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는 청산이요 태없는 유수로다
값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
이 중에 병 없는 이 몸이 분별없이 늙으리라
-성혼(成渾)
고요한 청산과 모양이 정해지지 않는 물,
값을 매길 수 없는 맑은 바람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달빛과 함께라면
뜨거운 여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음에 품고 싶은 아름다움, 청풍호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여름이었다. 입추가 지나서도 땅의 열기와 강력한 더운 바람은 식을 줄 몰랐다. 그렇게 뜨거운 세상을 견디기 위해 현재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로 여름은 내내 들썩였다. 어딜 가도 여름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내륙의 바다’라 불리는 청풍호에 겹쳐 있는 산과 물은 언제든 아름다울 것 같았다.
청풍호에 처음 가본 건 한겨울이었다. 정말 추운 날이라 호수 가장자리는 꽁꽁 얼어 있었고, 가운데로 갈수록 얼음은 헐거웠다. 옥순대교를 지날 때 부는 칼바람에 발끝이 얼어붙던 생각이 난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산을 보면서 바람이 더욱 매섭게 느껴졌다. 청풍호를 에두르는 길을 따라 차를 타고 돌았는데, 유난히 돌과 바위가 많은 주변 산들이 호수를 더 깊어 보이게 했다. 굽이굽이 굴곡진 물길은 호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청풍호는 원래 청풍강이었는데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주변 마을이 수몰되었다. 그래서 그 마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청풍호라고 부른단다. 하지만 정식 지명은 충주호다. 개인적으로는 조금은 구식으로 느껴지는 청풍호가 훨씬 좋다. 사람들이 오래 불러오던 이름이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다.
청풍호를 둘러볼 수 있는 유람선을 탔다. 청풍나루에서 동쪽으로 향하다가 장회나루에서 배를 돌리는 코스다. 한 시간 정도 흐르는 동안 얼마나 세상이 고요한지 마치 여름의 끝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물빛이 맑고 맑아 거울 아닌 거울이요, 산 기운이 자욱하여 연기 아닌 연기로다.
차고 푸름 서로 엉기어 한 고을 되었거늘, 맑은 바람을 만고에 전할 이 없네.
-주열(朱悅)의 시, ‘신증동국여지승람’ 중
가장 눈을 뗄 수 없는 건 ‘소금강’이라고도 불리는 옥순봉이었다. 옥순봉은 푸른 봉우리가 죽순처럼 솟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단원 김홍도도 화폭에 이 빼어난 모습을 담았고, 널리 전해지는 퇴계 이황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옥순봉은 제천 10경에도 속하고, 단양 8경에도 속한다. 1549년 이황이 단양 군수로 부임했을 때 단양의 관기 두향이 옥순봉에 반해 이곳을 단양에 포함시켜달라고 청했고, 이황은 이를 청풍부사에게 부탁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옥순봉 절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 즉 단양의 관문이라는 글을 새겼다. 좋은 것에 대한 욕심은 누구나 품을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실 어차피 주인이 없는 것이고, 바꿔 말하면 누구나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니까. 청풍명월로 많은 옛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이곳은 물론 그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바위와 물이 지어내는 수려한 경관을 어찌 마음에 담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멀리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바위산인 금수산. 그 산 줄기를 따라 내려온 산 뿌리가 청풍호에 발을 담근 듯했다. 뱃길 양쪽으로 보이는 수많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들의 나부작한 모습이, 마치 얼마 전 보았던 신윤복의 그림 ‘처네 쓴 여인’에 나오는 조선 여인의 뒷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산도 우리 것은 뾰족하지가 않다. 어딘지 모르게 둥글고 부드럽다. 여름에는 바위도 웅그리지 않고 퍼져 있는 것 같다.
거북이 등을 닮았다지만 지금은 아래쪽이 물에 잠겨 이름값을 제대로 매길 수 없는 구담봉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이름을 되뇌었다. 지금 잊어버리면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나의 세대는 풍요롭게 살지만 잃은 것도 참 많다는 생각에 가슴 한쪽이 찌릿했다. 멀리 보이는 제비봉과 비봉산. 이름도 어쩜 이렇게 예쁠까. 바위 하나를 놓고도 거북이를 닮았네, 사람 얼굴을 닮았네, 봉황을 닮았네, 하는 마음이 애틋하다.
격정의 선율이 주는 후련함, 윤윤석류 아쟁산조
우리 음악 중 가장 뜨거운 것을 꼽으라면 윤윤석류 아쟁산조가 첫 번째다. 아쟁산조는 매우 굴곡이 많은 음악이다. 아쟁이라는 악기가 지닌 음색, 굵직하면서도 격렬하게 흔들린다. 같은 찰현악기인 해금과는 또 다른 비벼지는 소리다. 농현의 폭도 확연히 다르다. 해금은 왼손의 악력으로 주무르는 것이라면 아쟁은 위에서 아래로 깊이 누르면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 힘이 쓰이는 강도가 다르다. 게다가 활은 여러 줄을 한꺼번에 긁으면서 더욱 극적인 표현을 만들어낸다.
8개의 현은 꽤 넓은 음역을 가지고 있는데, 낮은음을 흔드는 것과 높은음을 흔드는 것이 굉장히 다르다. 높은 소리는 귀를 찌를 듯 날카롭고 격정적인 느낌이고, 낮은 소리는 무한히 부드럽고 깊은 바다의 흔들림처럼 묵직하다. 우리 음악이 대부분 그렇지만, 직선의 소리는 거의 없다. 끊임없이 흔들리며, 굴곡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을 통해 마음의 주파수와 결을 맞추고, 그래서 위로가 된다. 결국 음악은 사람을 닮은 것이고, 사람은 이 산천을 닮았을 것이다. 이 고리가 연결되어 사람을 닮은 음악이 우리를 위로하고, 그 음악에는 산천이 담겨 있는 것이겠지.
사실 아쟁산조는 굉장히 감정을 끓어오르게 한다. 슬픔과 열정이 가득한 음악이다. 해금에 대한 나의 사랑은 끝이 없는데, 언젠가는 그 가늘고 여린 떨림에 피곤함을 느끼기도 했다. 조그마한 악기인데도 마음대로 주물러지지 않고, 좋은 소리를 내주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미웠다. 그때 동경하던 악기가 아쟁이다. 굵직한 현의 울림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품이 깊었다. 아쟁을 좋아하면서 찾아 듣던 음악이 윤윤석류 아쟁산조다. 윤윤석 명인의 아쟁산조는 모든 것을 품고 있다. 사람의 가슴을 그야말로 후비고 들어오는 직설적인 소리. 때로는 등까지 서늘하게 만드는 단호한 멈춤. 여러 줄을 긁어내며 소리를 끌어올릴 때는 짓눌렀던 마음의 찌꺼기들을 걷어내주는 듯하고, 그러다 토해내듯 저음의 가락이 쏟아지면 결국 꽁꽁 묶어둔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모든 음악이 그렇지만 기분에 따라 매우 다르게 들린다. 토해내는 듯한 성음을 듣고 있노라면, 아프도록 슬픈 감정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현란한 활의 움직임과 왼손을 타고 나오는 끓는 듯한 농현, 그리고 격정적인 선율은 왠지 모를 후련함을 선사한다. 뜨거움에 오히려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뜨겁게 쏟아내는 음악을 자주 접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이, 거침없이 흐르는 음악. 머리 위에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음악. 잠시라도 딴청을 부릴 수 없게 만드는 음악. 때로는 엄중하게 꾸짖는 것 같고, 그러다 또 다독여주는 것 같은 음악…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아마 윤윤석 명인의 담담함 때문 아닐까 싶다. 힘들고 외로운 예인의 길을 걸으며 쌓아온 모든 것을, 어떠한 더함도 꾸밈도 없이 고스란히 산조에 담아냈다. 윤윤석 명인의 인터뷰 중 이런 글이 있었다.
“‘조선 사람’ 치고 여남은 가지 한도 없는 사람이 있간디요. 젊은 사람들한테도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 적 한이 골수로 전해올 테니까요. 그런 데다 민초들의 쓰린 앙금이 가라앉은 이 소리를 들으면 울적하던 심회가 왈칵 뒤집혀버리고 맙니다.”
이 산조에는 슬픔과 함께 신명이 담겨 있다. 얼핏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참으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슬픈 것이 단지 울음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비애를 거친 신명. 윤윤석 명인의 신들린 활에는 그런 슬픔을 승화시킨 기쁨의 열망이 담겨 있다.
윤윤석 명인의 또 다른 명연, 철아쟁산조
윤윤석 명인의 연주에는 폐부를 찌르는 무언가가 있다. 거장의 연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기가 막힌 연주다. 그런 명인이 더욱 눈부신 것은 “나의 인생에 잘된 것은 음악뿐”이라는 말에서 더 간절하게 느껴진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선율을 타고 넘는 활이 몹시 아름답다. 그런데 또 하나 특별한 연주가 있는데 바로 철아쟁산조다. 아쟁의 명주 현을 철현으로 바꾸고, 활을 쓰지 않고 가야금처럼 손으로 뜯어 소리를 낸다. 가야금 특유의 단호함이 더 배가 되고, 농현은 더욱 깊숙하며, 철 줄의 울림은 놀랍도록 청량하다. 이 세 가지가 묘하게 어우러져 빚어내는 소리는 사뿐하다. 아쟁의 활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먼저 철아쟁산조를 들어보는 것도 좋다. 마음을 찌르거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자극 없이도 충분하다. 하늘에 뜬 달, 청풍호에 뜬 달, 그리고 술잔에 뜬 달이라고 했던가. 그런 달빛이 흐르는 밤에 즐길 수 있을 법한 소리다. 이제 곧 새벽이슬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더위도 사위어가고 있으니까. 길고 지루하던 여름과 작별을 하며 이 음악을 듣고 싶다. 처량하지 않고, 눈물바람을 부르지도 않는다.
가끔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음악이 있다. 아무 미련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아 더욱 간절하게 들린다. 아쟁산조의 묵직함과 철아쟁산조의 비현실적인 가벼움. 이 둘은 매우 반대의 것 같지만 어쩌면 일맥상통한다. 그 안에 있는 무언가가 결국 우리의 마음을 비워주고 어루만지니까.
아름다운 청풍호에 가을이 오고 있다. 계절은 소리 없이 가고, 또 소리 없이 온다. 사람들만이 그 계절의 사이에서 노래를 하고 현을 뜯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다. 노래의 주제도, 형식도 바뀌었지만 노래하는 마음만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벌레 우는 어느 달밤, 청풍호에 흘렀을 선율을 흥얼거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