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독일 악단의 육중한 베토벤
부산의 지휘자, 베를린의 오케스트라가 서울 무대에 섰다. 협연자는 빈에서 온 트리오. 그야말로 코즈모폴리턴적인 클래식 음악계의 현재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9월 1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진 오충근 지휘의 베를린 심포니 내한 공연 얘기다. 오충근은 KNN방송교향악단과 부산심포니, 부산월드오케스트라 예술감독으로 부산의 아이콘 같은 지휘자다. 베를린 심포니는 1967년 창립했다. 2005년 내한한 이후 11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부산과 거제에 이어진 서울 무대였다. 오충근은 지난해 프라하 스메타나홀에서 노스 체코 필하모닉 테플리체를 지휘하며 한국·체코 수교 25주년 기념 평화콘서트를 이끌었다. 당시 리허설을 했던 테플리체는 베토벤이 휴양하며 교향곡 7번을 작곡한 곳이다. 그곳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오충근은 한국 투어 레퍼토리를 베토벤의 작품으로만 구성했다.
첫 곡은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서곡’이었다. 느긋한 템포 속에 현이 이따금 맹렬했다. 목관의 약동감이 돋보이는 곡이었다. 오충근은 씩씩한 동작으로 관과 현을 다잡았다. 이어 3명의 협연자가 등장했다. 빈에서 활동 중인 코즈모폴리턴 트리오 비엔나였다. 피아니스트 마리알레나 페르난데스와 바이올리니스트 엘리자베트 크로피치는 현재 빈 국립음대 교수다. 첼리스트 여미혜는 유럽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긴 전주에 이어 여미혜의 첼로가 첫 음을 켰다. DG에서 발매된 엘가와 생상스 첼로 협주곡 1번 음반에서 연주가 인상적이었던 터라 기대가 컸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차례로 주제를 이어받았다. 세 악기는 오케스트라와 전투를 하듯 한 음 한 음을 냈다. 힘찬 타건의 피아노 음이 카랑카랑했다. 상대적으로 바이올린은 부드럽게 다가왔다. 이 곡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인 첼로의 음량이 좀 더 컸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2악장에 들어서도 세 악기의 들뜬 상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첼로에서 바이올린으로 베토벤 특유의 숙연함이 바통을 넘기듯 전해졌고, 이윽고 소나기를 예고하는 한두 방울 비처럼 3악장이 시작됐다. 폴로네즈 리듬에 각 악기가 차례로 고조되는 부분은 기대와 달리 싱거웠다. 오케스트라와도 어긋날 때도 있었다. 3악장 막판에 가서야 몸이 풀린 듯 일제히 뜨거운 악센트로 곡을 마무리 지었다.
메인 프로그램인 베토벤 교향곡 7번이 연주됐다. 부드러운 첫 음이 오래 지속되며 ‘온화한 카리스마’라는 오충근의 별명이 떠올랐다. 지휘 동작에 점차 힘이 들어가면서 음량도 커졌다. 곡은 거대하게 부풀며 약동했다. 기존 연주보다 묵직하게 다가왔다. 왠지 신성함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2악장 장송행진곡은 통상적인 해석이었다. 느린 쪽에 가까운 템포로 연주됐다. 현악군은 셈여림 조절이 각별했고 점증 하는 크레셴도가 눈에 띄었다. 여기서 표정을 숨긴 비장감은 음악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백미였다. 3악장에서 오충근과 베를린 심포니는 한바탕 축제를 벌이듯 약동했다. 응집력이 돋보이는 연주였다. 곡은 최대한 부풀어 올랐다. 4악장은 예상을 뛰어넘는 호쾌한 질주였다. 오충근은 빠른 템포로 밀어붙이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앙코르는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서곡’이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선율이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전개됐다. 두 번째 앙코르인 ‘헝가리 춤곡’ 역시 독일 악단다운 저력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번 공연을 복기해보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절반씩 양보한 연주였다. 서로의 관성까지 통제하거나 잠식하려 들지 않았다. 무리수가 없었던 만큼 화끈한 한 방이 아쉽기도 했다. 내년 4월에는 오충근과 베를린 심포니가 베를린 필하모니 무대에 선다. 그때에는 좀 더 진한 지휘자의 색채가 발휘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