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OSER OF THE MONTH 이달에 주목해야 할 작곡가 글 송주호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1948년 문화부 장관인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탄압으로,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중 스탈린상을 받거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소수의 곡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곡이 금지되었다. 신곡 발표까지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쇼스타코비치는 3월에 완성되어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연주를 준비하고 있던 바이올린 협주곡 1번(1948)의 초연을 무기한 연기했다.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마침 ‘즈다노프선언’에서 민요 선율을 중시한다는 언급에 아이디어를 얻은 쇼스타코비치는 같은 해 10월에 ‘유대의 민속 시로부터’(1948)를 완성했다. 하지만 이 곡은 발표되지 않았다. 하필 스탈린이 반유대주의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던 때였으며, 가사의 원작자들은 체포되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곡은 반유대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빨리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의 구술 자서전인 ‘증언’에서는 1949년 4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 평화를 위한 문화와 과학 대회’에 소련 대표로 참석하게 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뉴욕으로 떠나기 직전인 3월, 극심한 탄압이 이뤄졌던 상황이 종식된 덕에 그는 준비된 연설문을 읽을 수 있었다. “만약 미국인들이 내 작품이 왜 금지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라는 쇼스타코비치의 질문에 스탈린은 “우리는 그런 결정을 내린 적이 없다”라고 답한 바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을 소련 대표로 선발해 준 것에 대해 보답해야 했다. 칸타타 ‘숲의 노래’(1949)를 11월에 발표했고, 이듬해 이 곡으로 네 번째 스탈린상을 받았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가꾸기 위해 조림정책을 시행한 스탈린을 위대한 정원사라고 칭송하는 작품으로, 오늘날에는 스탈린을 칭송하는 부분을 삭제하고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후에도 1950년 10월 ‘평화 수호를 위한 소비에트 위원’에 위촉되었고, 1950년 바르샤바·1952년 빈에서 열린 국제 평화 회의에 소련 대표로 참석했다. 이렇게 쇼스타코비치는 소련의 대외 선전용 인사로 활용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는 곡을 쓰는 동시에 이에 반(反)하는 작품도 작곡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라요크’라고 알려진, 칸타타 ‘반형식주의적인 작은 낙원’이 대표적이다. 이 곡은 즈다노프주의와 정부의 반형식주의 캠페인을 조롱하는 내용으로, 즈다노프의 연설에 환호와 조소를 보내는 군중 등 연극적인 장치를 포함하고 있으며 스탈린이 좋아했던 조지아 민요 ‘술리코’도 인용되었다. 언제 작곡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48년에 작곡하고 쇼스타코비치가 직접 가사를 쓴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공식적인 초연은 쇼스타코비치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작품번호도 붙지 않았다.
현악 4중주 4번(1949)도 발표되지 못했다. 칸타타 ‘숲의 노래’와 작곡 기간이 겹치는 이 곡에는 유대인의 이미지가 반영되었다. 나치와 소련에 의해 고통을 당했던 유대인에 자신을 투영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유대 풍의 선율들을 비극을 표현하는 중요한 감성적 요소로 다뤘다. 이외에도 바흐 ‘잘 조율된 피아노곡집’을 모델로 하는 ‘24개의 전주곡과 푸가’(1951)도 형식주의로 지적받을 소지가 있기에 사적으로만 연주되었다.
곡에 숨겨둔 그녀와 그
1949년 3월 이후 분위기는 반전되었지만, 음악가들은 여전히 몸을 사렸다. 형식주의자의 음악은 더 이상 연주되지 않았고, 창작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실상 쇼스타코비치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위험을 무릅쓰는 행위였던 상황에서 베토벤 4중주단은 금지되지 않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연주하여 그를 격려했다. 이에 쇼스타코비치는 베토벤 4중주단 30주년을 맞아 현악 4중주 5번(1952)을 헌정함으로써 그들의 도움에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이 곡에는 한 여성이 숨겨져 있다. 바로 쇼스타코비치의 제자였던 갈리나 우스트볼스카야다. 그녀는 쇼스타코비치가 어려울 때마다 곁에 있었을 만큼 그와 가까운 사이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에 그녀가 작곡한 ‘바이올린과 클라리넷, 피아노를 위한 3중주’(1949)를 인용함으로써 그녀에 대한 각별하고도 은밀한 마음을 표시했다. 실제로 1954년 12월에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우스트볼스카야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그녀는 받아주지 않았다.
현악 4중주 5번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특징은 그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악장 비올라의 첫 소절에는 D-S-H(D-E♭-B)가 등장하며, 3악장에는 D-S의 연결이 유독 눈에 띈다. 이것은 이후 그의 이름을 독일식으로 표기했을 때의 첫 네 글자, D-S-C-H(D-E♭-C-B) 동기가 완성되는 발판이 된다.
불완전한 해빙의 시작
놀라운 뉴스가 전해졌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의 죽음은 이듬해 발표된 일리야 에렌베르그의 소설 제목과 같이 곧 ‘해빙’의 시작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소식을 듣고 여러 행동을 취했다. 하나는 서랍 속의 작품을 꺼내어 연주하는 것이었다. 우선 스탈린이 사망한 해에 현악 4중주 4번과 현악 4중주 5번이 베토벤 4중주단에 의해 초연되었고,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유대 민속 시로부터’는 1955년 무대에 올랐다. 또 다른 행동은 1945년 이후로 멈췄던 새로운 교향곡을 쓰는 것이었다.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매우 빠른 속도로 작곡된 교향곡 10번(1953)은 해를 넘기지 않고 12월 17일 예프게니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의해 초연되었다.
스탈린 사망 이후 발표했던 첫 신작이자 첫 교향곡이었던 교향곡 10번을 둘러싸고 각계각층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긍정적인 결말과는 정반대라는 점과 악장의 심한 불균형이 논란의 핵심이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 창작의 자유가 사회주의 리얼리즘 구현의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하며 해빙 분위기를 이끌었던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은 이 곡을 ‘낙관적 비극’이라는 말로 옹호했고, 쇼스타코비치도 이에 힘입어 다양성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념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했다. 갈수록 커지는 논란에 그는 인간의 감정과 정열을 그리고 싶었다고 얼버무리며, 빠르게 곡을 쓰다 보니 실수가 있었다고 인정하고서 사태를 수습해야만 했다.
오늘날 이 곡은 D-S-C-H 동기가 처음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언급된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동기가 음악적 가능성이 풍부하다고 생각하여 이후에도 자주 사용했다. 그런데 이 곡에도 한 여성이 숨겨져 있다. 당시 24살이었던 쇼스타코비치의 제자, 엘미라 나지로바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엘미라에게 “나는 너에 대해 굉장히 많이 생각했고, 그래서 너의 이름을 음악에 넣기로 했네”라고 편지했으며, 3악장에서는 그녀의 이름으로 만든 코드 E-La-MI-Re-A, 즉 E-A-E-D-A 동기를 사용했다. 이 동기는 중간 부분 모든 관현악의 침묵 속에 호른의 독주로 강하게 연주되는데, 그 의미는 1990년 엘미라가 직접 밝히면서 알려졌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의 3악장이 가장 성공적이라고 보았는데,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담아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서져 버린 찰나의 일탈
모처럼 희망을 노래해야 할 시기에 신은 쇼스타코비치에게 비극을 내렸다. 1954년 12월에 부인 니나 바실리예브나가 아르메니아에서 핵 연구 도중 방사능에 노출되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정치적 수완이 좋았던 니나는 외부의 수많은 공격에서 쇼스타코비치를 보호해 주었고, 그를 훌륭히 내조했다. 후에 그의 아들인 막심은 어머니의 죽음이 아버지가 눈물을 흘린 몇 안 되는 사건 중 하나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쇼스타코비치의 어머니 소피아까지도 목숨을 거둔다. 이러한 슬픔은 쇼스타코비치의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무렵 작곡한 음악은 영화음악 두 편과 총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노래’(1956)가 전부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56년 초 공산청년동맹의 교사였던 30대 초반의 마르가리타 카이노바를 만났다. 니나와 비슷한 용모를 가진 데다 공산당원으로서 자신을 정치적으로 방어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찬 쇼스타코비치는 그녀에게 청혼했고, 1956년 7월 결혼에 성공했다. 마침내 두려웠던 스탈린은 사라졌고, 부인의 빈자리도 채워졌다. 결혼 한 달 후에 완성한 현악 4중주 6번(1956)에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기쁜 마음이 녹아있다.
그런데 그 꿈은 곧 깨지고 말았다. 마르가리타는 사춘기를 겪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자녀들과 갈등을 일으켰고, 그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으며, 심지어 그의 음악도 좋아하지 않았다. 1959년 별거에 들어간 부부는 해가 바뀌기 전에 이혼으로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세상을 떠난 첫 부인 니나가 그리웠던 쇼스타코비치는 이듬해 3월 현악 4중주 7번(1959~1960)을 완성하여 ‘니나 바실리예브나 쇼스타코비치의 추억’에 헌정했다. 이 곡은 3악장이 쉼 없이 연주되고 탄탄한 순환구조를 갖췄다는 점에서 현악 4중주 5번과 공통점이 있다. 마르가리타로 인한 잠시의 일탈에서 돌아온 것이다.
죽음을 노래하다
쇼스타코비치는 우울했다. 기대했던 해빙이 더딘 데다, 가족의 분위기도 좋지 않았고, 소아마비 증세로 신체적 어려움마저 겪고 있었다. 게다가 정부의 요청으로 공산당 입당을 고민하게 되면서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를 지배하고 있던 생각은 죽음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첼로 협주곡 1번(1959)에서 영화음악 ‘젊은 호위병’(1947~1948) 중 ‘영웅의 죽음’의 첫 네 음을 사용하여 죽음을 표현했고, 현악 4중주 8번(1960)에 첼로 협주곡 1번을 인용할 때도 이 주제를 사용했다. 그리고 바그너 ‘신들의 황혼’ 중 ‘장송 행진곡’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1악장 2주제의 힌트를 넣는 등 죽음에 대한 이미지로 곡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1960년 공산당에 입당하여 정치적 문제에 대비했고, 1962년 11월에 음악학자이자 문예지 편집자인 이리나 수핀스카야와의 세 번째 결혼으로 아내의 빈자리를 채웠다. 지적이었던 이리나는 남편의 예술을 이해했으며, 쇠약해져 가는 쇼스타코비치를 충실히 보살폈다. 쇼스타코비치는 현악 4중주 9번(1964)을 이리나에게 헌정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서서히 죽음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어떠한 두려움도 사라진 그는 역시 자신의 고통을 유대인에 투영한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1962)를 발표했다. 나치 군대가 유대인 7만 명을 몰살했던 키예프의 바비 야르 절벽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가사로 사용된 예프게니 예프투셴코의 시 ‘바비 야르’는 러시아에서의 유대인 탄압을 이 사건에 비유하며 추모했다. 정부는 초연을 금지하려 했고, 므라빈스키는 지휘를 거부했다. 그런데도 1962년 12월 18일, 지난 1961년 교향곡 4번을 초연했던 키릴 콘드라신이 지휘를 감행하여 ‘바비 야르’는 예정대로 초연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인민예술가이자 레닌 상과 레닌 훈장 수훈자라는 위엄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 일 때문이었을까? 이듬해 3월 당시 소련 총리였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모든 예술 형식에 규율이 필요하다는 연설을 했다. 해빙 분위기를 단속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가라앉았다. 현악 4중주 11번(1966)이나 첼로 협주곡 2번(1966), 바이올린 소나타(1968) 등 우울함으로 가득하면서 해결되지 않는 질문만 남기는 작품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교향곡 14번(1969)으로 그 질문에 답했다. 오로지 죽음에만 집중하는 이 연가곡은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쇼스타코비치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루돌프 바르샤이에 의해 무대에 올랐다.
이후 발표한 교향곡 15번(1971)이나 현악 4중주 14번(1972~1973)은 죽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냉소적인 유머가 있고, 실험적인 면을 담았을 뿐 아니라, 고전 작품들을 인용하기도 한 이 곡들의 의미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애써 외면한 것일까? 하지만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의 글에 붙인 모음곡’(1974)에서 그는 죽음으로써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느린 템포로만 구성된 현악 4중주 15번(1974)과 최후의 작품 비올라 소나타의 마지막 3악장 ‘아다지오’에서는 마침내 운명을 받아들인다.
쇼스타코비치는 공산주의의 부역자였을까? 아니면 열렬한 반공 투사였을까? 그의 삶과 음악을 보건대, 이 모두 정답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보고 겪고 느낀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예술가였던 동시에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이러한 두 정체성이 그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력했던 이유다. 그의 생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과 가족에 최선을 다했던 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기에, 우리는 그의 음악을 듣고 위로를 받으며 새로운 메시지를 얻게 된다.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기고와 해설, 강의 등 여러 활동으로 우리를 위한 음악으로서의 클래식을 나누고 있다. 서울시향의 프리렉쳐를 진행하고 있으며,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자문위원, 현대음악앙상블 ‘소리’ 프로그래머로서 흥미로운 음악회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