톤마이스터 최진, 작곡가의 마음을 만나는 시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6월 23일 9:00 오전

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17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톤마이스터 최진

작곡가의 마음을 만나는 시간

 

최진(1973~) 서울대 음대 기악과 재학중 도독해, 뒤셀도르프 국립 음대 Ton und Bild 과정을 마쳤다. 국내외 오케스트라 및 연주자들과 지속적으로 음반 작업을 해오고 있으며, DG•데카•워너 클래식스 등을 비롯한 주요 음반 레이블과 협업했다. 2025년부터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사운드 엔지니어링 전공을 맡고 있다.

 

첫 음반의 기억

#R. 슈트라우스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성을 다한 첫 녹음

존 피오레/뒤셀도르프 심포니 오케스트라

감상 포인트 다른 음반들과 비교 필수!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난 저는 어려서부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음악을 듣고 공부하며 자랐습니다. 오디오에 관심이 많으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좋은 오디오 시스템에서 나오는 사운드가 무엇인지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죠. 어릴 적 접한 다양한 종류의 방대한 음악들이 지금의 일을 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될 줄은 당시엔 미처 몰랐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좋아하는 곡들을 들을 때면 두세 개는 기본이고, 네다섯 개를 비교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열 개 이상의 연주를 비교하기도 했지요. 그렇게 수많은 연주를 들으며, 어떤 방식으로 연주되어야 작곡가의 의도에 가장 가까워지는지를 제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여러 녹음을 했지만, 2001년 제가 28살이던 해에 작업한 이 음반은 독일의 저명한 레이블을 통해 발매된 첫 정식 음반입니다. 당시 뒤셀도르프 톤할레는 보수 전이었고, 음향 조건도 좋지 않았습니다. 사용된 장비 또한 최상의 조건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 음반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다행히 현지 여러 음반지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기도 했지요.

28살은 연주자에게는 전성기이며, 지휘자 역시 적은 나이지만 상임을 맡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서른도 되지 않은 사람에게 레코딩 프로듀서이자 톤마이스터의 역할을 맡기는 일은 드뭅니다. 당시 부족한 독일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저를 믿고 함께해 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당시 R. 슈트라우스의 ‘부를레스케’를 연주했던 피아니스트 게르하르트 오피츠가 직접 쓴 편지에 수정 사항을 담아 보냈던 것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 음반 작업의 숨겨진 약점들이 오디오 기계를 테스트하는 데 시약 같은 역할을 하기에 지금도 종종 꺼내어 사용하곤 합니다.

 

 

음악 너머 내면의 고통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작곡가의 내면을 헤아리다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감상 포인트 망설이는 듯한 불안감과 내면에서 터져 나오지 못하는 작곡가의 괴로움

 

나이가 들고 여러 음반 작업을 하다 보니 얻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작곡가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많은 작곡가가 다양한 곡을 나름의 이유로 썼겠지만, 간혹가다 자서전이나 일기처럼 자신을 투영한 작품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동안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 차이콥스키의 여러 교향곡을 즐겨 들었지만, 그중에서도 4번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반면, 가장 유명하고 자주 연주되는 5번은 너무 흔한 유행가처럼 느껴져 크게 끌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완성도가 낮다고 여겨지는 1·2·3번보다도 뒷순위에 있었죠.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매우 침통한 곡입니다. 고통이 극에 달해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는 체념의 단계, 죽음의 단계에 이르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합니다. ‘비창’은 그런 상태에서 쓰인 곡이기에, 곡 자체에 담긴 고통 이상으로 깊은 아픔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반면, 5번은 겉으로는 아름다운 선율과 장대한 스케일로 인해 희망이 느껴지는 긍정적인 곡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하지만, 이 곡은 차이콥스키가 감히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던, 절규할 힘조차 없는 고통 속 몸부림의 기록이라 생각합니다. 2악장의 호른 솔로나 4악장에서 플루트와 오보에가 어우러지는 선율은 종종 그 아름다움에 집중해 연주되지만, 작곡 당시 그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연주의 방향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필, 카라얀/베를린필의 연주를 들어보면, 두 스타일의 성격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전자는 러시아 음악의 정수로, 강렬한 금관 중심의 전투적인 연주를, 후자는 서구적 스타일의 정수로 유려하고 세련된 고급스러운 연주를 들려줍니다. 두 음반 모두 시대적 평가에 부합하지만, 과연 이들이 차이콥스키의 심정을 온전히 전달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에 비해 덜 알려진 에셴바흐/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극적이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망설이는 듯한 불안감과 내면에서 터져 나오지 못하는 괴로움과 고통을 담고 있습니다. 아직 작곡가의 의도와 표현을 완전히 드러낸 음반은 찾지 못했지만, 이 연주는 썩어가던 차이콥스키의 내면을 가장 잘 이해한 연주로 느껴집니다.

 

 

슈만의 마지막 고백

#슈만 #‘유령 변주곡’ #눈물로 마주한 연주 백건우(피아노)

감상 포인트 연주가 끝나고 약 30초 후, 기가 다 소진된 듯한 백건우의 한숨이 들린다. 이것까지 담는 것이 이 곡의 완성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슈만의 음악을 처음 접하는 이들은 ‘어린이 정경’처럼 아름다운 선율에 매료되어 그의 작품에 빠져들곤 합니다. 하지만 그와 그의 음악 세계를 더 깊이 알아가다 보면, 슈만이 정신 질환에 시달렸고, 그의 음악 속에도 양면성이 녹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슈만의 내면을 이야기하는 곡들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유령 변주곡’은 마음 깊이 간직한 내적 고통을 담은 유언장 같은 작품으로, 이 곡을 일인칭 시점에서 연주한 음반이 있습니다.

몇 해 전,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님과 슈만의 작품으로 음반을 녹음한 적이 있습니다. 두 장의 CD로 구성된 음반은 다양한 슈만의 곡들로 채워졌고, 그중에는 ‘유령 변주곡’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백건우 선생님의 근래 녹음은 영적인 의미를 찾는 데 무게를 두고 있는데, 이 음반도 특히 그런 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사실 ‘유령 변주곡’은 제 마음에 잘 들어오지 않는 곡이었습니다. 곡이 어떤 느낌으로 연주되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음반 프로듀서로서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지요. 녹음을 마치고 몇 달 후, 백건우 선생님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후반 작업을 하던 중 이 곡 차례가 되었고, 편집이 마무리될 즈음에 갑자기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감동의 눈물이라기보다는 작곡가의 처절한 고통이 너무 생생하게 전해져 슈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마음에 오열하게 되었습니다.

톤마이스터라는 직업 특성상 좋은 연주에 감동하는 일은 있어도, 감정이 무너지는 일은 드문 편입니다. 하지만 백건우 선생님의 연주는 작곡가를 직접 만난 듯, 슈만의 괴로움에 깊이 공감한 연주였습니다. 연주도, 연주자도 사라지고, 오직 음악과 작곡가의 심정만이 남아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지나온 거장들과의 작업에서는 감탄 외에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더 깊은 무언가가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찾아올 그 거장들의 마지막 음반 녹음의 옆자리를 조용히 지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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