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마당놀이 4인방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12월 1일 9:00 오전

COVER STORY

 

마당 위에 쓰는 웃음과 해학

 

 

마당놀이는 우리 고전을 현대적 감각의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내면서 노래와 춤 등 우리 고유의 연희적 요소를 가미한 공연이다. 지금은 연말연시를 대표하는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지만, 그 출발점은 오히려 실험 정신에 가까웠다. 1981년 극작가 김지일과 기획자 이영윤이 창사 20년을 맞은 문화방송(MBC)과 손잡고 마당놀이 ‘허생전’(연출 손진책)을 선보이면서 ‘마당놀이’라는 명칭이 처음 세상에 나왔다

홍예원 기자 사진 황필주·국립극장

 


 

TALK & TALK

 

다시 ‘마당’에 선 사람들

 

마당놀이 4인방 대담 국수호·김성녀·박범훈·손진책

 

연출가 손진책, 작곡가 박범훈, 안무가 국수호, 연희감독 김성녀. 각각 국립극단·국립국악관현악단·국립무용단·국립창극단의 수장을 지낸 얼굴들이자, 1980년대 마당놀이의 황금기를 함께 쌓아 올린 원년 멤버들이다.

한 시절을 풍미한 네 거장은 지금도 한 해가 저물고 시작될 무렵마다 모여 마당 위에 웃음과 해학을 써나가고 있다. 2014년 국립극장이 ‘심청이 온다’를 시작으로 마당놀이를 선보인 이래, 이들은 국립극장이라는 텃밭에 다시 돌아와 창작의 판을 펼치고 있다. 네 거장이 올해 초빙한 이는 ‘홍길동’이다!

네 분이 함께 마당놀이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손진책 마당놀이 이전엔 다들 자기 길을 걷고 있었어요. 나는 한국적인 연극을 붙잡고 있었고, 박범훈 선생은 국악, 국수호 선생은 한국무용. 각자 다른 길이었죠. 그런데 국립극장으로 모이면서 새로운 텃밭이 생겼습니다. 그 힘이 마당놀이로 피어났죠.

국수호 우리는 모두 국립극장의 식구였어요. 국립극단, 국립국악관현악단, 국립무용단, 국립창극단…. 네 사람 모두 국립극장이 키운 인물들이죠. 국립극장은 우리에게 고향 같은 곳이었어요. 그곳에서 음악·연극·춤을 배우고, 나중에는 각 단체의 수장까지 맡았으니까요. 행정적으로는 국가기관이지만, 우리한텐 ‘우리가 키운 집’이자, 동시에 ‘우리를 키운 집’이었습니다.

박범훈 그래서 우리끼리는 국립극장을 짝사랑한다고 해요. 너무 사랑하니까 종종 불평도 하고 야단도 치고 그러죠.(웃음) 다들 자기 분야에서 목표를 향해 달려왔지만, 어느 순간 다른 장르를 갈망하게 되었고, 그걸 손진책이라는 연출가가 ‘마당’으로 묶어낸 거예요.

 

마당놀이, 그 첫 번째 판이 열리던 날

1986년 극단 미추가 창단되면서 네 사람의 협업은 더욱 굳건해졌다. 손진책의 연출, 박범훈의 음악, 국수호의 춤, 김성녀의 연희와 연기가 더해지며 마당놀이라는 장르가 하나의 스타일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후, ‘별주부전’ ‘놀보전’ ‘이춘풍전’ ‘방자전’ 등 레퍼토리를 확장하며 매년 관객과 만나왔고, 시원한 시대 풍자와 배꼽 잡는 해학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특히, 김성녀·김종엽·윤문식 ‘3인방’은 찰진 입담과 연기로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고, 공연장 앞은 출연 배우 차마저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명절 황금시간대 TV 녹화방송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렇게 30여 년간 약 2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마당놀이는 2010년 30주년 기념 공연을 끝으로 잠시 막을 내렸다.

 

마당놀이가 극단 미추에서 국립극장으로 옮겨오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나요?

김성녀 처음엔 문화방송(MBC) 기획으로 10년 정도 이어졌고, 그다음엔 극단 미추가 30년을 버텼어요. 민간 극단이 큰 판을 떠안고 간 셈이죠. 그러다 ‘이젠 우리 힘만으로는 어렵겠다’ 싶은 순간에 안호상 전 국립극장장이 판을 다시 열어줬어요. 이제는 국립극장이 국가기관으로서 마당놀이를 꾸준히 이어갈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1980년대 마당놀이가 그 시대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을 짚어본다면요?

손진책 그 당시는 군부 정권 시절이었잖아요. 정치 이야기를 직접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옛날이야기’로 가는 겁니다. 양반, 원님, 탐관오리…. 그런데 관객은 다 알아요. ‘아, 지금 이야기구나’하는 거죠. 우리 민속극의 근본은 희극 정신이에요. 누군가 권력을 휘둘러도, 아무리 가난해도 웃음으로 탁! 뛰어넘는 거죠.

김성녀 요즘 세상에 코미디 같은 상황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막 쏟아지는데, 못 하니까 너무 답답해요. 예전에 홍길동 역을 했을 때는 불씨 내리는 마술 장면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규제가 많아졌어요. 또 요즘은 전부 알고리즘 속에 살잖아요. 객관적인 옳고 그름이 사라지면서, 해학과 풍자로 풀어내기 더 어려워진 시대가 된 것 같아요.

박범훈 지금은 관객들의 편이 갈려 있어요. ‘나는 이쪽, 너는 저쪽’. 마당놀이에 와서도 그걸 못 풀어요. 마당놀이에서는 그걸 내려놓고 같이 놀아야 하는데, 이쪽에서 좋다고 하면 여기선 손뼉 치고, 저쪽에서는 화내고…. 풍자가 마당놀이의 생명인데 말이죠.

마당놀이라는 장르를 정의하는 핵심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손진책 우리가 마당놀이를 하며 세웠던 기본 생각은 ‘마당 정신’이에요. ‘마당’이란, 멍석만 펴놓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삶의 현장 전체를 말합니다. 시간으로는 지금, 장소로는 여기. 그 자리에서 인간답게 살아보려는 마음이죠. 정신적으로는 ‘지금 여기에서 인간답게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 그게 마당 정신이에요. 그걸 음악·연기·춤으로 풀어낸 게 바로 마당놀이고요.

박범훈 예전에는 못살아도 마당에서 살았어요. 거기서 모이고, 대화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상여도 마당에서 나갔습니다. 지금은 각자 이익만 챙기다 보니 그 정신이 사라졌죠. 그래서 마당놀이를 하는, 그날만큼은 모두가 한 마당의 식구가 되는 겁니다.

손진책 마당놀이는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를 ‘열게’ 만들어요. ‘너와 나’가 아니라 ‘우리’를 만드는 거죠. 다른 공연은 관객이 없더라도 막이 오르면 진행되지만, 마당놀이는 관객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어요. 공동체 정신을 몸으로 느끼고, 그 정신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기에 관객들이 계속 찾아오는 거예요.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웃음을 만든다는 것’

국립극장 마당놀이 ‘놀보가 온다’(2016)

30주년 기념 공연의 4년 뒤인 2014년, 국립극장은 마당놀이의 원조 창작진과 함께 ‘극장형 마당놀이’를 선보이며 장르의 부활을 알렸다. 체육관이나 가설 천막극장에서 펼쳐지던 마당놀이는 1천 5백석 규모의 해오름극장으로 옮겨오며 규모가 크게 확장됐다.

여기에는 단순히 ‘장소를 옮겼다’는 의미 이상이 있었다. 배우와 관객이 숨을 섞던 마당을, 조명·음향·무대 등의 기계장치가 완비된 대형 극장으로 끌어오는 일은 일종의 실험이자 도전이었다. 전통적 ‘멍석의 판’과 현대적 극장 문법이 서로 부딪치고 섞이면서, 마당놀이는 다시 한번 새로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심청이 온다’(2014·2017)를 시작으로 ‘춘향이 온다’(2015) ‘놀보가 온다’(2016) ‘춘풍이 온다’(2018·2019)까지 전 작품이 매진을 기록하며 국립극장의 연말 대표작이 됐다.

매 시즌, 창작진은 시대의 언어와 유행을 어떻게 마당 틀 안에 녹일 것인지 실험해 왔다. 그리고 올해는 극단 미추의 ‘홍길동전’(1993)을 토대로 하는 새로운 ‘홍길동’이 무대에 오른다. 허균의 홍길동이 율도국으로 향했다면, 이들의 홍길동은 다시 오늘날의 현실 문제들이 겹겹이 쌓인 2020년대를 향해 걸어 들어온다.

 

이번에 다시 올리는 ‘홍길동이 온다’는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손진책 ‘홍길동전’은 한국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의의도 있지만, 작가 허균을 떼어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그가 품었던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은 신분제 비판, 탐관오리를 겨냥한 정치 풍자, 이상국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세 갈래가 결국 작품의 뼈대가 되었고요. 말하자면 ‘홍길동이 곧 허균이고, 허균이 곧 홍길동’인 셈이죠. 권력과 위선을 정면으로 비튼 홍길동은 언제나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온갖 차별의 벽이 여전히 존재하는 지금, ‘홍길동전’이 꾸준히 공감을 얻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홍길동이 온다’는 단순한 재연이 아니라, 극단 미추 시절 네 사람이 함께 만들어 올렸던 ‘홍길동전’이라는 원형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펼쳐내는 작업이다. 그 시절 이들이 고민하고 다투고 부딪치며 만들어냈던 과정은 이번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사방을 향한 시선, 노래와 춤과 대사의 합, 관객의 호응에 따라 즉흥적으로 장단과 동선을 바꾸는 감각. 이 모든 요소가 한데 얽히는 자리에서 연출가, 안무가, 작곡가의 논쟁은 거의 ‘연례행사’였다. 웃음을 향한 전진은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고, 치열하기까지 했다. 지금은 껄껄 웃는 회상의 목소리로 떠올려보지만, 당시에는 국수호가 땀 흘려 만들어놓은 동작을 손진책이 “이건 아니다” 한마디로 지워버리고, 박범훈이 쓴 곡을 연출가와 안무가가 다시 바꾸자고 하고, 결국 박범훈이 “안 한다”며 악보를 집어던지고 나가던 시절도 있었다고. 김성녀는 “지금은 화내기보단 체념하고 ‘알겠다’하고 다시 하는 경지”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김성녀 ‘홍길동전’을 할 때 무대 위에서 갑자기 자전거를 타라고 해서 줄 위로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울면서 ‘안 하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진짜 자전거를 가져와서 했는데, 자전거가 너무 무거워서 같이 날아가다가 무게 때문에 떨어졌어요. 그래도 그 장면이 인기가 너무 많아서, 나중에는 스티로폼으로 다시 만들어서 했죠. 당시 유행했던 영화 ‘E.T’를 패러디하던 장면이라 아직도 사진을 보면 웃음이 나요.

박범훈 당시 극단 미추의 배우들은 연기는 잘하지만, 소리를 전공한 사람들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던 차, 홍길동 역에 김성녀 선생이 캐스팅된 거죠. ‘아, 이제 제대로 곡을 한번 써보자’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히 악보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래된 일인데, 그때 김성녀 선생이 울면서 노래하고 연기하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네요.

예전과 달라진 창작 방식이나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국수호 허균이 살던 시대의 몸짓이 택견이었다면, 지금의 관객에게는 태권도·K팝·아크로바틱 같은 움직임이 훨씬 더 익숙하게 느껴질 거예요. 옛 방식만 고집해서는 공감대를 얻기 어렵기 때문에 이번 무대에는 이 네 가지를 모두 녹여냈어요. 마당놀이는 전통적으로 판소리 다섯 마당의 구조를 밑바탕에 두지만, ‘홍길동’은 창조된 인물인 만큼 기존 틀을 더 자유롭게 확장할 수 있죠.

박범훈 맞아요. ‘춘향이 온다’ ‘심청이 온다’ ‘놀보가 온다’를 할 때는 판소리 다섯 마당이 기둥이 됐는데, ‘홍길동전’에서는 그 힘이 싹 빠져버려서요. 음악을 완전히 새로 만들어야 했어요. 그래서 전통 음악에 기대지 않고 뮤지컬 식으로 시도한 첫 작품이 되었죠. 당시에는 국악기가 개량도 안 됐을 때라, 악기의 다양성이 부족했고, 연주도 지금만큼 좋지 못했어요. 이번에는 제자인 김성국 중앙대 교수가 전체 음악을 맡고, 저는 보완을 하고 있습니다. 옛 음악도 60~70% 정도는 다시 사용되지만, 나머지는 김 교수가 새롭게 채워 넣고 있어요.

김성녀 셰익스피어 희곡보다 마당놀이처럼 ‘잘 노는’ 게 훨씬 더 어려워요. 관객 코앞에서 사방으로 연기하고, 뒤에서 하는 연기가 앞사람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게 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이번 작품에 기대가 커요. 홍길동 역을 맡은 두 후배 (이)소연이는 체격도 좋고 소리도 좋고, (김)율희는 통통하고 당당하고 야무지고 재담도 잘해요. 제가 혼자 하는 것보다, 두 배우의 변신을 지켜보는 게 요즘 관객들에게 훨씬 재미있고 신선하지 않을까 싶어요.

 

전승의 기로, 1세대가 남긴 과제

이제 이들은 ‘마당놀이의 마지막 1세대’이자 동시에 ‘다음 세대를 키워야 하는 첫 세대’로 서 있다. 여전히 버틸 힘도 있고, 새로운 시도를 향한 욕심도 남아 있지만, 마당놀이가 더 이상 개인의 열정과 희생만으로 굴러갈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는 사실을 네 사람 모두 잘 알고 있다.

마당놀이의 미래를 지탱할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박범훈 제일 중요한 건 제대로 된 바통터치예요. 우리는 배가 고파도 했어요. 희생정신 하나로 버텼죠. 하지만 지금 젊은 세대에게 그걸 그대로 요구하면 안 돼요. 어느 정도 보상을 받지 못하면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시대니까요. 국립극장을 비롯한 공공기관이 ‘이 장르 하나를 지킨다’는 마음으로, 최소한의 사회적 보장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봅니다.
국수호 안무도 마찬가지예요. 마당놀이 안무를 함께 키워나갈 후배를 제대로 길러내려면, 그 사람의 삶을 책임질 만큼의 대우가 필요합니다. 마당놀이는 한번 시작한다고 되는 장르가 아니라, 40년을 버틸 수 있어야 하거든요. 우리가 사라졌을 때 이 연희가 통째로 없어지면 그게 얼마나 큰 손해예요? 축적된 노하우라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것만 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이 마련돼야 합니다.

김성녀 배우들에게도 전해야 할 게 많아요. 요즘 배우들은 목도 좋고 소리도 잘하고 재주도 많은데, 다만 ‘마당에서 노는 법’이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이죠. 마당 배우는 혼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관객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옛날 이야기를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만드는 사람이어야 하거든요. 장면마다 ‘여기선 관객을 어떻게 끌어들이지? 이 대사는 누구에게 줄까?’를 계속 분배하면서 생각해야 하고요. 이런 감각을 후배들이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수십 년간 이 여정을 이끈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김성녀 저는 관객에게 제일 고마워요.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관객이 안 따라오면 끝이니까요. 공연예술에서 ‘대를 이어 공연장을 찾는 관객’을 가진 장르는 아마 마당놀이가 유일할 거예요. 작년에 ‘모듬전’을 할 때, 엄마 아빠 손에 끌려왔던 어린아이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데리고 온 걸 봤어요. 플래카드를 꺼내 보이면서 “몇년도에 누가 우리를 데리고 왔었다”고 이야기하는 걸 듣는데, 울컥하더라고요. 젊은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와 환호하면서 공연을 보는 모습을 보면, 정말 뭉클하고 뿌듯해요.

손진책 마당놀이 공연의 ‘반’은 관객이 완성해 주는 거예요. 우리는 판을 깔아줄 뿐이죠. 관객이 와서 웃고, 야유도 보내고, 박수도 치고, 추임새를 넣어주면서 비로소 하나의 공연이 완성되는 거죠. 그게 바로 마당놀이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월이 흐르며 무대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마당놀이가 지켜온 ‘마당 정신’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현실의 삶을 마당 위로 끌어올리고, 웃음과 풍자로 털어내며, 배우와 관객이 함께 판을 움직이는 힘 말이다. ‘홍길동이 온다’ 역시 그 흐름 속에서 다시 한번 마당을 열어젖혔다. 이 판을 일궈온 네 사람, 대를 이어 극장을 찾는 관객들, 그리고 앞으로 이 바통을 이어받을 젊은 예술가들까지, 모두가 한 마당에서 저마다의 흥을 보태며 장면을 완성하고 있다. 자, 멍석은 이미 깔렸다. 이제 다시 놀아볼 차례다!

 

웃음을 잃은 시대가 만들어낸 판, 마당놀이의 탄생 배경

허규

웃음을 잃어버린 시대가 낳은 사생아가 마당놀이였다. 1970년대 대학생과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마당극 양식이 유행한 후 1980년대는 마당놀이가 정착하는 시기였다. 손진책의 연출로 이루어진 마당놀이는 1981년부터 문화방송(MBC)의 기획으로 시작하여 해마다 계속됨으로써 새로운 예술로 자리 잡았다. 김성녀, 김종엽, 윤문식 등 마당놀이 스타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마당놀이는 ‘춘향전’ ‘방자전’ ‘놀부전’ ‘이춘풍전’ 등 잘 알려진 우리 고전을 바탕으로 하여 넓은 대중에게 고른 재미를 주었다.

1981년은 제5공화국이 출범한 해라서 마당놀이에 군부 정권의 사주가 있었다는 말도 있었다. 많은 수의 젊은 관객들이 마당놀이가 오르는 문화체육관에 몰리자, 이것이 시위로 발전할 것을 우려한 정부는 전경을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에 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삼엄한 독재 체제 아래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사회 고발적인 내용을 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마당놀이는 ‘지금’이 아닌 ‘옛날’의 이야기를 펼치는데 ‘옛날’의 세태와 ‘지금’의 세태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 아니던가. 극 중에서 풍자의 폭탄은 양반을 향해 던졌는데 그것을 맞는 이들은 오늘의 권력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풍자 정신과 관객이 내뿜는 웃음은 마당놀이의 힘이 되었다.

연출가 손진책이 닦은 마당놀이에 작곡가 박범훈과 무용가 국수호의 합류는 그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극작가 김지일의 언어에 담긴 웃음의 씨를 연출과 음악, 무용과 몸짓으로 꽃피우는 이들이었고, 마당놀이의 트로이카로 자리 잡았다. 1986년 손진책의 극단 미추 창단도 마당놀이 역사에 한몫했다. 극단 미추가 마당놀이의 주축이 되면서 미추도, 마당놀이도,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이다. 이후 마당놀이는 1988년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도 빠지지 않는 행사가 되었는가 하면, 철학자 김용옥은 ‘아름다움과 추함’(1996)이라는 철학서를 저술하여 마당놀이에서 한국 공연예술의 정수와 진수를 뽑아내는 이론적 작업을 하기도 했다.

마당놀이의 맏형으로 비유되는 마당극의 대가 허규(1934~2000)는 1981년 극장장으로 취임하면서 국립극장 야외에 놀이마당을 만들고, 1983년 ‘호랑이놀음’이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짧은 마당극을 묶어 공연하기도 했다. 그러한 기억을 안고 있는 터에, 지금 마당놀이의 원년 멤버들이 다시 모여 이야기를 풀어낸다. 세월이 흘러 이 멤버들의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지만, 세태를 씹는 어금니는 더 강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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