
‘어떤 마음으로 임하는가’에 따라 콩쿠르는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다. 무리해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나간 이유는 배우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실패해도 실망하지 않을 만큼 스스로 당당했다. 욕심만으로 무대에 서고, 실패 경험이 계속 쌓이면 점점 위축되기 마련이다. 어떤 결과도 담담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콩쿠르에 참여해야 한다.
시간을 새기며 음악적 기틀을 굳히다
보통 어린 시절에는 독자적인 해석보다 레슨에 의해 훈련된 연주를 한다. 어느 시기부터 곡을 해석할 때 자신의 색깔을 고민하기 시작했는지 궁금하다.
중학교 때부터 ‘음악일기’를 썼다. 연습이나 레슨을 한 뒤, 무엇이 안 되어 속상했는지 빼곡하게 적었다. 현재도 꾸준히 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칭찬받으려 애쓰는 아이였다. 음반을 들으면 그런 소리를 내기 위해 계속 연습했다. 어릴 땐 기교적인 부분에만 집중했는데, 대학에 입학하고 김영욱 선생님을 만나면서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다. 음악을 섬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연주자라도 음악에 대해 자만하면 무대에서 다 드러난다. 위대한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겸손하게 음악을 하는 사람이고 싶다.
줄리아드 음악원으로 유학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실비아 로젠버그나 로널드 콥스에게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한국에선 유명한 해외 교향악단이 내한해도 티켓 값이 너무 비싸서 공연을 보기 어렵다. 웬만한 음악가들은 한 번쯤 꼭 뉴욕 무대에 오르지 않나. 뉴욕에선 저렴하게 티켓을 구할 방법이 많다. 좋은 홀에서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 정말 행복하다. 일부러 카네기홀과 링컨센터 중간 위치에 집을 얻었다. 공연을 많이 보며 본전(?) 뽑고 있다.(웃음)
미국에서 공부한 지 2년이 되어간다. 바이올린을 대하는 부분에서 음악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하다.
뉴욕은 다인종이 살고 있는 도시여서 그런지, 다양성을 존중받는 느낌이다. 줄리아드 교육 시스템도 학생들의 수준을 평준화하는 것이 아니라 개성을 이끌어내는 점을 중시한다. 변화에 대해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이 뉴욕만의 특징이라 생각한다.
짧은 기간 동안 레퍼토리를 바꾸며 수월하게 연주하는 모습에서 힘이 느껴진다.
한국은 무대에 올라가는 곡이 한정돼 있다. 특히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월턴만 해도 미국에선 많이 연주되는 곡인데, 한국에서는 드물다. 기회가 된다면 뜻이 맞는 오케스트라와 이런 곡들을 연주하고 싶다. 많이 연주되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 아닐까. 리사이틀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기획할 기회가 생기면 현대곡으로만 채우고 싶다. 뉴욕 필하모닉은 보통 첫 곡으로 현대 작곡가 작품을 연주하고, 줄리아드에도 현대음악만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있다. 한국에도 현대음악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김봄소리는 굉장히 ‘정공법’으로 연주한다. ‘모차르트’를 ‘모차르트답게’ 연주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 김봄소리의 연주를 들으면서 작곡가의 의도와 밀접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정공법으로 연주한다’는 평은 기분 좋은 말이지만, 나는 작품 안에서 항상 새로운 걸 발견하고 싶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작곡가의 악보를 정직하게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작곡가의 원전 악보를 구해서, 어떤 지점에 어떤 지시가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고, 독자적인 음색을 넣어 새롭게 연주하려고 노력한다. 한 곡을 항상 똑같이 연주하면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 같다. 빨지 않은 옷을 다시 입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한 곡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어떠한 과정을 거치나?
예전에 했던 곡들을 다시 꺼내서 공부하는 작업은 즐겁다. 바뀐 관점을 기준으로 이전 녹음을 들으며 지금 연주와 비교한다. 반대로 새로운 레퍼토리를 공부하는 작업은 힘든 편이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지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곡을 처음 읽을 때, 다른 연주자의 녹음은 듣지 않았다. 녹음을 듣고 습득한 음악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른 연주자의 연주를 많이 들어도 나만의 기준이 생겨서 괜찮다. 악보를 완전히 정독한 상태에서 여러 연주자의 다양한 해석을 들으면 시야가 넓어진다.
영감을 받는 또래 연주자가 있는가?
콩쿠르에 입상했다고 이름이 계속 회자되는 시대가 아니다. 그 기회를 통해 무엇을 얻느냐가 중요한데, 레이 천은 대중의 인기를 얻은 점은 물론이고, 동영상을 활용해 자신의 장점을 계속 어필한다. 요즘은 경제적 여건으로 음악을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자선 단체를 만들고 있다.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에게 악기와 레슨을 지원해주는 시스템이다. 나도 어릴 적부터 계속 꿈꿔온 일인데, 레이 천이 선두에 서서 그런 일을 시도하는 것을 보고 좋은 자극을 받았다.
틈날 때마다 책을 읽는다고 들었다. 지난 인터뷰에는 러시아 문학을 많이 읽는다고 했는데,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있나?
시집을 자주 읽고 있다. 요즘은 프랑스 작가 기욤 아폴리네르가 쓴 ‘알코올’을 읽는 중이다. 1898년부터 1913까지 15년 동안 쓴 시를 모은 시집인데, 흔들렸던 사회 분위기 속에 청년 시인의 위트가 감명 깊게 다가온다.
이번 5월에 줄리아드 음악원을 졸업한다. 앞으로 계획은?
몇 년간은 뉴욕에서 더 공부할 계획이다.
10년 뒤, 김봄소리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나?
이제 콩쿠르에 집중하는 시기는 지났고, 나의 음악을 나눠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모든 예술은 다 통한다고 생각한다. 미술이나 무용 등 타 장르와 협업하며 예술의 매력을 대중에게 전하는 프로젝트를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음악의 즐거움을 관객과 나누고 싶다. 또한 클래식 음악과 국악을 접목하는 시도를 구상 중이다. 예전에 판소리를 보다가 깊은 감동을 느낀 적이 있는데, 사람의 감정을 그렇게까지 꺼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한국 문화에 뿌리를 둔 사람으로서 한국의 색이 진하게 묻어나는 연주를 하고 싶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앞으로 10년은 음악적으로 나만의 소리를 찾는 시간이길 바란다.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